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교수들의 사회 참여는 매우 저조하다. 이유를 들어보면, 논문 쓰느라, 업적 평가 점수 따느라 사회 운동에 시간을 낼 여유가 없어서 그리됐다는 것이다. 사진은 강제동원 해법 철회를 위한 경희대 교수 126명 시국선언 장면 2023.4.4
권우성
예전 교수들 가운데는 아무 대가도 받지 않고 자발적으로 학생들을 모아서 추가 강의를 하거나, 동아리 활동을 적극 지원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학생들은 교수들의 노력에 감동해 그들을 존경하고 닮고 싶어 했다. 사회 운동에 열심을 내는 교수들도 적지 않았다. 시민단체에 참여하는 교수들이 넘쳐났고, 그들의 열정적인 노력으로 수준 높은 정책 대안들이 만들어졌다. 그들에게 경제적인 대가는 없었다. 오히려 자기 돈을 쓰는 사람들이 태반이었다. 이들이 만들어낸 정책 대안 중에는 실제 정부 정책으로 채택되는 것들도 있었다.
반면 요즘 시민단체나 사회단체의 내부를 들여다보면 교수들의 참여는 매우 저조하다. 이유를 들어보면, 논문 쓰느라, 업적 평가 점수 따느라 사회운동에 시간을 낼 여유가 없어서 그리됐다는 것이다.
대학 밖에서 지식인의 역할을 훌륭하게 해내고 있는 한 인사에게서 이런 말을 들었다. 기자들이 기사 작성에 필요한 멘트를 '따기' 위해 교수나 박사들에게 연락하면, 내용을 모르고 있어서 먼저 관련 내용을 설명해주고 의견을 들어야 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현실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다. 이렇게 된 배경에는 점수로 논문 대량 생산을 강요하는 분위기가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조선 후기 성리학이 공리공담(空理空談)으로 흘렀던 상황과 매우 유사하다.
신자유주의의 득세와 대학의 퇴락
대학 사회에서 지식인이 사라진 것은 신자유주의의 득세와 무관하지 않다. 주지하듯이 신자유주의는 1980년대에 마거릿 대처와 로널드 레이건이 주창한 이래 후계자들에게 계승되었는데, 그들은 전 세계 여러 정당에 두루 퍼져 있다. 이 이념은 2007~2008년의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그리고 이어진 침체기에 실패가 명백히 드러났는데도, 오히려 활기를 회복하고 있다. 대한민국도 예외는 아니다.
신자유주의와 대학 문화의 변화가 무슨 관계가 있는지 간단히 이야기해 보자. 신자유주의에서는 시장이 경제 조직의 최적 형태 또는 기본값이며, 규제가 적을수록 잘 작동한다고 가정한다. 경쟁 시장은 효율에는 상을 주고 비효율에는 벌을 줌으로써 사람들에게 행위를 '개선'할 동기를 부여한다. 따라서 정부는 가능한 한 많은 것을 민영화해야 한다. 금융시장에 대한 규제는 철폐해야 하며, 노동시장은 유연하게 만들어야 한다.
공공 부문에서 민영화할 수 없는 부분이 있으면, 거기서는 실적표를 만들어 순위에 따라 상을 받거나 벌을 받도록 해야 한다. 학교, 대학, 공기업, 병원, 박물관 등이 지원금을 놓고 경쟁하게 만드는 것이다. 조직 내 구성원들에게도 똑같은 원칙이 적용된다. 경쟁력을 강화한다는 명분으로 말이다.
여기에 저항하고 싶은 사람도 있겠지만,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그것을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다. 시장을 이용하고 실적표를 의식하며 경쟁하는 삶은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이 되었다. 오늘날 대한민국 대학은 신자유주의라는 거미줄에 걸려든 곤충같이 되고 말았다. 교수 중에 진짜 지식인이 되고 싶었던 사람들은 답답함을 토로한다. 날이 갈수록 자신이 속한 대학이 이상적인 모습에서 멀어지니 말이다. 자기 신세도 처량하다고 느낀다. 초등학생에게도 하지 않을 점수 통제 아래에서 일거수일투족 조심해야 하고, 연구와 교육 외에 잡무도 엄청나게 늘어나니 말이다.
대학의 퇴락은 도대체 누구의 책임일까. 제도를 도입한 정부의 책임일까. 애초에 미국식 신자유주의 제도를 무비판적으로 소개한 교육학 전공 교수들의 잘못일까. 아니면 말없이 제도에 순응한 대학 당국의 책임일까. 그것도 아니면 지식인 본연의 자세를 버리고 논문 제작공의 삶을 살아가는 교수의 잘못일까. 이 모든 이에게 일말의 책임이 있겠지만, 진짜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 가리는 것이 중요하다.
신자유주의의 영향이 강하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이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문제다. 그릇된 제도와 문화가 누구의 잘못 때문인지 밝히려면 그 제도와 문화로 이익을 얻는 사람이 누구인지 따져보면 된다.
대학 교수들이 업적 평가 점수에 매달려서 논문 제작공으로 지내면, 이익을 누리는 사람이 누구일까. 부정의한 경제 질서를 이용해 이익을 얻는 기득권층, 비리 사학재단 관계자들과 비리 대학 운영자들, 대학 지원금 예산을 들고 전국 대학들을 쥐고 흔드는 관료들이 떠오른다. 대학 교수들이 지식인의 정체성을 가질수록 골치 아파지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따로따로 지내지 않는다. 서로 긴밀하게 연결해 막강한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있다. 이 네트워크의 영향력은 사회 곳곳에 미치고 있다. 언론과 정치권도 이 네트워크에 포섭된 느낌이다. 앞에서 대학이 신자유주의라는 거미줄에 걸려든 곤충 같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대학뿐만이 아니다. 온 사회가 거기에 걸려들고 말았다.
깨어 있는 시민의 연대가 답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할지라도, 어느 정도 그 영향력을 막아내는 것은 가능하다. 하지만 그 일을 개인이 해낼 수는 없다. 개인 차원에서 시도할 수는 있겠지만 얼마 못 가서 포기할 수밖에 없다. 문제점을 깨달은 시민들이 연대해서 신자유주의의 실체에 대해서 학습하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생활 현장에서 작은 일을 감당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연대는 저항의 배경이자 대안을 만드는 기초다.
그래도 상대적으로 형편이 괜찮은 교수들은 연대해서 점수 통제를 받지 않겠노라고 선언해야 한다. 그리고 논문 편수를 무리하게 늘려서 약간의 돈을 더 받으려고 하는 마음을 내려놓아야 한다. 그 때문에 점수가 깎이고 연봉이 줄어들더라도 부끄러움을 느낄 필요가 없다. 이는 신자유주의의 대학 통제를 강요하는 트랙을 벗어나겠다는 선언이다. 교수들은 새로운 트랙에 서서 신자유주의의 문제점을 고발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진짜 연구에 몰두할 필요가 있다. 큰 손해를 볼 것 같지만, 사실은 그 트랙을 걷는 것이 장기적으로 이득이다. 역사에 남을 연구 성과는 어디서 나오겠는가. 지식인 트랙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