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5.18 04:59최종 업데이트 23.05.18 0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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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29일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전 계엄령 문건 의혹의 핵심 인물인 조현천 전 기무사령관이 인천국제공항 제2터미널을 통해 입국한 뒤 서울서부지검으로 압송되고 있다. ⓒ 연합뉴스


지난 3월, 조현천 전 기무사령관이 귀국하여 계엄령 문건 수사가 재개되었다. 그런데 얼마 전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는 엉뚱하게도 문재인 정부에서 국방부 장관을 지낸 송영무 전 장관에 대한 인지 수사를 개시하고 압수수색까지 감행했다.

공수처는 기무사 계엄령 문건이 폭로된 뒤 열린 2018년 7월 9일 자 장관 주재 국방부 국·실장 간담회에서 송 장관이 '계엄령 검토는 문제 될 것이 없다'는 발언을 했다는 보도가 나가자, 이를 반박하기 위해 간담회 참석자들에게 '그런 말을 들은 사실이 없다'는 사실확인서 작성을 강요했다는 혐의를 씌웠다.


그러나 전직 기무사 간부의 일방적 주장 외에는 아무 근거가 없다. 검찰이 조현천 전 사령관을 내란음모죄로 수사하고 있는 와중에 공수처가 물타기 수사를 개시한 것으로 의심된다.

이에 맞춰 일부 보수언론이 연일 송 전 장관을 공격하며 '계엄령 문건은 아무 문제가 없는 문건'이라고 변죽을 울리고 있고, 최초로 혐의를 제기했던 전직 기무사 100부대장(국방부 기무부대장) 민병삼 대령 인터뷰까지 등장시켰다.

100기무부대장의 일방적인 주장
 

2018년 7월 24일 KBS가 국회 국방위원회에 출석한 100기무부대장 민병삼 대령의 발언을 보도했다. ⓒ KBS


기초적인 사실관계부터 하나하나 따져볼 필요가 있다. 일단 일련의 상황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이미 2018년 계엄령 문건 폭로 이후 언론과 국회에서 제기된 문제 중 하나일 뿐이다.

2018년 7월 13일 KBS는 송 장관이 주요 간부 간담회에서 '기무사가 위수령을 검토한 것은 잘못한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는 단독 보도를 냈다. 다만 출처는 제시하지 않았고 국방부는 장관이 그런 발언을 한 적이 없다고 반박했다.

며칠 뒤인 7월 24일, 자유한국당(현 국민의힘)은 국회 국방위원회 회의에서 계엄령 문건의 진상을 규명한다는 명분으로 갑자기 기무사 민병삼 대령을 증인으로 불렀다. 이때 KBS 보도의 출처가 민 대령이라는 점이 드러났다.

국방부를 담당하는 100기무부대의 장이었던 민 대령은 의원들에게 '장관 주재 간담회 동정'이라는 문건을 제출했다. 문건에는 간담회 '주요 논의 내용'이라는 제목으로 회의에서 오간 이야기들이 적혀있었다.

그러나 이 문건은 국방부가 작성한 정식 회의록이나 보고서가 아니다. 민 대령이 회의에 참석한 뒤 임의로 작성하여 기무사령관에게 장관 동정을 알린 기무사 내부 문건일 뿐이다. 기무사 요원이 장관과 참모들의 회의 내용을 듣고 기무사령관에게 몰래 알린 문서인 셈이다.

게다가 민 대령의 국회 증언에 따르면 문건은 녹취나 녹화 파일에 근거해 작성한 것이 아니라, 간담회에 다녀온 민 대령이 부하들에게 기억나는 내용을 구술한 것을 모아 쓴 것에 불과하다.

객관성이 떨어질뿐더러, 민 대령이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내용을 짜깁기하거나 가감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쉽게 말해 민 대령의 일방적인 주장을 써둔 문건만으로는 송 장관이 당일 그러한 발언을 했는지 안 했는지 증명할 수 없다.

객관성 없는 문서, 사실관계 안 맞는 주장
 

2018년 7월 16일 송영무 국방부 장관이 서울 용산구 국방부 대회의실에서 열린 계엄령 검토 문건 관련 국방부긴급회의에서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 공동취재사진


민 대령이 쓴 문건에 따르면 송 장관은 이날 법무관리관으로부터 '국가안보실 1차장 대상 기무사 수사 진행 상황 설명 관련' 보고를 들은 뒤 '세월호 및 위수령 검토 관련 내용 등을 알려줄 것. 그러나 위수령은 잘못된 것이 아님. 법조계에 문의해 보니 최악의 사태를 대비한 계획은 문제 될 것이 없다고 함. 장관도 마찬가지 생각임. 다만, 직권남용에 해당하는지는 검토하기 바람'이라고 말했다.

일단 문건 내용만 보더라도 이날 장관이 문제없다고 말한 대상은 알려진 바와 달리 '계엄 문건'이 아니라 '위수령 검토'다. 그런데 위수령 검토는 기무사가 아니라 수도방위사령부에서 했고 2018년 3월에 폭로된 바 있다.

기무사 계엄 문건이 폭로되어 온 나라가 시끄러운 와중에 국방부 장관이 한참 전에 이슈가 되었던 수방사 위수령 검토 건을 국가안보실 1차장에게 설명해 주라고 지시했다는 민 대령 작성 문건은 맥락부터 앞뒤가 안 맞다. 게다가 송 장관은 위수령 검토 문건과 기무사 검토 문건의 차이를 명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민 대령 문건에는 문제의 발언에 앞서 송 장관이 '위수령 검토문건 중 수방사 문건이 수류탄급 폭발력을 가지고 있다면 기무사 검토 문건은 폭탄급인데 기무사에서 이철희 의원에게 왜 주었는지 모르겠음. 기무부대 요원들이 BH(청와대-기자 주)나 국회를 대상으로 장관 지휘권 밖에서 활동하는 것이 많은데, 용인할 수 없음. 그래서 기무사를 개혁해야 함'이라 말했다고 적힌 부분도 있다.

자유한국당 백승주 의원이 국방부가 더불어민주당 이철희 의원에게 기무사 계엄 문건을 흘린 것 아니냐고 의심하며 설명을 요청하고 있다는 보고에 대한 답변이다. 내용상 송 장관이 '계엄 문건'과 '위수령 검토'를 혼동하여 문제의 발언을 했을 가능성도 낮은 것이다.

게다가 민 대령의 주장이 맞다 해도 송 장관은 '계엄 문건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발언은 아예 한 적이 없다. 민 대령이 작성한 문건 상으로도 송 장관이 문제가 없다 한 것은 '위수령 검토'일 뿐이다.

그런데 자유한국당 의원들은 민 대령이 국방부 장관 동정을 사찰한 문건을 정식 보고서마냥 포장하여 송 장관을 몰아붙이며 '계엄 문건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해놓고 왜 대대적인 수사를 벌이는 것이냐'며 계엄 문건 수사가 문재인 정부의 적폐몰이 기획수사 아니냐고 호통쳤다. 객관성 없는 문서를 들고 기초 사실관계도 안맞는 주장을 펼친 것이다.

새 정부에 기생해 부활 꿈꾸는 이들
 

2022년 8월 26일 김진욱 공수처장(오른쪽 네 번째)이 과천 청사에서 관계자들과 현판 제막을 하고 있다. ⓒ 연합뉴스

  
그로부터 5년이 지난 지금, 공수처가 다시 이 문제를 들고나와 송 장관을 상대로 강제수사를 펼치고 있다. 보도에 따르면 공수처는 송 장관이 계엄 문건을 보고받고 법률 자문을 거쳐 국방부 내부 회의에서 '문제 될 게 없다'는 취지로 발언했다가 향후 논란이 되자 회의 참석자들에게 자신이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는 사실확인서를 받았다고 보고 있다. 2018년 자유한국당 의원들의 억지 주장을 그대로 복사하여 범죄 혐의로 엮은 것이다.

민병삼 대령은 최근 언론 인터뷰에서 사실확인서 작성과 관련하여 "(송 장관이) 장관의 직위를 이용해 부하들에게 양심 포기를 강요한 것"이라며 사실확인서 작성이 추진되다가 중단된 이유를 "은폐 조작을 시도하다 내가 제동을 걸자 (원본을) 없앤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송 장관은 하지 않은 말을 보도한 언론에 정정을 요청하기 위해 간담회 참석자들에게 사실확인을 요청한 것뿐이다. 국회 증언에 따르면 그마저도 장관이 지시한 것이 아니라 대변인과 장관 보좌관이 작성을 추진하다가 중간에 그만두었다고 한다.

자기가 쓴 문건을 언론에 흘려 소위 '장관 발언'이라고 보도가 나오자 민 대령은 이 사실을 숨기고 있다가 당시 회의에 참석한 사람 중 하나로 국방부가 확인을 요구하자 사실 확인하기를 거부했다. 송 장관과 민 대령은 진실 공방의 당사자인데, 민 대령은 앞뒤 맥락을 다 자르고 마치 송 장관이 자기를 겁박하여 허위 서명을 강요했다며 양심선언자 행세를 하고 있다.

이런 사람의 말만 믿고 갑작스럽게 대대적인 '인지 수사'를 펼치고 있는 공수처의 저의도 의심스럽다. 송 장관은 장관 재임 당시 기무사의 비대한 권한을 통제, 축소하는 방향으로 군 정보기관을 개혁해야 한다는 말을 자주 하고 다닌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개혁 대상인 기무사 간부가 장관을 대상으로 앙심을 품고 항명한 것에 불과한 일을 두고 공수처는 마치 '계엄 문건 수사' 전체가 문재인 정부에 의해 조작·기획된 듯한 잘못된 인상을 심어주고 있는 것이다.

민 대령은 '계엄령 문건'은 단순 검토 문건이었지만 정치적으로 악용돼 기무사가 해편되는 사태까지 이르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국회를 해산하고, 국회의원들을 구금하고, 전차와 장갑차를 도심 한복판에 배치하는 '단순 검토 문건'도 있는가? 아무리 정권이 바뀌었다지만 아닌 건 아닌 것이다.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기무사는 '방첩사'로 이름을 바꿔 달고 조직 강화와 확대에 여념이 없다. 평화로운 촛불 시위를 계엄으로 짓밟으려 한 이들이 새 정부에 기생해 부활을 꿈꾸고 있는 것이다. 윤석열 정부가 이 공작에 속아 넘어가서는 안 된다. 전 정권을 잡는답시고 아무 카드나 집어 들다간 큰 낭패를 당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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