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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호 전 문재인 대통령 연설비서관.
 신동호 전 문재인 대통령 연설비서관.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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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는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이름을 남기고, 정치인은 말을 남긴다. 기원전 아테네에서 민주주의의 가치를 역설한 페리클레스가, 게티즈버그의 에이브러험 링컨이, '피와 땀과 눈물'의 윈스턴 처칠이 여전히 기억되는 힘은 여기에 있다. 정치인의 좋은 말은 동시대인들을 하나로 품고 상처를 보듬는다. 반면 나쁜 말은 사람들을 찢고, 서로 미워하게 만든다. 그만큼 정치인의 말은 힘이 세다. 정치권력의 최정점에 서 있는 대통령의 말은 더욱 강력하다.

그런데 윤석열 대통령의 말은 여러모로 이례적이다. 그는 출근길 약식 기자회견, 주요회의 발언 등에서 거침없이 말을 쏟아냈다. '바이든/날리면' 논란은 전국민 듣기 평가 열풍을 불러일으켰고, 2023년 미국 <워싱턴포스트> 인터뷰는 '주어' 파문을 빚었다. 올해 4.19 기념식에선 "사기꾼"이라는 표현까지 등장했다. <조선일보>마저 "(윤 대통령이)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한 번 걸러서 정제되게 했으면 한다"고 조언할 정도다.

대통령의 말을 직접 긷고 짓던 사람은 어떻게 보고 있을까. 신동호 전 청와대 연설비서관을 지난 9일 서울 수락산 인근에서 만나 물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의 민주당 대표 재임 때부터 메시지를 맡았고, 지난 5년 동안 3000여 개의 글로 문 전 대통령의 생각을 옮겨 전했던 이다. 그는 윤 대통령의 말에 "일부(국민의) 한(恨)은 풀어주는" 장점은 있다고 했다. 하지만 "특정 정당 대표 연설 같다"고도 평했다. 특히 야권을 '사기꾼'으로 규정했던 4.19혁명 기념사는 "진짜 어처구니가 없다"며 "본인한테 비수로 돌아올 것"이라고 우려했다.

"세상을 내려다보는 메시지... 대통령 아닌 당대표 같다"

- 당대표 시절부터 청와대까지 8년간 문재인 전 대통령의 '말'을 도맡았다. 특히 청와대에선 약 3000여 개의 메시지를 썼는데, 연설비서관의 하루가 궁금하다.

"대통령의 생각과 말을 쫓아가는 하루다. 오전에는 대통령이 참여하는 회의에 배석해서 대통령이 어떤 사안에 어떤 생각을 갖는지 확인한다. 나중에 계산해보니까 하루에 거의 두 개꼴로 글을 썼더라. 예전에 비해 메시지가 늘어났다. 중요한 연설문뿐 아니라 축전, 축사 요청도 굉장히 많았다.

이런 것들을 체크하고, 관련 비서관실과 의논하면서 작업하고, (대통령에게) 보고하고. 일상적인 연설 말고 국정철학과 계획을 국민께 얘기하는 큰 연설은 3.1절이나 8.15, 국회 시정연설, 신년사 등 네 개 정도인데 한 달 반, 짧으면 한 달 전에 비서실장 또는 정무수석 주재로 TF를 꾸려서 연설을 작성한다."
 
신동호 전 문재인 대통령 연설비서관.
 신동호 전 문재인 대통령 연설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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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석열 대통령의 연설도 비슷한 과정을 거칠까.

"우리나라 공무원들은 대단히 훌륭하다. 워낙 오랜 노하우가 쌓여 있기 때문에 그 부처에서 만든 초안들이 간단치 않다. 저희는 그 내용을 대통령의 언어와 철학으로 옮겼다. 그런데 윤 대통령의 연설에선 부처나 기관들의 노하우나 노력이 잘 안 보인다. 부정적으로 표현하면 (그런 부처들의 노하우 등이) 무시당하는 게 아닐까. 

또 하나, 윤 대통령의 연설은 특정 정당 대표 연설 같다. 4.19혁명 기념사에서 특정세력을 비판한 모습은 '모든 국민의 대통령'이 아니었다. 문 대통령은 태극기 집회하는 분들에 대해서도 따뜻한 얘기, 존중하는 얘기를 많이 했다. 저도 집회에 두 번 정도 참가해서 그분들이 정말 어떤 한이 맺혔는지 생각해보기도 했고. 그런 면에서 윤 대통령은 특정세력의 대통령이다. 물론 우리 대통령도 그렇게 보는 분들이 많았지만, 적어도 저희는 연설문에선 그렇게 얘기하지 않았다."

- 윤 대통령의 지난 1년간 메시지를 보면 일단 짧다. 한 인터뷰에서 "간결하다는 게 좋은 점이 있지만, 그 간결함이 친절하지 않은 것 같다"고 평했다. 그대로인가.

"당연하다. 세상을 내려다보면 별로 보이는 게 없다. 하지만 권위주의를 내려놓고, 권력이 나한테 있는 게 아니라 국민에게 있다고 생각하면 너무 많은 것이 보이고, 모든 것이 고맙고 훌륭해서 많은 말을 해야 한다. 'A가 고맙다, B가 고맙다.' 그런데 윤 대통령의 메시지는 (뭔가) 생략된 것 같고, 오로지 소수의 지지자들을 대변한다. 윤 대통령 본인이 권위주의적인지 모르겠지만, 이와 상관없이 상당히 권위주의로 회귀한 모습이다. '내가 하는 말을 들어라'라는."

"국민 상처주는 대통령... 4.19기념사, 진짜 어처구니없어"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4월 19일 서울 강북구 수유동 국립4·19민주묘지에서 열린 제63주년 4·19혁명 기념식에서 기념사를 하고 있다.
▲ 4·19혁명 기념사 하는 윤석열 대통령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4월 19일 서울 강북구 수유동 국립4·19민주묘지에서 열린 제63주년 4·19혁명 기념식에서 기념사를 하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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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 대통령은 연설마다 '자유'를 수도 없이 강조해왔다. 어떤 '자유'라고 풀이하나.

"우리가 4대 강국에 둘러싸여서 마음대로 못하는 게 많지 않나. 이때 '4대 강국하고 다 친하게 지내면서 조금씩 우리의 힘을 길러서 분단국가가 아닌 대륙과 해양을 잇는 교량국가가 되자'는 지도자가 있고, '중국하고 줄다리기하는 것도 힘들고 피곤하고, 러시아, 일본하고 하는 것도 힘들고 피곤하니까 미국하고만 친하게 지내자.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지도자가 있다. 윤 대통령이 말하는 자유다. 

제가 공부해 보니까 이건 6.25 전쟁 이후 자유당 정권에서 한참 했던 얘기다. 실제로 '미국과 어느 나라도 못 하는 일을 대한민국이 하고 있다. 대한민국이야말로 자유를 지키는 최전선'이라는 연설도 있고, 이 논리가 베트남 파병 때도 이어졌다. 이를 그대로 가져오는 것 같다. 오죽하면 이승만 기념관을 짓겠다고 하지 않나. ('미국도 못하는 일을 우리가 한다'는) 자부심은 나쁘지 않다. 하지만 그게 지금까지 이렇게 나쁜 방식으로 정치투쟁에 활용된다? 철저히 반대한다."

- 그 논리가 대통령의 국정운영에 드러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일 텐데.

"그러면 안 된다. 미국과는 동맹으로서 친하게 지내야 하고, 중국과도 친하게 지내야 한다. 먹고 사는 문제가 달렸는데 미국한테만 기댈 게 아니라 욕먹더라도 푸틴도, 시진핑도 만나면서 4대 강국 안에서 우리의 위치를 잡아야 한다.

영원한 적도, 우방도 없다. 또 우리가 힘을 갖기 위해선 남북이 서로 불가침해야 한다. (현재 윤 대통령의 말과 글이) 몇몇 사람을 시원하게 해줄진 몰라도 정치는, 국가통치는 누구 시원하게 해주려는 건 아니지 않나. 욕먹고 답답해도 통합, 국가 이익을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

- 잠깐 언급하기도 했지만, 윤 대통령은 4.19혁명 기념사에서 "사기꾼" 등 격한 표현을 쓰며 야권을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세력" "거짓과 위장'이라고 규정하기도 했다. 4.19의 가치, 코로나 극복을 강조했던 2020년 문 대통령의 기념사와 사뭇 다르다.

"국민의 대통령이 아니라 국민의힘의 대통령인 거다. 진짜 어처구니가 없죠. (대통령이라면) 참아야 한다. 대한민국 국민들은 뜨겁고 열정적이다. 또 위대하고 거대한 일에 본인이 참가하는 데에 굉장히 익숙하다. 그러다 보니까 국민들이 권력으로부터 개인적 상처도 받는다. 대통령의 언어는 국민을 향하는 언어다. 윤 대통령은 민주당 혹은 특정 언론을 향해 욕했을지 모르지만, 많은 개인이 상처를 입었을 텐데, 본인한테 비수로 돌아올 거다."

"청와대 도서관도 그대로... 세상과 소통하려는 마음 없나"
 
신동호 전 문재인 대통령 연설비서관.
 신동호 전 문재인 대통령 연설비서관.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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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현직 대통령의 상반된 장면은 또 있다. 문 대통령은 최근 '평산책방'을 열었다. 반면 윤 대통령은 <오마이뉴스> 정보공개청구 결과, 2022년 5월 출범 이후 올 3월까지 단 한 권의 책도 구입하지 않았다( https://omn.kr/2312w ).

"청와대 여민1관 지하 도서관이 그대로 있다고 들었다. 독서도 소통이다. 역사와 눈에 보이지 않는 옛 스승들과 하는 소통. (윤 대통령의 이런 면모는) 다양한 세상과 다양한 삶과 소통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다는 뜻 아닐까. 

김대중 전 대통령은 옥중에서 <제3의 물결>을 본 뒤 1998년 취임하면서 IT국가를 말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읽은 제러미 리프킨의 <수소혁명>은 문재인 정부까지 이어졌다. 책 한 권이 지도자에게 끼치는 영향은 상당히 긍정적이다. 그것은 일종의 소통이고, 소통을 통해서 가장 적절한 현실과 미래를 같이 고민하게 되는 것이니까. 물론 똑똑한 참모들이 올려주는 것도 있지만 대통령만의 판단 기준이 없다면 제대로 국정을 운영하기 힘들다. 링컨, 오바마도 그렇고 독서를 많이 한 분들이 갖는 자기만의 철학은 국민들에게 안정감을 준다."

- 지금까지의 '말'에서 엿볼 수 있는 '대통령 윤석열',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정치를 하던 분이 아니어서 자기 철학이 있는지 잘 모르겠고 또 철학을 국정에 어떻게 반영할지 잘 모를 수 있겠다 싶다. 어떤 방송에서 '커피숍이나 술집에선 누구든지 자기 주장을 말할 수 있어도 국정에선 그게 걸러지는 과정이 필요하지만, 윤 대통령은 술집에서 나눌 수 있는 이야기를 국정에 반영한다는 느낌이다. 뒷골목 리더십이다'라고 얘기한 적 있다. 그 리더십은 어떤 사람에겐 시원함을 줄 수는 있어도, 대다수 국민에겐 우려와 불안감을 줄 수밖에 없다."

- 더욱 살려야 할 장점과 자제해야 할 단점은 무엇일까.

"대한민국의 역사를 보면 한(恨) 맺힌 시간들이 있다. 식민지 백성의 한, 이산가족의 한, 산업화 세대의 한, 5.18의 한, 세월호의 한, 최근에는 이태원 참사까지 생겼는데... 그 한들을 위로해주는 것이 국가지도자의 역할이다. 윤 대통령의 장점이라면, 그중 '일부'의 한은 풀어주는 것 같다(웃음).

그 시각을 전체로 넓혀서 두루두루 살피는 대통령이 되길 바란다. '나는 한 놈만 패서 국민통합 할 것'이라고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되지 않는다. 피곤하고, 힘들고, 지루하고, 성과가 더디더라도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과 삶을 들여다보는 국가지도자가 된다면 얼마나 좋겠나."

- '대통령 윤석열'보다는 아직도 '검사 윤석열'이란 평가도 있다.

"대학에 입학해서 읽은 철학책 중 하나가 '법이 먼저인가 죄가 먼저인가'로 시작했다. 보통 죄가 먼저라고들 여긴다. 그런데 그 책의 논지는 '법이 생김으로써 죄를 규정한다'였다. 

당연히 법에선 죄와 벌이 중요하다. 그런데 국가지도자나 정치는 어떤 잘못이 있어도 아직 법이 없어서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지 않는지, 또 세상이 변했지만 낡은 법으로 피해보는 사람이 있는지를 봐야 한다. 무조건 '법대로, 법대로' 한다고 착한 사람들에게 좋지 않다. 오히려 워낙 많아서 착한 사람들 더 살기 힘들게 하는 게 법이다. 물론 문 대통령도 법률가였지만, 세상이 어떻게 법으로만 사는가. 국가지도자가, 정치가 국민들 숨통을 트여줘야 한다."

"지금 필요한 대통령의 말은 통합과 희망"
 
신동호 전 문재인 대통령 연설비서관.
 신동호 전 문재인 대통령 연설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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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재인 전 대통령을 "아직 얼굴도 알 수 없는 미래의 아이들을 위해서, 미래를 위해서 옷깃을 여밀 줄 아는 분"이라고 표현했다. 대통령의 가장 큰 덕목이 바로 이것일까.

"시대에 따라서 맞는 지도자들이 있다. 약간 인문학적으로 얘기하면 지금 현실에 필요한 공시적 지도자와 과거를 성찰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통시적 지도자랄까. 우리가 진짜 굶는 것부터 해결해야 할 때는 현실을 뚫고 가는 지도자가 필요했다. 하지만 이제는 선진국 대열에 들어섰고, 미완의 과제가 있고, 또 우리 아이들이 살아갈 미래에 대한 전망이 탄탄하지만은 않다. 이럴 때야말로 눈앞에 보이는 선거나 지지율보다는 미래를 설계할 수 있는 분이 필요하다."

- 문 대통령 취임 후 첫 연설이 5.18기념사였다. 곧 5.18인데 지금 대통령의 연설을 준비한다면 어떤 메시지를 담고 싶은가.

"역시, 다시, 국민통합이다. 내용은 좀 달라질 것 같다. 지금 5.18 메시지를 쓴다면 첫째로 광주시민들에게 여전히 밝혀지지 않은, 되돌아가는 진상규명과 헌법 전문에 5.18 정신을 넣고자 노력했다가 잘 안됐던 것에 대한 죄송함을 표현해야겠죠.

그러나 시민들이 5월 광주에서 보여준 것처럼, 또 앞장서달라고 하겠다. 국가폭력에 의한 희생, 그 힘이 슬픔에 머물지 않도록, 그 힘을 희망으로 바꿔내는 데에 앞장서달라고. 그런 메시지로 국민통합을 말하고 싶다."

- 2023년 5월 현재 필요한 대통령의 메시지는 국민통합이란 얘기로 들린다.

"통합과 희망. '아무도 흔들 수 없는 나라'란 표현을 일본의 수출 규제 때 썼다. 당시 박영선 중소벤처기업부장관 보고를 듣고 깜짝 놀랐다. 일본에서 수입하는 게 싸고 외교관계 때문에 생산하지 않았을 뿐, 우리나라 중소기업 기술력으로는 충분히 다 대체할 수 있다고 하더라. 이미 다 준비됐다고.

어려운 상황에서 왜 현실하고 안 맞는 얘기를 하냐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었다. 하지만 어려운 상황에 처할수록 힘을 주고, 희망을 주고 위로하는 게 지도자의 역할이다. 윤 대통령이 국민에게, 지지자가 아닌 사람들도 희망을 갖게 해주길 간곡하게 부탁드린다."

(* 다음 인터뷰 기사 <"문 전 대통령이 바꾼 글자,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로 이어집니다. https://omn.kr/23ve7)

태그:#신동호, #윤석열, #취임1년, #대통령의 말, #문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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