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1.18 11:55최종 업데이트 24.01.18 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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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마를 입은 여성을 묘사한 비상구 픽토그램(오른쪽). 해당 이미지가 논란이 되자, 정부는 언론사가 임의로 만든 것이라고 해명했다. ⓒ 자료사진

 
'여자를 위해 대신 생각해줄 필요는 없다'. 비상구 표지판 예시안에 머리가 길고, 가슴이 나왔으며, 치마를 입은 사람이 등장해 시끄러운 소셜미디어를 보며 제일 먼저 떠오른 문장이다. 이 문장은 2020년 출간된 예술사회학자 이라영의 책 제목이다. 이라영은 책에서 오드리 로드, 에이드리언 리치, 옥타비아 버틀러 등 미국 여성 작가들의 이름을 호명하며 미국이라는 땅에서 벌어진 차별과 혐오의 양태를 적는다.

여성 형상 픽토그램의 등장, 대체 왜?

지난 12일 비상구 픽토그램에 '여성 도안'을 추가한다는 정부안이 언론에 보도됐다. 기사에는 머리가 길고, 가슴이 나왔으며, 치마를 입은 픽토그램 이미지가 함께 게재됐다. 논란이 불거지자 행정안전부 측은 언론을 통해 "디자인 (변경)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사회적 변화에 맞춰 여성을 넣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얘기가 나온 것은 사실"이라며, 검토안 중 하나일 뿐 확정된 것은 아니라는 입장을 내놨다. 해당 이미지는 언론사가 기사에 첨부한 임의의 그림이지, 정부안이 아니라는 얘기도 함께.


일련의 '논란'을 두고 한참 전에 읽었던 책 제목이 불현듯 떠오른 것은 '여성 형상' 픽토그램은 남성으로 대변되는 국가가 여자를 위해 '대신' 생각한 결과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당연히, 여자가 원하지 않는 일이다. 여자들 중 그 누구도 '긴 머리, 가슴, 치마=여자'라는 도식적인 이분법이나, 성 고정관념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여성이 재현되기를 원치 않는다.

또한, 위급 상황 시 대피할 곳을 알려주는 비상구 표식에 성별은 중요하지 않다. 물론 픽토그램을 포함한 웬만한 세상의 디폴트가 남자인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렇더라도 불필요하게 시혜적인 방식으로, 국가가 자의적으로 만들어낸 '여성'을 표지판에 '끼워 넣는 것'은 그 누구도 원치 않는다는 말이다.

그래서 오죽하면, 소셜미디어에서는 '긴 머리, 치마를 입은 픽토그램'을 두고 음모론까지 불거져 나오고 있다. 정부가 앞장서서 '별의별 것에 다 트집을 잡아 혈세 낭비를 하게 만드는 페미니스트들'이라는 편견을 조장하려는 것 아니냐는 얘기다. 기존의 가부장적 질서에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존재인 여성, 페미니스트들은 정당한 지적을 함에도 이미 '프로 불편러' 소리를 듣는다. 이러한 프레임을 더욱 강화하기 위해 정부가 선동에 나선 것 아니냐는 자조마저 나돌고 있는 것이다.

'여성 모습 픽토그램' 처음 아냐… 13년 전 폐기된 안
 

2017년, 호주 빅토리아주 멜버른에서 1년 간 시범 운영됐던 여성 이미지의 신호등 ⓒ EPA/연합뉴스

 
정부 기관이 픽토그램을 두고 여자를 위해 '대신' 생각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2011년, 현 오세훈 서울시장이 두 번째 임기를 맞았던 당시 서울시는 "현재 쓰는 신호등의 이미지가 남성으로 보여 양성평등에 맞지 않으니 남성과 여성이 함께 있는 모습으로 바꿔보자"는 내용의 제안서를 경찰청 교통안전시설 심의위원회에 제출했다.

당시 서울시는 '여성이 행복한 서울'이라는 캐치프레이즈 하에 '여행(女幸)' 정책을 벌이고 있었다. 하이힐의 굽이 빠지는 보도블록을 전면 교체·개선하고, 여성전용주차장을 만들고, 여성 화장실을 대폭 늘리는 등의 내용을 담았다. 여성들이 처한 어려운 현실은 단지 하이힐이 잘 빠지는 보도블록 때문만이 아니기 때문에, 당시의 여러 '여행 정책'들은 전시 행정, 탁상행정이라는 비판을 들었다.

서울시가 제안한 '남녀가 함께 있는 신호등 표식'은, 결국 무위로 돌아갔다. 당시 경찰청 교통안전시설 심의위원회는 "전국의 신호등을 바꾸기 위한 비용은 200억 원 이상"이라며 보류판정을 내렸다. 현시점 치마 입은 비상구 픽토그램을 두고 벌어지는 '돈 낭비' 비판과 같은 귀결이다.

여성의 입을 막는 정부의 성평등 정책
 

이라영 <여자를 위해 대신 생각해줄 필요는 없다> 겉표지 ⓒ 문예출판사

 
<여자를 위해 대신 생각해줄 필요는 없다>라는 책 제목은 미국의 여성 작가 조라 닐 허스턴의 소설 '그들의 눈은 신을 보고 있었다'에서 왔다. 소설은 재니라는 흑인 여성이 세 남자와 세 번의 결혼을 겪으면서 자신만의 목소리를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다. 지역 사회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던 인물인 재니의 두 번째 남편은 말한다. "여자들과 아이들, 닭과 암소들에게는 대신 생각해 줄 사람이 있어야 해. 그럼, 분명히 그것들은 스스로 생각할 줄을 몰라." 아내를 인형처럼 취급하며 철저히 통제하던 그는, 아내가 입을 열기 시작하자 시름시름 앓다가 병으로 세상을 떠난다. 결과적으로는 인형처럼 대접하던 아내를 위해서가 아닌, 자신의 못난 권위를 지키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아내의 입을 막은 셈이다.

집권 3년 차를 맞은 현 정부의 성평등 정책이야말로 여성들의 입을 부지런히 막은 결과다. "구조적 성차별은 없다"는 정권이 들어선 이래, 중앙 부처와 지자체 등에서는 성평등과 관련한 퇴행이 이어진다. 폐지 논의가 거듭되며, 제 할 일을 못하고 있는 여성가족부는 올해 젠더 폭력 관련 예산을 전년 대비 120억 원가량 삭감했다. 여기에 문제의식을 가진 현장 단체들의 면담 요구는 매몰차게 거절했다. 이러한 여가부를 적극적으로 감시하고 비판해야 할 21대 국회 여성가족위원회는 반년 넘게 법안심사소위원회조차 열지 않았다.

지자체들 정책에서는 적극적으로 '여성'과 '성평등' 지우기가 시작됐다. 최근 서울시에서는 성평등 정책 범위를 저출생, 가족 이슈로 넓힌다며 '성평등 기금'을 '성평등 가족 기금'으로 명칭 변경을 추진하고 나섰다. 성평등 활동가를 양성하고 지원하는 서울시성평등활동지원센터는 서울시여성가족재단에 통폐합되는 수순을 밟으면서 지원 범위가 현저히 줄어들 전망이다. 여성들에게 직접적으로 이롭고 필요한 행정들에 적극적으로 딴지를 건 사례들이다.

'여성 도안 픽토그램' 등장은 이래서 여성들을 더욱 격분시킨다. 여성들이 처한 현실의 어려움은 "구조적 성차별은 없다"는 말로 무화시키면서 기껏 내놓은 아이디어가 13년 전 '그것'이기 때문이다. 여성은 가슴이 나오고, 치마를 입고, 머리가 긴 픽토그램으로는 대신할 수 없다. 또한 여자를 위해 대신 생각하는 행정이 아닌, 여자가 생각하고 집행하는 행정이어야 한다. 그리하여 십수 년째 반복되는 전시 행정이나 선심성 예산 집행 대신 성차별적 현실 자체를 바꾸는, 여자에게 필요한 행정이 나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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