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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종벼 '북흑조'. 토종벼는 개량벼와 달리 긴 까락(벼수염)이 있다.
 토종벼 '북흑조'. 토종벼는 개량벼와 달리 긴 까락(벼수염)이 있다.
ⓒ 전국씨앗도서관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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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종 씨앗은 강합니다. 오랜 세월 환경에 가장 잘 적응해 살아남았으니까요."

지난 2020년 가을, '생물다양성 유기농업' 교육을 하던 박영재 전국씨앗도서관협의회 대표가 한 말이다.

이날 박 대표는 "토종 씨앗을 보존하는 건 우리의 종자 주권을 지키고 생물다양성을 지키는 일"이라며 토종 씨앗이 품은 가능성과 의미에 대해 설명했다.

그로부터 4년 만에 다시 만난 그는 여전히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전국을 돌며 토종 씨앗을 수집한다. 매주 화요일 KBS 라디오에 출연해 씨앗 채종법을 알려주는 한편 주기적으로 강의와 교육도 한다. 밤이면 농업 서적을 탐독한다.

수원·화성의 드넓은 채종밭에서 농사짓고 다시 씨앗을 받는다. 토종 씨앗은 해마다 1000점씩 늘어나 이제 8000점 가까이 된다. 인터뷰하던 날도 그는 밭에서 일을 했다.

"광교산 자락에선 토종 볍씨를 재배해요. 요즘은 6월 모내기 육묘 준비로 바쁘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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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종 씨앗을 지역에 되돌려주자"

그의 첫 직장은 생협이었다. 어린이집에 농산물을 납품하면서 친환경 농업에 눈 떴다. 농사를 직접 짓고 싶어졌다. 텃밭 농사로 시작해 토종 종자 연구자 안완식 박사(농촌진흥청 농업유전자원센터 초대 센터장)가 이끄는 '토종씨드림'의 구성원이 됐다. 2008~2017년 토종 씨앗을 수집하고 증식하는 일을 담당했다.

'매꼬지 상추'. 충남 논산의 매꽃마을이 원산지인 이 토종 상추는 잎이 두껍지만 연하고 맛은 달착지근하다. 잎대를 가르면 흰 우윳빛 진액이 나오는데, 지난 16년 동안 토종 씨앗을 보급해 온 그에게 토종의 '맛'을 처음 알게 해줬다.

"안 박사님과 함께 텃밭 농사를 지었는데 그분이 수집한 상추 씨앗을 심어 제가 받은 첫 토종 씨앗이에요. 맛이 좋았고, 꽃대를 빨리 올리지 않아 한여름에 상추가 비쌀 때도 계속 잎을 뜯어 먹었어요. 덕분에 토종 작물의 매력을 알게 됐죠."

전국을 돌며 토종 씨앗을 수집하는 그의 머릿속에 언젠가부터 한 가지 의문이 맴돌았다. '수집한 씨앗을 그 지역에 돌려줘야 하지 않을까?'

"지역의 농민, 환경 농업 하는 사람들, 생협 소비자들 그리고 토종 씨앗에 관심 있는 보통 사람들도 토종 씨앗의 보존에 참여시키는 게 결국 생태 순환을 실현하는 길이라고 생각했죠."

2015년, 그는 수원시 기후변화체험교육관에 수원씨앗도서관을 개관했다. 현재 그가 운영하는 이 씨앗도서관을 포함해 전국 15곳에서 씨앗도서관이 운영되고 있다.
 
12일 수원씨앗도서관에서. 박영재 전국씨앗도서관협의회 대표.
 12일 수원씨앗도서관에서. 박영재 전국씨앗도서관협의회 대표.
ⓒ 이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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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씨앗도서관은 어떤 일을 하나요?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듯이 씨앗을 빌릴 수 있는 곳이에요. 대출한 씨앗은 농사를 지은 후 새 씨앗을 받아 반납하면 됩니다. 전국 15개 씨앗도서관의 활동가들은 농사를 지어 받은 씨앗을 도서관을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대출해 줍니다. 수원씨앗도서관에서 대출해 주는 씨앗은 모두 제가 농사지어 받은 것들이죠."

- 누구나 씨앗도서관을 만들 수 있나요?
"일단 도서관을 건립하고 운영할 예산이 있어야 하고, 도서관을 만들 지역에서 농사를 짓는 분이라야 합니다. 농사지을 채종밭과 거둔 종자를 보관할 저장고도 있어야 하죠. 그 지역에서 토종 씨앗에 대한 교육 프로그램을 기획·진행해야 하고요. 예산이 부족하면 지자체의 지원을 받는 방법도 있어요. 이런 분들에게 제안서 작성법, 토종 씨앗 수집법 등에 대해 조언을 해주기도 합니다."

전국씨앗도서관협의회, 토종씨드림, 여성농민회 등 토종 씨앗 보존 활동을 펼치는 단체는 여럿이다. 그는 "이런 단체가 많아질수록 다양성이 더 강화되는 게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토종 씨앗을 지키는 사람

농촌진흥청(농진청)이 정한 '토종'은 30년 이상 우리나라 기후와 환경에 적응한 작물이다. 사람으로 치면 1세대지만 작물로서는 30세대를 거치며 적응한 것이다. 원래 심었던 형질이 유지되면 '고정종'이라고 부르는데, 토종 씨앗도 고정종이다. 종자회사에서 파는 종자는 고정종이 아닌 것이 많다. 씨앗을 받아 다시 심으면 모양이 변하거나, 형질이 바뀐다. 농진청이 개발해 보급한 종자도 토종 씨앗이라고 하지 않는다.

박 대표가 토종 씨앗 수집을 하기 전 반드시 하는 일이 있다. 탐방지의 '면지'를 꼼꼼히 살피는 것. 면지란 지역의 역사와 문화, 지명의 유래부터 세시풍속까지 망라한 인문지리서다.

"이야깃거리를 최대한 많이 모아서 가죠. 사투리, 격언, 속담을 미리 공부하면 할머니들과 대화하는 데 도움이 되거든요."

- 낯선 사람들이 갑자기 찾아와서 토종 씨앗을 달라고 하는데, 경계하시진 않나요?
"처음엔 경계를 하시죠. 하지만 할머님들께 토종 씨앗을 수집하는 목적에 대해 자세히 말씀드리면, 대부분 흔쾌히 응해주세요. 본인이 평생 지켜오신 씨앗에 대해 자부심이 있으시니까 굉장히 적극적으로 인터뷰에 응해주시고, 씨앗들도 내주시고요."​
 
용의눈이팥, 선비잡이콩 등 이름도 모양도 다양한 토종 씨앗.
 용의눈이팥, 선비잡이콩 등 이름도 모양도 다양한 토종 씨앗.
ⓒ 전국씨앗도서관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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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집한 씨앗과 자료는 어떤 과정을 거쳐 보존 단계까지 가나요?
"어느 정도 씨앗을 수집하면 한데 모아서 선별하는 작업을 거칩니다. 농진청과 백두대간수목원 시드볼트센터에 보낼 것, 현지 활동가들이 지역에 심어서 유지할 것, 씨앗도서관에 가져가서 심을 것으로 나눠요. 씨앗 정보를 엑셀 파일로 만들고, 인터뷰·영상 자료도 정리하죠. 지자체에서 예산을 지원하면 자료집을 만들어 씨앗과 함께 농진청이나 시드볼트 센터에 보낼 때도 있어요."

- 농진청의 국립농업유전자원센터와 시드볼트 센터에서 의뢰를 받고 수집 활동을 하는 건가요?
"두 기관에 종자를 기탁하는 이유는 농사를 지었을 때 씨앗을 못 받는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서죠. 그런데 정부 기관은 '토종 씨앗 보존'이라는 개념을 새로운 종자를 개발하는 재료로 여기는 것 같아요. 산림청(시드볼트 센터)이나 농진청(국립농업유전자원센터) 모두 진흥 기관이잖아요. 저는 '현지 보존'이야말로 토종씨앗을 지키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이제 환경 오염에 따른 기후변화는 피할 수 없게 됐어요. 작물이 급변하는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계속 재배하는 게 최선인 거죠."

전국을 돌며 토종 씨앗을 수집하는 것 외에 그가 집중하는 일 중 하나는 씨앗의 '진짜' 이름을 찾는 일이다.​

토종 씨앗, 너의 '진짜' 이름은
 
조선 전기 문신 강희맹이 사계절의 농사와 농작물에 관하여 1492년에 저술한 농업서 <금양잡록>.
 조선 전기 문신 강희맹이 사계절의 농사와 농작물에 관하여 1492년에 저술한 농업서 <금양잡록>.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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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자를 수집한 후 고전 농서 등에서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씨앗 이름이 있는지 찾아본다. 곡식 이름을 찾을 때는 <임원경제지> 중 '본리지', <금양잡록>을 많이 참고하고, 채소는 <필운지>를 참고한다.

- 고전농서에서 확인한 토종씨앗 이름 중에 기억나는 게 있나요?
"<금양잡록>에 '몰의녹두' 이야기가 나와요. 몰의녹두? 녹두 이름에 왜 옷 의(衣) 한자가 붙었을까? 궁금한 거예요. 자료를 계속 찾다 보니 전통 복식을 다룬 논문에서 '몰의'라는 단어를 찾았어요. 조선시대 장례를 치를 때 입었던 수의(壽衣)를 가리키는 말이었대요. 녹두의 색깔이 노란 상복 색깔이랑 비슷해서 몰의녹두로 불린 거라 추측할 수 있는 거죠."

- 현재 불리는 이름이 있는데, 고서를 찾아 씨앗의 본래 이름을 확인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토종 종자의 이름이 와전되거나 아예 사라진 것이 많아요. <임원경제지>에서 찾은 '환부두(鰥夫豆)'는 '홀애비밤콩'을 가리켜요. '환부'는 홀아비를 뜻하는데, 한 알만 심어야 하는 이 콩의 특성을 반영한 이름이에요. 콩은 보통 세 알씩 심거든요. 용의눈이팥, 몰의녹두, 홀애비밤콩 등 고전 농서를 통해 토종 씨앗의 이름을 찾는 건 고유의 특성뿐만 아니라 씨앗에 담긴 역사와 문화를 찾는 일이기도 해요."

토종 씨앗, 오래된 미래

5월 22일은 '국제 생물다양성의 날'이다. 1992년 유엔이 '생물다양성협약'을 발표한 날이다. 전 세계 생물다양성에 대한 이해와 보존을 위해 제정했다.

다양한 토종 작물이 자라 다양성의 보고(寶庫)인 그의 밭엔 우크라이나에서 온 토종 씨앗도 뿌리를 내렸다.

"토종 씨앗 보존 활동을 하는 우크라이나 단체에 '나 역시 토종 씨앗을 수집한다'고 메일을 보냈을 때, 피망, 파프리카, 양배추 등의 씨앗을 보내왔어요. 전쟁의 기미도 없을 때였죠. 전쟁이 어서 끝나 그분들에게 씨앗을 다시 보내줄 수 있길 바랍니다."
토종벼 재배 논에서
 토종벼 재배 논에서
ⓒ 박영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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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종 씨앗을 보존해 보급하면서 보람을 느끼는 순간은 언제인가요?
"토종 씨앗을 찾는 사람이 굉장히 많아졌어요. 경상남도, 제주도 등 말 그대로 전국에서 찾아오세요. 또 토종 작물로 만든 요리 시식회를 할 때마다 참석한 사람들이 맛있다고 하면 기분 좋죠. 토종 콩가루를 커피와 섞는 실험도 하고 있어요. 토종 농가를 돕는 지자체도 나타났고요. 토종 작물로 사업에 도전하는 사람들이 많아진 것도 재미있어요."

그는 스무디·두유를 토종 콩으로 만들고 싶어한 사람 이야기를 했다. 문제는 생산자가 많지 않아 일일이 찾아서 수매까지 해서 전달해야 했다는 것. 전국을 돌아다니느라 기름값이 더 들었다.

"토종 작물 생산 농가가 많아지는 게 중요해요. 사업화를 떠나 더 강하고 좋은 토종 씨앗의 생산을 위해서도요."

우량종자를 만들기 위해 '선발'은 필수다. 콩 1kg에서 선발한 것과 10kg에서 선발한 것 중에선 10kg 쪽 콩이 우량종자일 확률이 높다.

"재배면적이 줄어들수록 안 좋은 씨앗을 골라낼 가능성이 커요. 좋은 씨앗을 계속 생산해 내기 위해서라도 재배 농가가 많아지길 바랍니다."

- 토종 씨앗의 보존은 왜 중요한가요?
"유기농법이 서구에서 들어온 개념 같지만, 우리가 전통적으로 써온 생태 순환농법이야말로 유기농법이에요. 농사를 짓고, 씨앗을 받아 다시 농사를 짓는 농사법이죠. 무엇보다 토종 문제를 떠나, 농업은 1차 산업이자 우리의 생존과 직결된 분야입니다. 토종 씨앗을 지키는 건 식량 주권을 지키는 일이자 생물다양성을 지키고 생태계를 보전하는 것과 연결됩니다. 산불이 나면 농업기술센터를 찾아가서 그쪽 지역에서 수집한 씨앗을 전달하기도 하거든요. 산불 농가들이 잃어버린 씨앗을 심어 토종으로 키우도록 돕는 거죠. 토종 씨앗을 수집하지 않았다면 도울 수 없었을 거예요."

그는 앞으로 토종 씨앗을 홍보하고 관련 정보를 망라한 플랫폼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많은 사람들이 토종 씨앗에 대해 더 쉽고 친근하게 다가갔으면 해서다.

- 토종 씨앗의 미래를 위해 가장 필요한 건 뭔가요?
"일단 농업이 살아야죠. 농업의 가치가 인정받는 사회가 된다면 결국 토종 종자의 중요성도 커질 거라 생각해요."

"일단 저는 오늘도, 내일도 토종 씨앗을 심고 키워나가는 일을 계속해 나갈 겁니다. 토종 씨앗의 중요성이 알려져 사람들이 토종 작물을 많이 찾는 날이 오길 바라요. 소비자가 늘면 생산자가 늘고, 생산자가 늘면 결국 좋은 씨앗이 나올 확률도 높아질테니까요."

태그:#박영재, #토종씨앗, #씨앗도서관, #종자주권, #생물다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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