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4.15 07:05최종 업데이트 24.04.15 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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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민주당 권인숙 의원(왼쪽부터), 박주민 의원, 정의당 장혜영 의원이 5일 오전 국회 소통관에서 열린 평등법·차별금지법 제정 촉구 기자회견에 참석하고 있다. ⓒ 공동취재사진

 
#1. 2021년 3월, 나는 장혜영‧권인숙 의원과 만났다. 국회에서 몇 안 되는 차별금지법 발의자들이었다. 당시 내가 연재 중이던 '대담한 언니들'의 인터뷰이로 섭외한 참이었다. 성평등 정책에 열심인 국회의원 둘을 마주 앉히려는 나의 바람과 달리, 섭외는 쉽지 않았다. 다른 정당의 의원과 '투 샷'으로 마주 앉는 것에 대한 부담이 모두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둘은 국회여성아동인권포럼의 일원이자, 당(정의당, 더불어민주당)을 넘어 서로의 철학에 대한 존중이 있었기에 섭외에 흔쾌히 응했다.

#2. 2022년 대선에 출마한 심상정은 유일하게 '페미니스트 대통령'이 되겠노라 확언한 후보였다. 윤석열 당시 국민의힘 후보가 성범죄 무고죄 신설을 공언할 때, 그는 '동의 없는 성관계'를 불법으로 규정하는 비동의 간음죄 도입을 공약에 넣었다. 법률적 혼인 관계가 아니어도, 함께 살면 가족으로 인정하는 시민동반자법, 성적 동의와 자기 결정권을 배우는 조기 성교육 제도화 공약도 선제적으로 내놨다. 대통령은 되지 못했지만, '페미니스트 대통령 후보'에는 걸맞은 행보였다.



오는 5월 30일 개원할 22대 국회에, 이들은 없다. 비례대표 의원이었던 권인숙은 경기 용인갑에 출사표를 던졌다가 당내 경선에서 패배했다. 역시 비례였던 장혜영은 서울 마포을에 출마했지만, 득표율 3위(8.78%)를 기록하며 낙선했다. 4선의 심상정은 내리 3선을 했던 경기 고양갑에서 3위라는 씁쓸한 성적표를 받아들었다. '정권 심판론'과 '거야 견제론'만 있었던 선거에서, 구체적인 성평등 정책을 들고 나왔던 이들은 모두 사라졌다.

안티 페미니스트 백래시 효과가 두드러진 선거전

이번 총선에서는 그간의 선거전에서 축적된 '안티 페미니스트' 백래시(반격)의 효과가 두드러졌다. 반복된 학습 효과 탓인지 '젠더 갈라치기'성 공약도 전처럼 주목을 못 끌었다. 선거 초반 이준석 개혁신당 대표가 '여성 신규 공무원 병역 의무화'를 내놔 반짝 화제에 올랐지만, 금세 사그라들었다. 윤석열 당시 국민의힘 후보가 페이스북에 쓴 단 일곱 글자, '여성가족부 폐지'가 선거전 내내 회자되던 2022년 대선과는 양상이 달랐다.

한편, 성평등 의제를 꺼내는 것 자체가 터부시되었다. '2030' 남성들의 표심을 의식해, 성평등을 표방하는 공약은 거대 양당에서 자취를 감췄다. 민주당이 '비동의 간음죄' 신설을 총선 10대 공약에 넣었다가 남초 커뮤니티의 공격을 받자 "실무적 착오"라며 발뺌한 것은 성평등 의제가 처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비례 의석 12석을 차지하며 원내 제3정당의 대표가 된 조국 조국혁신당 대표는 선거전이 한참이던 지난달 25일 경향신문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나라에서는 페미니즘이라는 단어가 전혀 다른 의미로 쓰이고 있다. 페미니즘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으려고 한다." 여성들이 일상적으로 겪고 있는 '페미' 공격에, 공당의 대표가 가담한 셈이다.

'Win or Nothing' 그 후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지난 11일 오전 서울 여의도 더불어민주당 중앙당사에서 열린 더불어민주당·더불어민주연합 합동 중앙선거대책위원회의 겸 선대위 해단식에 참석해 감사의 인사말을 하고 있다. ⓒ 유성호

 
지난 대선을 통해 선거가 철저히 'Win or Nothing'의 세계임을 절감한 여성들은 이기는 정당에 투표하고 있다. 이번 총선에서도 젊은 여성들은 심판론에 화답해 민주당 계열에 많은 표를 몰아줬다. 방송 3사 출구조사에 따르면 20대 여성의 51.0%는 민주당의 위성정당인 더불어민주연합에, 18.5%는 민주당 노선과 비슷한 조국혁신당에 투표했다고 응답했다(20대 남성은 국민의힘 위성정당인 국민의미래 31.5%, 더불어민주연합 26.6%, 개혁신당 16.7%의 순이었다). 녹색정의당에는 5.1%의 지지를 보냈는데, 이는 지난 대선에서 심상정 후보의 지지도 6.9%에 못 미치는 수치다. '이대녀'는 민주당의 대안으로 '페미니즘이라는 단어를 쓰지 않는' 조국혁신당을 뽑을지언정, 녹색정의당을 뽑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심판 이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삶이 바뀌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다시 한 번 이대녀의 지지를 등에 업은 민주당은 "그래서?"에 답해야 한다. 여성들은 이제 선거에서의 승리에만 만족하지 않을 것이며, 'Win or Nothing' 이후의 'Something'을 물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21대 국회에서 163석의 거대 야당이었으면서도 여성가족부가 사실상 고사 상태에 놓이는 것을 방치한 민주당의 책임을 묻는 입이 될 것이다. 20년 만에 원외정당이 된 녹색정의당의 쇄신은 말할 것도 없다. 노동‧기후‧성평등 의제를 고담준론이 아닌, 피부에 와닿는 대안으로 제시하는 정당으로의 변모가 필수적이다.

"지는 것이 아니라 계속 배우고 있는 것"
 

심상정 녹색정의당 공동선거대책위원장이 지난 11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소통관에서 22대 총선 결과 관련 기자회견을 열어 “21대 국회의원 남은 임기를 마지막으로 25년간 숙명으로 여기며 받들어 온 진보 정치의 소임을 내려놓겠다”고 입장을 발표하고 있다. ⓒ 유성호

 
선거 이튿날인 11일, 심상정은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진보 정치의 기수이자, 여러 궐기와 타협의 산물이었던 그의 정치적 생애를 상기하건대 안타까운 결말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심상정이라는 개인의 정치는 끝났지만, 여성 정치, 성평등 정치는 끝나지 않았다. 차별금지법 통과를 두고 "의지이자 전투의 문제"라던 권인숙의 말처럼, 의지가 있으면 전투는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당시 "전면전밖에는 답이 없다"던 장혜영도 여전히 참전할 의사가 있다. 그리고 언제까지고 이를 주시할, 여성 유권자들의 눈이 있다.

심상정의 은퇴 선언에 좌절한 여러 여성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 있다. "이기고 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계속 배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다름 아닌 그가 11년 전 자신의 저서 <실패로부터 배운다는 것>에 쓴 문장이다.


실패로부터 배운다는 것 -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지킬 것인가

심상정 지음, 웅진지식하우스(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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