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5.10 11:50최종 업데이트 23.05.10 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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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가 영화 <송암동>의 특별상영을 위한 펀딩을 진행합니다. 특전사 K의 새로운 증언을 비롯한 송암동 일대 사건을 연속 보도하면서, 5.18민주화운동 마지막 날인 5월 27일까지 펀딩을 이어갈 예정입니다. 많은 참여 부탁드립니다. [편집자말]

가해자의 손자는 고개를 숙였고 피해자의 형은 "고맙다"는 말을 건넸다. ⓒ 이조훈 소중한


"고맙습니다."

가해자의 손자는 고개를 숙였고 피해자의 형은 "고맙다"는 말을 건넸다. 5.18민주화운동 후 43년이 지나서야 고 전재수군의 형 전재룡(62)씨와 전두환의 손자 전우원(27)씨는 서로를 껴안을 수 있었다.


재수군은 1980년 5월 24일 11공수여단의 송암동 일대 무차별 사격으로 11세의 나이에 목숨을 잃었다. 5.18 당시 숨진 확인된 희생자 중 가장 어린 나이의 사망자다. 총소리에 놀라 도망가다 형이 사준 새 고무신을 주우려던 재수군은 온몸에 총상을 남긴 채 주검으로 발견됐다.

지난 3월 31일, 전두환 일가 중 처음으로 국립5.18민주묘지를 찾은 우원씨는 추모탑을 지나 가장 먼저 재수군 묘 앞에 섰다. 긴장한 눈빛으로 발걸음을 옮긴 우원씨에게 재룡씨가 먼저 악수를 건넸다. 우원씨는 재룡씨의 손에 머리가 닿을 듯 깊이 허리를 숙였다.
 

전두환의 손자 전우원(오른쪽)씨가 지난 3월 31일 국립5.18민주묘지를 찾아 고 전재수군의 묘를 참배하기 전 재수군의 형 전재룡씨에게 고개를 숙이고 있다. ⓒ 소중한


흑백사진에 담긴 사연

두 사람의 만남 1시간 전, 먼저 묘역에 와 있던 재룡씨 역시 초조한 마음이었다. 굳은 표정의 재룡씨와 몇 마디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그는 동생 이야기에 금세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다.

- 어려운 발걸음 해주셨습니다.
"할아버지가 하지 못한 일을 손자가 와서 해준다니까 광주시민으로서 고마운 마음에 왔습니다. 저에게도, 동생에게도 조금이라도 위로가 되지 않을까 그런 바람으로 왔습니다."

- 동생 분을 떠나보내신 지 43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동생이... 제가 43년 동안 참... (눈물)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가슴앓이를 해서..."

- 43년이 지났다 해도 어떻게 잊히겠습니까.
"제가 배우지 못했고 어려운 가정에서 자랐기 때문에 재수만큼은 최대한 자기가 하고 싶은 걸 하도록 밀어주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빨리 죽어서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제가 그 고무신을 안 사줬더라면 재수가 안 죽었을 수도 있었을 텐데... 세월이 흘렀어도 여전히 가슴 아픕니다."

- 오늘 선생님의 마음이 우원씨에게 잘 전해졌으면 합니다.
"(전두환) 손자가 와서 무릎을 꿇는다는데, 실은 제가 고마운 마음으로 왔습니다. 용서를 빈다는데 제가 화해는 해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5.18민주화운동 당시 11공수여단의 총격으로 숨진 고 전재수(당시 11세)군의 형 전재룡씨가 지난 3월 31일 동생의 묘를 찾았다. ⓒ 소중한

 
재룡씨는 뚜벅뚜벅 발걸음을 옮겼다. 추모탑을 지난 뒤 묘역의 첫 계단을 올라 곧장 우측으로 걸어가면 재수군의 묘가 있다.

전재수의 묘. 1969년 5월 15일 생, 1980년 5월 24일 졸. "고이 잠들어라. 아버지가."

재룡씨는 동생의 묘비를 연신 쓰다듬었다. 한참 묘를 바라보던 재룡씨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 나왔다. 묘 바로 앞엔 앳되다는 표현으로도 설명하기 힘든, 정말 어린 나이의 꼬마 사진이 놓여 있었다. 회한이 담긴 이 사진만으로도 재룡씨는 울컥하는 마음을 억누를 수 없다.

2021년 5월 이전까지 재수군의 묘엔 무궁화 사진만 놓여 있었다. 너무 어린 나이에 숨져 얼굴 사진 한 장 제대로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묘를 찾을 때마다 마음이 무거웠던 재룡씨는 41년 만에 우연히 동생의 사진을 발견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사진첩을 정리하던 중 겹겹이 쌓여 꽂혀 있던 사진에서 재수군 얼굴이 담긴 사진이 나온 것이다.

"너무 놀랐습니다. 흑백사진 속 아버지와 고모들 옆에 딱 재수가 있는 거예요. 제 딸·아들을 불러 '너희 작은아빠'라고 알려줬습니다. 그동안 동생이 얼마나 형을 원망했을까요. 지금도 저는 '재수야 항시 미안하다' 그럽니다. 늦게나마 동생 얼굴을 찾았으니 이제라도 눈 잘 감고 편히 쉬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11공수여단의 총격으로 숨진 고 전재수(당시 11세)군의 묘. ⓒ 소중한


"할아버지가 못한 일, 해줘서 고맙습니다"

오후 2시께, 묘역 초입 '민주의 문'에 도착한 우원씨는 방명록에 아래와 같이 적었다.

"저라는 어둠을 빛으로 밝혀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민주주의의 진정한 아버지는 여기에 묻혀 계신 모든 분들입니다. 2023년 3월 31일 전우원 올림."

추모탑 앞 제단에 향을 피운 우원씨는 가장 먼저 재수군의 묘로 향했다. 묘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재룡씨는 우원씨에게 손을 건넸고 손을 맞잡은 우원씨는 한껏 허리를 숙였다. 고개를 든 우원씨와 눈을 마주친 재룡씨는 진심어린 말을 건넸다.

"할아버지가 하지 못했던 일, 아버지가 하지 못했던 일을 해줘서 고맙습니다."

재룡씨가 우원씨를 껴안았다. 우원씨는 작은 목소리로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반복했다. 잠시 후 재수군 묘 앞에서 무릎을 꿇은 우원씨는 눈을 감고 묵념한 뒤 입고 온 코트로 묘비를 닦기 시작했다. 뒤편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던 재룡씨는 연신 눈물을 닦아냈다.
 

전두환의 손자 전우원씨가 지난 3월 31일 국립5.18민주묘지를 찾아 고 전재수군의 묘를 참배하고 있다. 재수군의 형 전재룡씨가 눈물을 훔치고 있다(뒤편 왼쪽). ⓒ 소중한


  

5.18민주화운동 당시 11공수여단의 총격으로 숨진 고 전재수(당시 11세)군의 형 전재룡(뒤)씨와 전두환의 손자 전우원씨가 지난 3월 31일 국립5.18민주묘지를 찾아 참배하고 있다. ⓒ 소중한

 
우원씨는 참배를 마친 뒤 묘역을 떠나며 "너무 늦게 와서 죄송합니다. 더욱 제 죄가 뚜렷이 보였습니다. 정말 죄송한 마음뿐입니다"라고 말했다.

묘역을 떠난 재룡씨는 자신이 운영하는 자동차 정비소로 돌아왔다. 5.18 당시 열아홉 신참 정비사였던 재룡씨는 버스를 몰며 항쟁에 참여했었다. 그는 43년이 지난 지금도 "아버지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업을 이어가고 있다. 이날도 묘역에서 입었던 정장을 벗고 작업복으로 갈아입은 재룡씨는 슬픔을 억누른 채 일상을 이어갔다.

- 오늘 유족으로서 힘든 결정을 하셨습니다.
"어쩌겠습니까. 죄를 지었어도 (손자 우원씨가 아닌) 할아버지가 지었죠. 전두환이 5월 영령 앞에 한 번이라도 사죄하고 갔으면 좋았을 텐데. 그게 이뤄지지 않고 죽어서 안타깝습니다."
 

5.18 특집 - 송암동 ⓒ 봉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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