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4.26 04:58최종 업데이트 23.04.26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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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가 영화 <송암동>의 특별상영을 위한 펀딩을 진행합니다. 특전사 K의 새로운 증언을 비롯한 송암동 일대 사건을 연속 보도하면서, 5.18민주화운동 마지막 날인 5월 27일까지 펀딩을 이어갈 예정입니다. 많은 참여 부탁드립니다. [편집자말]
*< 증언- 특전사 K가 꺼낸 광주의 기억 https://omn.kr/23n4e>에서 이어집니다.
 

5.18민주화운동 중 광주 송암동 일대 민간인 학살(5월 24일)을 증언한 당시 특전사 11공수여단 소속 K. ⓒ 이희훈

 
특전사 K는 43년 전 광주에서의 기억을 상세히 묘사했다. 

K가 속한 11공수여단의 이동 작전(주남마을→송정리 비행장), 송암동을 지나던 11공수여단을 향한 전투교육사령부(보병학교 교도대)의 공격, K가 타 있던 APC(병력수송장갑차)의 폭발과 이어진 오인교전, 그리고 수많은 사상자.


이러한 K의 기억은 현재까지 드러난 사실과 일치한다. 그리고 이어진 그의 증언은 반인도범죄로 볼 수 있는 학살 목격담이자, 43년 만에 터져 나온 새로운 이야기다.

"(계엄군들이) 주위에 가서 젊은이들을 막 잡아 왔어요. (잡혀 온 사람들은) 포승줄에 묶여서 고랑에 엎드린 사람도 있었고, 서 있는 사람도 있었고요. (계엄군) 몇몇이 엎드린 사람들 등 위에 올라가 쭈그리고 앉아서 대검으로 조샀어요. '내 전우를 죽여?' 그러면서 대검으로 등을 콕콕 찌른 거죠. 묶인 사람들은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그랬고요. 근데 갑자기 H 소령이 나타나서 '야, 비켜 비켜' 하더니 탕탕탕. 고랑에 엎드린 사람들도 탕탕탕, 서 있는 사람도 그대로 탕탕탕."

또 다른 '송암동' 증언들
 

1980년 5월 24일 11공수여단과 전투교육사령부가 오인교전을 벌였을 당시 위치와 직후 특전사 K가 학살을 목격한 곳으로 지목한 곳. ⓒ 1983년 항공사진

  
오인교전 기록과 K의 증언을 종합해 이 사건이 벌어진 장소를 항공사진(1983년 기준)에 표기하면 위와 같다. 당시 왕복 2차선이었던 송암동 도로에서 전투교육사령부와 11공수여단의 오인교전이 있었고, 11공수여단 선두에 있던 APC가 90mm 무반동총을 맞고 도로 위에서 폭발했다. K는 바로 옆 논을 사건 발생 장소로 지목했다.

현재 해당 도로는 왕복 8차선으로 확장됐고 K가 지목한 논은 도로와 건물로 인해 사라졌다. 주변의 마을들 역시 지금은 아파트 단지로 변해버렸다. 지금으로선 현장 조사가 쉽지 않은 상황이다.

K는 자신 외에도 이 사건을 목격한 인물이 있을 거라고 했다. 대표적으로 부상당한 자신과 함께 있었던 오아무개(당시 소령)를 떠올렸다.

"(오인교전 후) 그때 제가 갖고 있던 총이 쫘악 찌그러져 있더라고요. 파편이 튀어 권총에 맞은 거죠. 그 권총 없으면 저도 죽었겠죠. 그래도 작은 파편이 몸에 다 배겼었죠. 보급장교였던 오OO 소령이 '바지 한 번 내려 봐'라고 해서 내렸더니 피가 나고 있었죠."

하지만 43년이 지난 현재로선 오 소령의 생사 여부를 파악하는 것조차 어려웠다. 이외 K가 언급한 다른 특전사 중 일부를 수소문했으나 연락·만남을 이어가지 못했고, 몇몇은 증언을 거부했다.

K의 폭로와는 별개로, 당시 송암동에선 실제 비슷한 사건이 벌어진 바 있다. 오인교전 중 민가에 있었던 권근립(24), 임병철(23), 김승후(18)는 직후 폭도로 몰려 끌려나와 사살 당했다. 아들을 찾아 나섰다가 하수구에 숨었던 박연옥(49) 또한 '나오라'는 군인의 말에 응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총을 맞고 목숨을 잃었다.

이 네 명의 사망자처럼 구체적으로 확인된 건 아니지만, 2021년 광주 남구청의 구술채록 작업 중에도 K의 기억과 비슷한 증언이 나왔다. 아래는 5.18 당시 송암동 일대 원제마을에 살았던 안정옥씨의 이야기다. 안씨는 현재 고인이 되었다.

"양복점을 한 김○○이란 사람이 있어요. 1년 후배. (그 사람이) 육군 상사가 다섯 명인가 여섯 명을 일렬로 세워놓고 총을 쏴서 한 방에 죽였다는 소리를 했어요. (중략) 그때 (군인들이 마을) 반장한테 (몇 사람을 데리고 와서) '이 동네 사람이냐, 아니냐' 물어보니까 (반장이) '이 사람은 맞고, 이 사람은 아니다'라고 하자 (군인들이 아니라고 한 사람을) 그대로 쏴버렸다고 해요. (중략) 넝마주이들이 엄청나게 죽어서 (이후 마을 인근에) 넝마주이들 한 명이 없었어요. 바구니 하나 등에 지고 뭐 주우러 다니는 사람들. 넝마주이들 씨가 안 보였어요."

뿐만 아니라 송암동 인근에선 1980년 5월 24일 이전에도 무고한 시민의 사망 사건이 발생했다. 박재영·왕태경은 차를 타고 인근을 지나다 집중 사격을 당해 목숨을 잃었다.

송암동을 제외하고도 5.18 당시 민간인 학살 사건은 여럿 확인된 바 있다. 조사·증언 또한 계속 이어져 ▲ 광주역(5월 20일) ▲ 광주교도소(5월 20~22일) ▲ 광주국군통합병원(5월 22일) ▲ 주남마을(5월 22~24일) ▲ 해남(5월 23일) 등에서의 진상규명(총격, 암매장, 부상자 방치 등)은 현재진행형이다.

"인간으로서 상상할 수 없는 일"
 

5.18민주화운동 중 광주 송암동 일대 민간인 학살(5월 24일)을 증언한 당시 특전사 11공수여단 소속 K. ⓒ 이희훈

 
K는 2년 전인 2021년 처음 자신의 기억을 5.18진상규명조사위원회에 털어놨다. 위원회는 K의 증언을 바탕으로 진상규명을 위한 조사를 진행하고 있다.

- 43년 전 그 모습을 목격하며 어떤 생각을 하셨나요?

"그렇게 잔인하면 안 되죠. (시민들이) 무장공비도 아니고 그게 뭡니까."

- 이런 내용을 세상에 알려야겠다고 마음먹은 계기가 무엇인가요?

"선량한 시민을 그렇게 총으로... 학살도 아니고. 그때 당시 죽은 사람들과 연관된 사람들은 치가 떨릴 것 아닙니까. 잘못 없는 양민을 젊다는 이유로 잡아다가 쏴 죽이면 그게 뭐냔 말이에요. 도저히 인간으로서 상상할 수 없는 일이잖아요. 사실 이전에도 (1988~1989년) 5공청문회 할 때 양심선언을 하고 싶었어요."

- 그때 하지 못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할까, 말까 생각하다가 말았어요. 어떻게 하는 줄도 몰랐고, 방송국을 찾아가야 하는지 신문사를 찾아가야 하는지도 모르고 생각만 하고 있었죠. 그러다 5.18진상규명조사위원회가 만들어졌다는 걸 알게 돼서 (2021년) 제보하러 간 것이죠."

*인터뷰는 다음 편에 계속 이어집니다.
*<오마이뉴스>는 5.18 당시 송암동 등 광주 외곽지역에서 벌어진 일에 대한 증언을 기다립니다. social@ohmynews.com

 

ⓒ 봉주영

  

ⓒ 영화 <송암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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