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3.28 09:40최종 업데이트 24.03.28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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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민주당 서울 강북을 경선에서 승리한 조수진 변호사는 '성범죄 변호' 논란이 일자 후보직에서 사퇴했다. ⓒ 남소연

 
22대 총선을 앞두고 현직 변호사인 후보들의 성범죄 변호 이력이 도마 위에 오르고 있다. 지난 22일 조수진 더불어민주당 서울 강북을 후보는 '성폭력 사건 변론의 2차 가해 논란' 끝 자진 사퇴했다. 이후 민주당은 국민의힘 소속으로 성범죄자 변호 전력이 있는 후보들에 대한 역공에 불을 지폈다. 민주당은 대전 서갑 조수연, 울산 남갑 김상욱, 서울 양천갑 구자룡, 대구 달서갑 유영하 후보가 과거 악성 성범죄를 변호한 적이 있다며 공천 철회를 촉구했다.

성폭력 사건 해결의 법시장화… '감형의 기술' 등장

성범죄 변호 자체는 지탄받을 일이 아니다. 성범죄 가해자도 법정에서 억울함을 다투거나, 피해자와의 원만한 합의를 위해 변호사의 조력을 받을 권리가 있다. 조 변호사의 사퇴 이유를 두고 '성범죄 변호 전력 때문'이라고만 명명하는 것은, 그래서 논의를 납작하게 만든다. 문제는 그의 변론 내용과 블로그에 올린 홍보글 등이 성폭력 사건 해결의 '법시장화'라는 맥락에 너무도 충실한, 첨병 역할을 하고 있다는 거다.


여성주의 연구활동가인 김보화는 책 <시장으로 간 성폭력>에서 신자유주의 질서 속 비약적으로 커져 간 '성범죄 가해자 지원산업'을 고발한다. 2010년대 중반부터 성범죄 가해자 전담법인과 가해자 온라인 커뮤니티, 감형 컨설팅 업체 등이 속속 생겨나며 대놓고 각종 '감형의 기술'을 선보여왔다고 한다.

이는 조 변호사가 속했던 민변 여성인권위원회가 내놓은 자성의 목소리와도 결을 같이 한다. "변호사 업계가 이 결과(미투 운동으로 성범죄 피해 사실이 적극적으로 수면 위에 떠오른 것) 신속하게 시장화하여 결과적으로 과잉사법화했다."

'강간 통념'과 '피해자다움'의 활용
 

2018년 4월 19일 당시 김보화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설연구소 울림 책임연구원이 서울 마포구 창비 사옥에서 열린<의심에서 지지로, 성폭력 역고소를 해체하다> 토론회에서 '시장으로 간 성폭력, '보복성 기획고소'의 실체'라는 주제의 내용으로 발표하고 있다. ⓒ 박정훈


성범죄 변호가 시장의 영역이 되면서, 여성이 거절을 해도 실제는 관계를 원하는 경우가 많다는 식의 '강간 통념'을 적극 활용하는 등 피해자에게 2차 가해를 하는 변론이 변호사들의 노하우처럼 여겨져 왔다. 조 변호사의 행적도 여기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는 블로그에 성범죄 피의자들에게 통상의 형사재판보다 무죄율이 높은 국민참여재판을 권하며, 강간 통념을 활용할 것을 팁처럼 제시했다. 또 지난해 초등학교 4학년 여아를 성폭행해 징역 10년을 받은 체육관 관장을 2심에서 변호하면서는 '제3자 성폭행' 가능성을 주장하며 피해 아동의 아버지를 의심하는 발언을 했다. 여성 환자를 성추행한 한의사를 변호한 사건에서는 피해자가 곧장 항의 하지 않았다며 '피해자다움'이 결여됐음을 주장하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살펴봐야 할 것은 후보들이 얼마나 악성인 범죄자를 변호했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악성 변호'를 했느냐의 여부다. 낙마한 조 변호사는 당 안팎의 비판에 직면해 사과를 하면서도 자신의 활동은 국민의 눈높이에 맞지 않았을 뿐, 변호사의 윤리 규범은 준수했다는 논리를 폈다. 사퇴의 변을 밝히면서도, 당에 대한 공격을 멈출 것을 촉구할 뿐 끝내 자신이 2차 가해한 피해자를 향한 사과는 없었다.

성범죄 피해자에게 피해자다움을 요구하는 사회가 있고, 성인지 감수성이 결여된 변론이 여전히 통하는 법정이 있어서인지 이같은 가해 행위를 '변호사로서의 노하우' 정도로 여기는 느낌마저 든다. 그러나 성폭력 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에도 나와 있듯 재판 과정에서 피해자의 인격이나 명예가 손상되거나 사적인 비밀이 침해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것은 변호인의 책무다.

성인지감수성 화두로 떠오르는 총선… '비동의 간음죄' 전향적 논의해야
 

2023년 1월 26일 당시 이기순 여성가족부 차관이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제3차 양성 평등정책 기본계획 발표를 하고 있다. 이날 여가부는 제3차 양성평등정책기본계획에서 법무부와 함께 "현행 제297조(강간죄)의 강간구성요건을 '폭행·협박'에서 '동의 여부'로 개정 검토"(비동의간음죄 도입)하겠다고 밝혔다가, 발표 9시간 만에 곧바로 비동의간음죄 도입 검토를 철회했다. ⓒ 연합뉴스

 
단 하나, 희망적인 것은 성범죄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 변호 전력이 총선에서 낙마하는 기준이 될 만큼 성인지감수성을 다루는 우리 사회의 윤리 기준이 첨예해졌다는 것이다. 이어 지난 26일, 민주당에서 지난 총선에 이어 이번 선거에서도 비동의간음죄 도입을 공약으로 내걸었다는 보도가 나왔다. 그러나 국민의힘‧개혁신당의 공세와 더불어 남초 커뮤니티의 반발이 이어지자 하루 만에 "실무적 착오"라며 발뺌했다. 녹색정의당만 비동의간음죄 도입 반대는 반여성적, 시대착오적이라며 목소리를 냈다.

비동의간음죄는 현행 형법 297조에서 강간죄를 '폭행 또는 협박'을 수반하는 성관계로 규정한 것을 두고 '상대방의 동의 없이 일어난 성적 침해'로 바꾸는 것을 뜻한다. 국민의힘은 즉각 반대 입장을 밝혔다.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26일 "비동의 간음죄가 도입되면 입증 책임이 검사가 아닌 혐의자에게 있게 된다"라며 "억울한 사람이 양산될 수 있다"라고 밝혔다.

비동의간음죄의 도입이야말로 성범죄 피해자에게 그릇된 강간 통념을 적용하고, 피해자다움을 강요해 왔던 사회적‧법적 인식을 바꿀 절호의 기회다. 더 이상 피해자들에게 폭행이나 협박이 있었는지 증명할 것을 요구하지 않고, 대신에 가해자들에게 피해자의 명확한 동의가 있었는지를 묻는 것으로 입증 책임이 전환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비동의간음죄가 도입되면 더 이상 피해자들에게 고통받는 피해자상을 요구하거나. "왜 반항하지 않았느냐"고 따져 묻는 2차 가해가 수반될 일이 적다. 성범죄 외 기타 어느 범죄에서도 따로 범죄 피해를 막아낼 피해자의 자질이나 능력 등을 문제 삼지 않듯이 말이다.
 

한동훈 국민의힘 중앙선거대책위원회 총괄선거대책위원장이 지난 18일 오전 서울 여의도 중앙당사에서 열린 중앙선거대책위원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 남소연


한동훈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은 "지금 대법원 판례의 취지가 강간죄에 있어서 폭행, 협박의 범위를 대단히 넓혀가고 있는 추세"라며 "사실상 동의에 준하게 하고 있다"는 반대 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이는 재판부 재량에 따라 강간죄가 다르게 적용될 우려를 낳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비동의간음죄 도입의 필연적인 이유가 된다. 강간죄 구성 요건이 '동의 여부'로 바뀌게 되면, 피해자들에게 강간 통념과 피해자다움을 추궁하는 것을 무기 삼아 성장세를 거듭해 온 변호시장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 것이다.

성범죄 변호 전력이 있는 후보들에 대한 치열한 검증, 비동의 간음죄에 대한 전향적인 논의. 이 두 가지가 성평등 의제가 사라진 이번 총선에서 유일하게 기대 볼 관전 포인트다. '여성 지역구 후보 14.2%'라는 참담한 성적표를 아로새긴 22대 총선에서, 민변 여성위가 말하듯 '여성 인권을 증진시킬 수 있는 또 한 번의 기회'로 그나마 희망을 품어 봄직한 부분이 여기밖에 없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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