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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이제까지 개인사 중심의 인물평전을 써왔는데, 이번에는 우리 역사에서, 비록 주역은 아니지만 말과 글 또는 행적을 통해 새날을 열고, 민중의 벗이 되고, 후대에도 흠모하는 사람이 끊이지 않는 인물들을 찾기로 했다. 

이들을 소환한 이유는 그들이 남긴 글·말·행적이 지금에도 가치가 있고 유효하기 때문이다. 생몰의 시대순을 따르지 않고 준비된 인물들을 차례로 소개하고자 한다. [기자말]
지금은 시와 소설에 비해 다소 뒷켠에 머무는 것 같지만 시조는 우리의 대표적인 문학장르에 속한다. 국문학사에서 시조가 차지하는 비중은 막대하다.

난 초(1)

한 손에 책을 들고 조오다 선뜻 깨니
드는 볕 비껴 가고 서늘바람 일어 오고
난초는 두어 봉오리 바야흐로 벌어라.


난 초(2)

새로 난 난초 잎을 바람이 휘젖는다
깊이 잠이나 들어 모르면 모르려니와
눈 뜨고 꺾이는 양을 차마 어찌 보리아

산듯한 아침 볕이 발틈에 비쳐 들고
난초 향기는 물밀듯 밀어 오다
잠신들 이 곁에 두고 차마 어찌 뜨리아.


정갈한 우리말로 시조 수 백수를 지은 이는 가람 이병기(李秉岐, 1891~1968)다. 이름보다 호로 더 알려진다. 전북 익산군 여산면에서 아버지 이채와 어머니 윤병 사이에 태어났다. 가람이란 호를 짓게 된 사유를 직접 들어본다.

수당(壽堂)께 갔었다. 이말 저말 끝에 내 호를 지어준다. 한자로 임당(任堂)이라 한다. 나는 이미 '가람'이라 했다. 가람은 '강'이란 우리말이다. 온갖 생물이 모여 가람이 되고 가람물이 나아가 바다가 된다. 그러면 샘과 바다 사이에 있는 것이다.

그 근원은 무궁하고 그 뜻도 무궁하고 영원하여, 이 골목 저 골목 합하여 진실로 떳떳함을 이루어 완전하여, 산과 들 사이사이에 끼어 있어 뭍(陸)을 기름지게 하니 조화함이다. 이 세 가지 뜻을 붙여 지음이다. 우리말로는 '가람'이라 하고 한자로는 '임당'이라 하겠다.(이병기, <가람일기>)


우리의 옛 학자나 선비들은 호를 갖고 있었다. 이름보다 호가 널리 알려지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본인이 직접 짓기도 하고 지인들이 지어주기도 한다. 개중에는 거창한 호의 무게에 짓눌린 사람, 호의 뜻한 바와는 달리 살아서 욕 먹는 사례도 없지 않았다. 가람이란 호와 삶이 일치했던 이병기의 생애를 살펴본다.

어려서부터 고향 사숙에서 수학하고 16살 때 광산 김씨 수(洙)와 혼인, 20살에 전주공립 보통학교 졸업 후 관립한성사범학교에 입학하여 주시경 선생의 조선강습원을 마쳤다. 공립보통학교 훈도생활을 하던 중 1919년 3.1혁명을 맞아 사임하고, 두 차례 만주여행에 나섰다.

이 일로 조선총독부가 독립운동 혐의로 종로경찰서에 수감하였다. 풀려난 후 대종교에 참여하고 1921년 권덕규와 '조선어연구회'를 만들어 간사를 맡고, 동광학교 교원, 휘문고보 교원 등을 지냈다.

이후 훈민정음반포 8회갑 기념축하회, 조선어강습회, 이화여전 문학부에서 조선문학사 강의, 시조강연, 조선어사전편찬회위원, 한글운동사 강연, 조선어표준어사정위원 등 주로 한글관련 강연과 연구에 매진하였다. 틈틈이 쓴 시조를 모아 1939년에 <가람시조집>을 간행했다.

그가 52살이던 1942년 10월 조선어학회사건으로 구속되어 홍원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하다가 이듬해 9월 기소유예로 풀려났다.

조선어학회사건으로 함께 옥살이를 한 이희승이 지켜 본 가람의 일면이다.

일정시대에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같은 감방에서 수년을 지낸 일이 있다. 인간 이하의 박대와 혹형을 당하면서도 오히려 전도에 광명이 가득한 언사로 동지의 고초를 위로해주곤 하였다.

또 그 해학이 절품이었다. 수삼인이 모인 자리에서라도 항상 포복절도할 기담과 소화로서 좌중에 춘풍을 불러 일으켰다.

전기한 사건으로 홍원경찰서 감방에서 수난할 적에 일제 말기의 발악으로 그들은 우리에게 휼계와 협박으로서 창씨를 강요하였다. 동지들의 거개가 이에 굴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유독 가람형만은 완강히 이에 불응하였다.(이희승, <가람형의 영면을 곡함>)


해방 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전임 교수가 되고 이어 교과서검정위원회 상임위원, 전북대학교 문리과대학장, 중앙대학교수 등을 지내면서 많은 시·시조 등을 짓고 1963년에는 갑오동학혁명기념탑건립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지은 책은 <가람시조집>, <역대시조선>, <한중록>, <조선역대여류문집>, <시조의 개설과 창작>, <명시조 감상>, <국문학개론>, <가람문선>, <가람일기 1, 2> 외 다수가 있다.

그는 시조와 시·산문을 연구하면서 난을 무척 아껴 키웠다. 그리고 술을 즐겨 마셨다. "선생은 멋으로 세상을 사시고 멋 속에서 세상을 뜨신 분이다. 술은 스승의 멋이요. 난은 선생의 다정한 여인이었다. 그리고 책은 선생의 벗이면서 또한 스승이었을지 모를 일이다. 그리고 그 많은 벗들은 대개가 선생의 제자였다."(정병욱, <가람을 말한다>)

이제 새삼 가람의 국문학에 끼친 공적이나 그 엄청난 업적을 나열한다는 것은 오히려 속된 예의에 불과한 일이 아닐 수 없으니, 초기에 있어서의 한글의 정리에서부터 고전의 발굴·주석·평론에 이르기까지 그 정곡과 해박한 온축을 오히려 가람의 여기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른다.

가람은 시조에 대한 연구나 강의를 하는 학자이기 전에 천생의 시인이다. 종래 시조의 구각을 벗고 오늘의 신조(新調)로 정형한 가락은 오로지 가람의 시조에서 그 남상을 찾아야 하니, 시조의 혁명에 있어 선구 가람의 발자취를 따를 이 전후좌우에 있다는 말은 아직 들은 적이 없다.(<가람에 대하여>, 가람문선 편찬위원일동, <가람문선>)
 

태그:#겨레의인물100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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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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