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5월 24일 11공수여단과 전투교육사령부가 오인교전을 벌였을 당시 위치와 직후 특전사 K가 학살을 목격한 곳으로 지목한 곳.
1983년 항공사진
- 5월 24일 송암동에선 무슨 일이 벌어졌습니까.
"(5월 21일 전남도청에서 후퇴한 후) 2수원지로 이동하라고 해서 짐 싸서 다 이동했죠. 11공수여단 본부는 2수원지로 가고 대대는 각자 뿔뿔이 흩어졌어요. (5월 24일 '11공수여단은 송정리 비행장으로 이동하라'는 지시를 받고) 대대별로 차량을 전부 배치했고 지원차량으로 APC(장갑차)도 배치됐죠. 1개 분대용으로 9명이 타는 거요. 나는 (APC에 타고 이동 행렬) 맨 앞 선두로 가고 있었습니다.
근데 가는 과정에 (짚차를 타고 나타난 11공수여단) 63대대장 조◯◯ 중령과 작전장교(차◯◯ 대위), 당번병이 APC를 세우더니 (함께 APC에 탔고) 정보장교만 짚차를 타고 가라고 했어요. 작전장교가 (저에게) '선배님 앉으십쇼'라고 해서 (저는 안으로 들어갔고 작전장교는 APC) 위에 타고 가면서 총을 쏘고. 그러다 (이동 중에 11공수여단과 전투교육사령부 사이의) 오인사격이 벌어진 것이죠.
빠앙, 빠앙, 세 발인가. (전투교육사령부 보병학교 교도대가 쏜 90mm 무반동총이) APC에 맞았는데 그 안에 불이 막, 불길이 통과해서 지나갔죠. 그때 APC가 멈춰 엔진이 땅에 쿵 떨어지고. 그때 제 철모가 벗겨져서 핏자국 위에 떠 있는 철모를 들고 나와 도로가 하수도, 물 내려가는 데에 복지부동으로 있었어요. 제 철모가 핏물, 창자, 내장 위에 떠 있었어요. 그걸 쓰고 내려온 거죠. 조◯◯ 중령은 팔이 부러져서 껍질만 달랑달랑. 나머지(사망자)는 거의 다 토막살해가 돼버렸죠.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니까 전방에서 '사격을 중지하라', 메가폰으로 '사격을 중지하라, 사격을 중지하라' 소리가 들렸어요. 그때 교도대장 김◯◯ 중령이 지시를 한 것입니다. 11공수여단 정보참모 마치고 그곳으로 전입을 갔었거든요. (오인교전은) 한 시간 정도 이어졌죠. 그때 당시 (도랑에 숨어 있으면서 보이는 게) 벚꽃은 안 피었고 벚나무 가로수가 쫘악 있었어요. 낙엽이파리, 줄기가 촤악촤악 떨어졌어요. 총알이 하도 막 그러니까. 그리고 2와1/2톤 트럭은 총을 맞아 벌집처럼 다 뚫렸었고. 탄피는 뭐 볼 것도 없어요. 하도 많이 있었으니까."
- 그 이후 11공수여단이 민간인들을 잡아 온 것입니까.
"(오인교진이) 잠잠해진 후 애들이 스스로 그 주위에 가서 (민간인들을) 막 잡아 왔습니다. 잡아 와서 포승줄로 묶어 엎드려 놓고 그 위에 올라가서 대검으로 조샀어요. 엎드린 사람들 등허리에 앉아 대검으로 이렇게 찍어요. 뒤에서 이렇게 (쿡쿡 대검으로 찍었어요). 그러고 있는데 H 소령이 와서 '야, 비켜 비켜 비켜' 하더니 총으로 (민간인들을) 쏴버린 거예요."
- 돌아가신 분들은 대략 몇 분 정도 되나요.
"모르죠, 수를 안 셌으니까. 그냥 많았어요. 내가 볼 때 죽은 이는 20~30명 됐다고 생각해요. 빵빵 쏴 죽인."
- 최소로 잡으면 어느 정도입니까.
"20명. 무작위죠, 무작위. 서 있는 사람은 앞으로 떨어지고 엎드려 있던 사람은 그대로 파리 목숨 돼 버린 거죠."
"희생자 생각하면 비통한 마음"

▲특전사 K가 5.18민주화운동 당시 부상 치료를 받았다는 기록. K는 1980년 5월 24일 광주 송암동에서 벌어진 11공수여단과 전투교육사령부 간 오인교전 중 다리에 부상을 입었다. 이 기록엔 K가 '우대퇴부 파편창'을 입어 '파편제거술'을 받았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특전사 K
- 당시 부상을 입었다고 들었습니다.
"(나도 APC에 타 있어서 파편이) 몸에 다 배겼었지. 파편이 싹. 오OO 소령이 '바지 한 번 내려 봐' 했고 바지 한 번 내려보고 (피가 나니까) 헬기 타고 후송 가서 (국군)광주통합병원으로 갔습니다."
- 이 같은 상황을 제보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전에 (1988~1989) 5공 청문회를 할 때도 양심선언을 하고 싶었어요. 근데 어떻게 하는 줄도 모르고 방송국을 찾아가야 하는 건지, 신문사를 찾아가야 하는 건지 모르고 생각만 하고 있었죠. 5.18진상규명조사위원회가 만들어졌다고 해서 (2021년 처음 위원회에) 제보한 거죠.
선량한 광주시민을 갖다가 학살도 아니고... 총으로 갖다가. 그때 당시 목격자들 중 산 사람도, 죽은 사람도 있겠지만 만약 자기 가족이나 연관된 사람이라면 치가 떨릴 것 아닙니까. 잘못 없는 양민을 젊다는 이유로 잡아다가 쏴 죽인다는 게 도저히 우리 인간으로서 상상할 수가 없는 일이잖아요."
- 당시 광주시민의 행동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때 당시 폭동 진압이라고 했습니다. 충성을 위해 (진압을) 한다고 했고요. 또 시민을 폭도라고 했죠. 민주라는 게 뭡니까. 국민이 주인이란 게 민주잖아요. 민주사회에서 공동으로 의견표시를 할 수 있는 거잖아요. 그런데 전두환이란 사람이 정권을 잡기 위해 '가서 때려잡아' 하니까 계엄령이 선포되고 (군인들이) 출동해 (시민들을) 죽인 거죠. (광주시민들이) 무슨 오기를 부렸나요, 이권에 엮여 있었나요. 순수한 홍익인간 정신이었잖아요.
(제가 목격한 돌아가신 분들에 대해선) 참 불쌍하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나쁜 사람 만나서 억울하게 돌아가셔서 참 안 됐다,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런 생각. 슬프고 비통한 마음이에요."
봉주영
▲영화 <송암동> 포스터.
영화 <송암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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