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퀴어는 당신 옆에서 일하고 있다> ⓒ 오월의봄
"내가 퀴어라는 걸 사람들이 모르잖아요. 그게 바로 차별이죠."
기록노동자 희정이 쓴 논픽션 <퀴어는 당신 옆에서 일하고 있다>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2030' 성소수자 노동자 20명을 인터뷰한 책에서 이들은 직장에서 불이익을 겪지 않기 위해 '패싱'(passing)이라는 전략을 쓴다. '패싱'이란 '어떤 사람을 특정 사회집단의 구성원으로 여기게끔 외양과 행동을 위장하는 일'이다. 한마디로 퀴어로서는, 이성애 규범의 사회에서 '평범'한 척, 행세하는 일이다.
서울시에 4번 거부 당한 퀴어축제 행사
퀴어축제 관련 행사가 서울시에 네 번이나 거푸 거부당했다. 3월에는 퀴어퍼레이드를 위한 서울광장 사용 불허, 4월에는 기념강연회 대관 신청 반려, 토론회 대관 취소, 강연회 장소 대관 불허가 이어졌다. 한편 '학생이 성적 지향과 성별 정체성을 이유로 차별받지 말아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학생인권조례는 충남과 서울에서 연이어 폐지됐다.
일부 시민단체들은 공공 도서관과 교육청 등에 '동성애 조장' 등을 이유로 성평등 도서 폐기를 요구하고 나섰고, 이에 경기 지역 학교들이 1년 간 2500권의 책을 폐기했다는 보도도 나왔다. 이쯤하면 퀴어라는 존재 자체에 '불허', '반려', '취소' 딱지가 붙었다고 밖에는 볼 수 없다.
▲ 서울퀴어문화축제 조직위원회는 지난 4월 15일 "시민청으로부터 '퀴어문화축제: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문화의 힘' 토론회의 대관을 취소당했다"라고 밝혔다.
ⓒ 서울퀴어문화축제 조직위원회
혐오를 배우는 공간으로서의 학교
학교는 일찍이 주변의 성소수자를 지우고, 혐오를 학습하는 공간으로 자리매김해 왔다. 청소년 트랜스젠더 8명을 인터뷰한 책 <당신의 성별은 무엇입니까>는 대한민국의 학교가 만드는 성별 이분법의 세계를 적나라하게 그린다. 한국의 청소년들은 중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남녀학교, 남녀분반, 남녀교복을 맞닥뜨린다. 정상성의 범주에서 비껴난 청소년 트랜스젠더들은 필사적으로 자신을 숨기거나, 혹은 분투하다 지쳐 학교를 떠난다.
흑인 레즈비언 오드리 로드는 1979년, 미국에서 열린 제1회 유색인 레즈비언‧게이 전국대회 기조연설에서 이같이 말했다.
"예를 들어, 우리 아이들이 인종차별주의, 성차별주의, 계급 차별, 동성애 혐오, 자기혐오의 교훈을 배우는 곳은 어디입니까? 우리 학교들은 우리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있습니까?"
그나마도 아이들의 권리를 최소한도로 보장한 학생인권조례는 지금 전국의 시‧도 곳곳에서 존폐 위기에 처해있다.
행정 당국의 혐오 재생산과 '반대할 자유'?
이를 바로잡아야 할 행정 당국은 오히려 혐오를 재생산한다. 지난달 23일, 서울역사박물관이 서울퀴어문화축제 조직위원회 측의 강연회 장소 대관을 불허하며 내세운 이유는 "사회적 갈등 유발이 우려되는 행사로 박물관 운영 및 관람에 지장을 초래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마치 게임 업체들이 '집게손'을 위시한 일부 유저들의 '페미 색출'에 동조하며 "불편을 끼쳐드린 데 사과한다"고 나선 것과 같은 이치다. 노동자의 정당한 노동권 대신, 일부 유저들의 '혐오할 권리'를 지켜준 것이나 다름 아니다.
서울시의 행보는 공적 기관의 조처라는 점에서 더욱 문제적이다. 이는 사회적 갈등을 일으키는 주체를 '반동성애'를 표방하는 세력 대신 퀴어축제 조직위로 낙인 찍는 불합리를 낳는다. 이에 조직위는 답했다.
"설령 강연회를 방해하고자 혐오 세력이 소란을 피운다면, '박물관 운영 및 관람에 지장 초래'하는 것은 혐오세력이지, 조직위나 강연회 참여자가 아닙니다."
급기야는 퀴어를 '권력을 가진 다수'로 일컫고 '반 동성애 세력' 스스로를 소수자로 위치짓는 프레임마저 생겨났다. 보수 기독교계에서 자주 쓰는 표현 가운데 '성 독재'가 있다. 일련의 성소수자들로 말미암아 "자유민주주의의 기초인 양심과 신앙에 따라 반대할 자유를 박탈하는 성 독재"가 자행되고 있다는 것이다.
'독재'의 사전적 정의는 '특정한 개인, 단체, 계급, 당파 따위가 어떤 분야에서 모든 권력을 차지하여 모든 일을 독단으로 처리함'이다. 성소수자들은 권력을 가져본 적이 없다. 그리고, 본질적으로 '존재'를 반대할 자유란 없다. 그러나 존재를 반대할 자유, 달리 말해 '혐오'라 불리는 일이 학교에서 광장까지 성소수자들의 전 생애에 걸쳐 자행되고 있다.
퀴어의 비가시화와 혐오 세력의 가시화 사이
▲ 서울퀴어문화축제조직위원회가 7일 서울 종로구 향린교회에서 제25회 축제 개최 발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입법 성적이 최악이라는 21대 국회에서 포괄적 차별금지법은 폐기 위기에 놓였다. 누군가에게는 촌각을 다투는, 때로는 목숨이 걸린 사안에 가까웠지만 21대 국회의원들에겐 뒷전이었다. 그렇게 차별금지법은 17년 째 국회에서 표류 중이다.
차별금지법을 발의했던 장혜영 정의당 의원은 "'차별금지법을 완전히 잊고 있다가 다시 생각났다'고 하는 의원들 때문에 "정말 놀랐다"고 한 적이 있다.
"제 주변에는 사적·공적으로 함께하는 성소수자들이 있어 그들의 인권이 얼마나 존중받지 못하는지 아니까 당면한 우선순위 의제거든요. 21대 국회의원 모든 분들에게 단 한 명의 동성애자 친구라도 있었다면, 이렇게까지 잊혀진 존재가 될 수 있을까 싶었어요." (2021.3.29 서울신문 '차별금지법' 발의·폐기 반복만 14년… 절박하게 밀어붙여 통과시켜야)
반면 전방위적인 '퀴어 지우기'는 더욱 성업 중이다. 교육부가 '2022 개정 교육과정'에서 '성소수자' 등의 용어를 삭제하고, 서울‧대구 등 지자체 차원에서 퀴어축제를 방해하자 보수 학부모 단체, 기독교계 같은 조직된 소수의 힘은 더욱 가시화된다. 퀴어의 비가시화와 혐오 세력의 가시화 사이, 차별금지법 입법을 추진해야 할 국회의원들은 점점 더 퀴어들의 삶과 멀어져 간다.
그러나 존재를 반대할 자유가 없듯, 존재를 지우는 일은 애시당초 불가하다. 서울퀴어문화축제 조직위는 새달 1일 서울광장 대신 을지로입구역과 종각역 인근에서 퀴어퍼레이드를 한다. 서울시의 잇따른 거부에 대해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도 냈다.
축제에는 인권위와 주한 대사관 약 15곳도 부스를 열고 참가할 예정이다. 축제 슬로건은 '예스, 퀴어!(Yes, Queer!)'다. 당신의 '패싱'과 상관없이, 퀴어는 당신 옆에서 일하며 축제에 가담하고 있다는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