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5.16 13:47최종 업데이트 23.05.16 1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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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가 영화 <송암동>의 특별상영을 위한 펀딩을 진행합니다. 특전사 K의 새로운 증언을 비롯한 송암동 일대 사건을 연속 보도하면서, 5.18민주화운동 마지막 날인 5월 27일까지 펀딩을 이어갈 예정입니다. 많은 참여 부탁드립니다. [편집자말]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이었던 최진수씨는 1980년 5월 24일 송암동에서 목격한 김군의 죽음에 대해 증언해왔다. 오른쪽 사진은 최씨가 1989년 2월 22일 국회 5.18광주민주화운동진상조사특위에 출석했을 때 모습. ⓒ 소중한·국회5.18광주민주화운동진상조사특위

 
1989년 2월 22일, 제28차 국회 5.18광주민주화운동진상조사특별위원회. '광주청문회'로 불린 이곳에서 26세 최진수는 이렇게 증언했다.

"관자놀이에 대고 M16으로 그냥 쏴버리더라고요. 그래가지고 그 친구는 그냥 죽었습니다. (총을 쏜 하사가) 저를 향해서 오더라고요. 막 쏘려는 순간에 대위가 '시끄러우니까 이쪽에서 죽이지 말고 일단 큰길가로 끌고 나가라'고 얘기했습니다."


34년 뒤인 지난 4월 26일, 60세가 된 최진수를 만났다. 그의 진술은 여전했다.

"부사관 한 명이 '뭐야 이 새끼는' 하면서 김군의 관자놀이를 바로 쏴버렸습니다. 망설이지도 않았어요. (V자 모양의) 갈매기 계급장이 보였습니다. 그 부사관이 바로 제 관자놀이에 총구를 들이댔습니다. 저는 한 발이 발사됐으니 총구가 뜨거울 줄 알았는데 그렇게까지 뜨겁진 않았습니다. 그때 어느 대위가 와서 '여기서 이러지 말라'고 했습니다."

5.18조사위 발표, 최진수의 반박

1980년 5월, 17세의 최진수씨는 시민군이었다. 5월 18일 광주역에서 친구를 만나려던 그는 공수부대에 붙잡혀 무자비한 구타를 당하고 대검으로 머리카락을 잘린 뒤 5월 20일부터 시위에 참여했다.

최씨는 5월 24일 시민군 동료들과 광주 외곽인 송암동으로 이동했다. 전남도청 2층 상황실 부근에 있던 그는 '송암동에 군인이 나타났다는 제보가 있으니 확인하라'는 지시에 따라 트럭에 올랐다. 그곳엔 최씨가 전날 전남도청에서 우연히 마주했다는 '김군'도 타 있었다. 최씨가 자신의 옆에서 관자놀이에 총을 맞고 숨졌다고 지목한 이가 바로 김군이다.

2018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영화 <김군>(감독 강상우)이 공개됐다. 이른바 '광수 1번(지만원씨가 북한군이라고 허위 유포한 사진 속 인물)' 사진을 김군으로 보고 그의 행방을 추적하는 다큐멘터리 영화다. 최씨도 김군 사망의 목격자로 영화에 출연했다. 김군이 누군지, 그의 시신은 도대체 어디로 갔는지 많은 이들이 주목했다.

2022년 5월,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아래 위원회)는 대국민 보고회를 열어 ▲이른바 '광수 1번' 사진의 인물은 김군이 아닌 현재 생존해 있는 차복환씨이며 ▲최씨가 증언한 송암동에서 숨진 김군은 '1963년생 자개공 김종철'이라고 발표했다. 그러면서 "김종철은 사건 현장(송암동)에서 사살된 후 실종된 것으로 알려져 왔으나 효덕초 앞 삼거리에서 연행되던 중 계엄군에 의해 사살됐다는 증언을 확보했다"고 발표했다.
 

국립5.18민주묘지에 안장된 5.18 희생자 고 김종철의 묘. 묘비엔 5월 27일 사망한 것으로 나와 있다. ⓒ 소중한

 
최씨는 위원회의 발표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1989년 청문회는 물론, 2020년 진정인으로서 위원회에도 출석해 '관자놀이에 맞아 즉사했다'고 진술했음에도, 위원회가 '연행 중 사살'된 것으로 발표했기 때문이다. "저 대신 죽은 김군에게 여전히 죄책감을 느끼고 있으며 그의 시신이라도 찾고 싶다"는 최씨 입장에서 '사망 과정'이 바뀐다는 건 받아들이기 어려운 내용이었다. 

위원회가 김군이라고 특정한 김종철씨의 유족도 반발했다. 김씨의 형은 위원회 발표 직후 <경향신문> <광주일보>에 "동생은 (위원회가 발표한 것처럼 5월 24일 송암동이 아닌) 5월 27일 전남도청에서 죽었다", "1963년생이 아닌 1962년생"이라고 밝혔다.

국립5.18민주묘지에 안장된 김씨의 묘비엔 지금도 "1962년 3월 6일 생, 1980년 5월 27일 졸, 시민군에 가입해서 5월 18일 나가서 5월 27일까지 열심히 용감히 싸웠음"이라고 적혀 있다. 5.18기념재단이 유족의 구술을 토대로 발행한 <그해 오월 나는 살고 싶었다>(2006)에는 김씨의 아버지가 5월 25일에 전남도청에서 아들을 만났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종철의 삼촌과 함께 아들을 찾아다니던 아버지는 (5월) 25일경 전남도청에서 종철을 만났다. 부상자와 시체들이 즐비한 지하실에서 시신을 운반하고 있었다. (중략) '저녁에 온다고 했으니 금방 들어오겠지'라고 생각한 아버지는 "몸조심해서 빨리 들어오라"는 당부를 하고 돌아섰다. 그런데 종철은 그날 밤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반면, 위원회는 "사망 일시·장소 : 1980년 5월 24일 효덕동 장소 불상"이라고 적힌 '성명불상'의 검시조서(검찰 작성)를 김씨의 것으로 봤다. 당시 보안사가 작성한 '검시참여결과보고' 중 "사망 일시·장소 : 5월 24일경 광주시 효덕동"이라고 적힌 문서에 "김종철, 1962년 3월 6일생"이라고 적혀 있는 것을 근거로 삼았다. 

'성명불상' 검시조서, '김종철' 검시참여결과보고서 모두 사인은 "두부 타박"으로 나와 있다. 머리를 무언가로 맞아 사망했다는 것이다. 최씨는 "30년 넘게 우측 관자놀이에 총을 맞았다고 증언해 왔는데 두부 타박이 웬 말인가"라고 주장했다. 아래 최씨와 나눈 대화를 일문일답으로 정리했다.

송암동에 간 이유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이었던 최진수씨. 1980년 5월 24일 송암동에 있었던 최씨는 자신이 목격한 김군의 죽음에 대해 증언해왔다. ⓒ 소중한

 
- 1980년 5월 18일 광주에서 어떤 일을 겪었나.

"광주역에서 친구를 만나기로 했다. 오전 10시에서 11시 사이였다. 광주역 광장에 무장한 병력이 배치돼 있었다. 광주역 대합실로 들어가려는데 특전사들이 '어이, 이리 와'라고 그러더라. 저와 친구 모두 군용차로 끌려갔다. 차에 위생 마크(십자가)가 있었던 것 같다. 차 뒤편 내부의 양쪽에 특전사 6~7명이 앉아 있었다. 무릎을 꿇게 하더니 묻지도 않고 구타하기 시작했다."

- 무엇으로 맞았나.

"군홧발, 그리고 곤봉 같은 것. 1시간 가까이 초주검이 되도록 맞았다. 우리가 비명을 지르자 (특전사들이) '뭘 염탐하러 왔냐' 묻더라. '대학생이 아니다'라고 답하자 다시 '몇 살이냐'고 물었다. '열일곱'이라고 답했다. 그러자 '밖에 나가서 지금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면 죽여 버리겠다'고 그러더라.

한참 두들겨 맞고 나오는데 특전사들이 다시 우리를 불렀다. 저와 친구의 머리채를 잡더니 대검으로 머리카락을 난도질해 버렸다. 그러더니 한 번 더 '어디 가서 이야기하면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 버린다'고 말했다. 그렇게 머리카락이 잘린 상태로 돌아다닐 수가 없어서 광주역 왼편에 있던 이발소에 가서 삭발했다. 얼마나 맞았는지 이틀 동안 꼼짝도 못했다."

- 시위엔 언제부터 참여했나.

"너무 맞아서 19일까진 집에만 있었다. 20일 오전까지 집에 있었는데 함성을 듣고 밖으로 나왔다."

- 사는 곳이 어디였나.

"전남도청 바로 뒤 단층 주택가에 살았다. 5월 20일 밖으로 나가보니 전남도청, 그리고 충장로 쪽에서 젊은 사람들이 엄청나게 당하고 있었다. 특전사들이 건물까지 들어가 시민들을 끌고 내려와서 심하게 구타했다. 이후 5월 21일 계엄군이 전남도청에서 물러났다. (계엄군의 집단발포 직후라) 시민들 사이에서 '무기가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저도 화순 쪽으로 가다가 학운동 동사무소에서 총을 지급받았다. 총을 든 시민군은 모두 광주공원으로 집결하라고 했다. 그곳에서 총기 사용법 등 기본적인 훈련을 받았다."

- 김군은 언제, 어디서 만났나.

"5월 23일 전남도청 인근에서 만났다. 제가 소속된 시민군 소대는 광주관광호텔(현재 무등빌딩) 옥상에서 활동했다. 또 외곽 근무를 해야 한다고 해서 산수오거리에서 이틀 밤을 새웠다."

- 김군은 어디에 소속돼 있었나.

"같은 소대는 아니었다. 알 수 없었다."

- 5월 23일에 우연히 김군을 만난 건가.

"산수오거리에서 야간 근무를 마치고 시내 상황이 궁금해 전남도청으로 이동했다. 전남도청 우측 철문에서 보초를 서던 분이 '화장실 좀 다녀오겠다'며 잠깐 대신 보초를 서달라고 했다. 그때 옆에 김군이 있었다. 김군은 캘리버50(기관총)이 장착된 차에 타고 있었다. 내가 '잠시 보초를 서게 됐다'고 말하면서 김군과 짧게 대화를 나눴다. 김군은 저보다 연상으로 보였고 눈빛이 되게 강했으며 진한 방언의 전형적인 호남 아래쪽 말씨였다."

- 통성명하진 않았나.

"그땐 모두 불문이었다. 그쪽은 '김', 저는 '최' 정도로 각자 소개했다."

- 5월 24일 송암동으로 가는 트럭에 함께 탄 계기는 무엇인가.

"5월 23~24일 넘어가는 새벽에 저는 서방시장에 있었다. 서방시장 중국집 2층에서 야간 근무를 섰다. 밤에 교도소 쪽에서 특전사가 들어올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날이 밝아 다시 전남도청으로 돌아왔고 2층 복도에 있었는데 한 사람이 상황실 문을 열고 나와 '송암동에 군인이 나타났다는 제보가 들어왔다'고 말했다. 그래서 제가 '출동, 출동' 소리쳤고 근처에 있던 여러 명이 '10번 트럭'을 탔다."

- 그중 김군도 있었던 건가.

"그렇다. 전남도청에서 출발해 송암동으로 바로 가야 하는데 운전자가 양동시장을 거치더니 결국 광천로터리까지 갔다. 당시 국군통합병원 쪽에 군인들이 있었다. 그래서 탱크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광천로터리에 큰 통나무들을 놔뒀었다.

아무튼 그 모습을 보고 좌회전을 했고 당시 광천로터리와 백운로터리를 잇는 2차로 외곽도로를 타고 쭉 이동했다. 원래 백운로터리에서 최OO씨가 내려달라고 했는데 그냥 가버렸던 기억이 있다. 최OO씨에겐 미안한 이야기지만 당시 한 사람이라도 더 있게 돼 고맙게 생각했다. 백운로터리에서 송암동 쪽으로 갈 때 간헐적으로 총소리가 들렸다. '다다다다'는 아니고 간헐적으로 탕, 탕."

"V자 모양의 계급장"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이었던 최진수씨가 1989년 2월 22일 국회 5.18광주민주화운동진상조사특위에 출석해 1980년 5월 24일 송암동에서 겪은 일을 설명하고 있다. ⓒ 국회5.18광주민주화운동진상조사특위

 
- 그렇게 효덕초 삼거리에 도착한 것인가.

"그렇다. 효덕초 삼거리에 점방이 있었고 그 앞에 주민 서너 분이 서 계셨다. 일단 차를 세우고 내렸다. 제가 '여기 군인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왔다'고 하자 갑자기 여성 한 분이 제 뒤를 가리키며 '군인이다'라고 소리쳤다.

뒤를 돌아보니 장갑차가 있었고 상반신을 내민 기관총 사수와 눈이 딱 맞부딪혔다. 1, 2초 서로 주춤했고 정적이 흘렀다. 서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에서 장갑차가 후진하더라. 그 틈에 제가 '군인이다, 피해라'라고 소리쳤다. 포복 자세로 길 건너 집으로 도망치는데 '두두두' 소리가 들렸다. 장갑차가 다시 전진했고 총을 쏘기 시작했다.

제가 길 건너 집 안방에 제일 먼저 들어갔고 이후 박OO씨가 들어왔다. (나중에 알게 된 건데) 최OO씨는 우측 재래식 화장실에 들어갔더라. 이후 총소리, 포탄 터지는 소리가 40분 정도 들렸다. 그러더니 얼마 후 '사격중지, 사격중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김군은 그때야 우리가 있는 방으로 들어왔다."

- 11공수여단과 전투교육사령부 간 오인교전이 있었는데 그땐 그러한 사실을 전혀 몰랐나.

"당연히 그렇다."

- 그 방엔 몇 명이 있었나.
"6명. 저, 박OO, 김군. 그리고 이□□ 어르신(집주인), 어르신의 친구와 며느리."

- 11공수여단이 가택수색을 진행했고 방 안에서도 그 낌새를 느꼈을 텐데.

"사격중지 소리를 듣고 이불에서 나와 방문의 해진 창호지 구멍으로 밖을 내다봤다. 민가 밑은 논이었고 당시 벼를 심지 않아 작년 벼를 베고 난 자리가 말라 있었는데 포탄이 떨어진 곳곳에 구덩이가 생겨 불타고 있었다. 그리고 군인들이 집을 에워싸는 중이었다. 순간 망설였다. 총을 꺼내려고 하자 이□□ 어르신이 '옆방에 아이들이 있으니 쏘지 말라. 지금 쏘면 여기 있는 사람 다 죽는다'고 그러셨다. 순간 정말 많이 고민했다."

- 결국 총을 쏘지 않았고 군인들에 의해 포위된 것인가.

"그렇다. 손들고 나오라고 하더라. 제가 가장 먼저 방문을 열었고 손을 든 채 한 발짝 밖으로 나갔다. 밖을 보는데 수십 명이 에워싸고 있었다. 예전 시골집엔 마루 아래 디딤돌이 있었다. 그 디딤돌을 딛는데 순간적으로 '먼저 나가면 죽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그 생각 때문에 1, 2초 망설이는데 김군이 손을 든 채 제 오른쪽으로 먼저 내려갔다. 저도 그 옆으로 내려갔고 박OO씨는 제 왼쪽 뒤편에 있었다. 그런데 부사관 한 명이 에워싼 특전사들 틈을 뚫고 와서 '뭐야 이 새끼는' 하면서 김군의 관자놀이를 바로 쏴버렸다. 망설이지도 않았다."

- 부사관으로 기억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V자 모양의) 갈매기 계급장이 보였다. 그 순간 '총알이 김군을 관통했으면 나도 죽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진 않았고 김군은 곧장 제 옆에서 푹 고꾸라졌다. 그리고 그 부사관이 바로 제 관자놀이에 총구를 들이댔다. 저는 한 발이 발사됐으니 총구가 뜨거울 줄 알았는데 그렇게까지 뜨겁진 않았다. 사람이 죽는다면 그 동안 살아온 과정이 순식간에 스쳐 지나간다고 들었는데 그러진 않았다. 그 순간 어느 대위가 포위를 뚫고 와서 '여기서 이러지 말라'고 그랬다."

- 부사관은 어떤 반응을 보였나.

"상관의 명령이니 더 이상 총을 쏘지 못한 것 같다."
 

영화 <송암동> 중 최진수씨의 증언을 토대로 한 부분. ⓒ 영화 <송암동>

 
- 김군 사망 후 곧장 끌려 나갔나.

"저와 박OO씨는 도롯가로 끌려 나왔다. 그곳에 재래식 화장실에 있던 최OO씨와 다른 곳에 숨었던 이OO씨도 끌려 나와 있더라. 하얀 포승줄로 포박당했고 엄청나게 맞았다. 개머리판으로, 군홧발로 찍어버리고 쓰러지면 깨워서 다시 때리고. 너무 심하게 맞으니 거듭 기절했다. 그러다 좀 조용하더니 고개를 들라고 하더라.

혼자 특전사복이 아닌 육군 옷을 입은 군인 한 명이 보였다. 위관급이었다. 사진기를 들었고 '정훈'이라고 적힌 군복을 입고 있었다. 우리가 피투성이니까 다른 군인을 시켜 물을 받아오게 하더라. 그걸로 얼굴의 핏자국만 대충 씻기고 사진을 계속 찍었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처박으라고 했고 또 구타당했다."

-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너무 정신이 없어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최소 1시간 이상이었다. 저희가 맞는 동안 헬기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는데 (11공수여단과 전투교육사령부 간의 오인교전으로 인해 발생한) 사망자와 중상자를 빨리 후송시키는 것 같았다. 그 시간이 꽤 길었다."

- 이후 어떻게 됐나.

"(오인교전으로 인해) 불탄 트럭들을 지나 야산으로 끌려갔다. 금당산이었다. 거기에서 저희를 죽이는 줄 알았다. 갑자기 고개를 들라고 하더라. 베레모를 쓰고 보잉 선글라스를 낀 별(장군)이 긴 지휘봉을 들고 있었다. 그 옆엔 키가 땅딸한 무궁화 세 개(대령)가 상황판을 들고 있었다. 무궁화 세 개가 '너 몇 살이냐'고 물어봐서 (한국식 나이 계산에 따라) 18살이라고 하면 죽일 거 같아서 '17살'이라고 답했다. 나중에 한참 지나고 되돌아보니 별은 정호용이었고 무궁화 세 개는 장세동이었다.

한참 뒤에 우리도 헬기를 탔다. 국군통합병원 헬기장에 내리니까 특전사들이 양쪽으로 도열했다. 100여 명이 50m 정도 줄지어 있었던 것 같다. 그 사이로 우리 4명을 통과시키더니 무자비하게 구타하더라. 이단옆차기를 날리고 쓰러지면 밟아버리고. (오인교전으로 인해) 자기 부대원들이 사망했으니 분풀이했던 것 같다. 이후 다시 머리를 처박고 있었는데 가랑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별생각을 다 했다."

"여전한 죄책감"

- 이후 수사가 시작됐나.

"505보안대를 거쳐 상무대에 들어갔다. 6월에 수사가 시작됐다. (효덕초 삼거리에서 우리가) 먼저 총을 쐈는지 추궁했다. 우리가 먼저 총을 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부인하니까 조지기 시작하더라. 고춧가루(를 이용한 고문)부터 해서 정말 많이 맞았다. 포승줄에 묶여 부대 내 식당으로 끌려가 곡괭이로 엄청나게 맞았다.

수사관들 입장에선 (오인교전으로 인해) 군인들이 상당히 사망했으니 우리가 먼저 총을 쏜 걸로 만들려는 것 같았다. 7월엔 송암동으로 현장검증도 나갔다. 우리가 숨었던 집의 이□□ 어르신에게 김군 시신의 행방을 물었다. 어르신은 '마을 주민들이 인근 금당산에 매장했는데 일주일 후 공수부대가 와서 안내했으며 그들이 파갔다'고 증언했다."

- 이후 어떻게 됐나.

"너무 많이 맞으니까 '방아쇠는 당겼는데 안전핀을 풀지 않아 발사가 안 됐다'고 허위로 진술했다. 7월 25일 구속영장이 떨어져 9월 3일까지 교도소에 있다가 11대 대통령 취임(전두환)으로 사면됐다. 상무대로 옮겨진 뒤 9월 5일 석방됐다."

- 위원회에선 '김군이 1963년생 자개공 김종철'이라고 발표했다. 그러면서 "현장에서 사살된 후 실종된 것으로 알려졌으나 연행되던 중 계엄군에 의해 사살됐다는 증언을 확보했다"고 덧붙였다.

"전혀 그렇지 않다. 저는 1989년 5공청문회 때부터 지금까지 일관되게 '이□□ 어르신 댁 마당에서 김군이 관자놀이에 총을 맞았다'고 진술해왔다. 위원회가 김종철의 검시조서라고 밝힌 '성명불상' 검시조서엔 사인이 '두부 타박'으로 나와 있다. 제 앞에서 고꾸라진 김군을 직접 목격했고 우측 관자놀이에 총을 맞았다고 30년 넘게 증언해 왔는데 두부 타박이 웬 말인가."
 

1980년 5월 24일 효덕동에서 숨진 '성명불상' 5.18 희생자의 검시조서. ⓒ 5.18전자자료총서

 
- 김군을 찾으려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에게 미안하다. 저 대신 죽었으니까. 여전히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

- 위원회의 발표를 보곤 어떤 생각이 들었나.

"너무 황당했다. 발표 당시 제 반박은 기사에 실어주지 않으니 신문광고까지 냈다. 제가 위원회로 김군을 찾아달라는 진정을 넣은 것인데, 지금까지 위원회로부터 조사의 진행 내용이나 그 결과에 대해 어떤 통지도 받지 못했다."

- 혹시나 김군의 사망 상황에 대해 착각하고 있을 가능성은 없나.

"전혀. 누구는 '세월이 흘러 기억이 왜곡·변질될 수 있다'고 하는데 죽는 날까지 제 증언은 바뀌지 않는다. 분명 제 앞에서 죽었고 한 발짝도 마당에서 이동한 바 없다. 1989년 광주 청문회, 그리고 청문회 직전 국회의원 지역구 의원실에서도 그렇게 진술했다.

저뿐만 아니고 제 뒤에 있던 박OO씨도 당시를 기억하고 있다. 뒤쪽에 있었던 탓에 잘 보이지 않았는지 '가슴에 맞았다'고 기억할 뿐 끌려가지 않고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고 말한다."
 

5.18 특집 - 송암동 ⓒ 봉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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