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눈에 선하게>
사이드웨이
이들은 더 나은 화면해설을 위해 시각장애인의 청취 의견을 수렴하고, 대본을 받은 직후엔 눈을 감고 영상을 감상하는 일부터 시작한다. 눈을 감고 보는 세계와 뜨고 보는 세계의 간극을 줄이고자 펜을 든다. "안 봐도 비디오!"라는 감탄이 나올 때까지 해설자의 책무에 집중한다.
우리의 일은 누군가 꼭 해야 하는 일입니다
초창기 화면해설작가들은 영상을 분석하고 원고를 쓰는 일뿐 아니라 성우가 되어 직접 녹음하는 일까지 맡았다고 한다. 2000년대 초반, 배리어프리(barrier free)에 대한 당국과 문화산업의 인식 수준이 얼마나 낮았는지 가늠되는 대목이다. 지금은 그나마 분업화가 이뤄졌지만 화면해설작가의 철야 작업은 여전히 고되다. 문제는 화면해설이 지속적이지 않다는 것.
밤새 정성을 다해 작업한 원고에 소리가 입혀지는 것도 찰나, 다음 회차에서 화면해설 제작이 이뤄지지 않아 청취자들의 '들을 권리'가 삭제되는 현실을 맞닥뜨린다고 한다. 방송사가 프로그램의 짝수 회차만 화면해설을 제작하는 통에 청취자들이 감상하지 못한 전 회차 줄거리를 요약해야 하나 난감했다는 일화는 화면해설의 목적이 무엇인지 독자에게 질문케 한다. 저자들의 성토를 빌리자면 "이 드라마를 보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
우리나라 방송사업자는 매해 화면해설 방송을 5~10% 의무적으로 편성해야 한다. 2021년 방송통신위원회는 '소외계층 미디어 포용 종합계획'을 발표하고 2025년까지 VOD, OTT도 화면해설 영상을 의무 제작하게 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연말이 되면 스리슬쩍 화면해설 제작을 중단했다가 새해에 다시 제작되는 일이 발생하는 게 현실이다. 국내에서 화면해설을 입힌 영상 콘텐츠가 적은 이유다.
명작이라고 회자되는 <나의 해방일지>, <우리들의 블루스> 등 좋아하는 드라마를 정주행하다가 단 한 회차, 최종회만 못 봤다고 가정해 보자. 미완의 콘텐츠 앞에서 대다수 시청자들은 분개할 것이다.
청취자인 시각장애인도 마찬가지다. 주인공이 갈등의 파고를 넘었는지 사랑하는 이와 화해했는지 알 길이 없게 된다. 우리는 이야기를 즐길 권리가 있다. 따라서 화면해설은 '청자가 존재하는' 서사의 완결을 위해 지속적으로 필요한 일이다. 한편, 작가들은 자신의 일에 대해 "좋은 일 하시네요"라는 무지한 반응도 바로 잡는다.
"좋은 일이라는 게 무엇일까. 선량한 일? 뜻깊은 일? 후라자면 가볍게 미소를 지어줄 수 있지만 전자를 포함한 말이라면 '아니'라고 답해주고 싶다. 더욱이 이 일은 누군가 '하면' 좋은 일도 아니다. 우리 일은 누군가는 꼭 해야 하는 일이다."
내 친구의 '인생 영화'가 갱신된다면
이 책은 사명감을 갖고 일하는 사람들의 직업 의식만 논하는 책이 아니다. 몰랐던 화면해설기술의 원칙과 청취자로서 시각장애인들이 어떤 바람을 갖고 있는지 살필 수 있는 정보가 풍부하다.
다섯 작가 중 한 명인 홍미정은 화면해설 원고를 쓸 때 주어를 문장의 맨 앞으로 배치하는 것을 권한다. 전체 문장에서 "행동하는 주체가 누구인지 청취자가 먼저 상상할 수 있게 한 다음, 그 사람이 아기도 업고, 아이의 손도 잡고, 머리에 광주리도 인 모습을 그릴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특히, 임현아의 일화는 화면해설작가의 바른 마음가짐이란 무엇인지 명징하게 보여준다. 그는 자신이 맡은 어린이 애니메이션의 해설 원고 중 5분 남짓한 로봇 변신 장면을 정확히 쓰고자 영상에 등장하는 로봇을 직접 사서 해부한다.
합체 시 로봇의 어떤 부분이 서로 만나 합체되는지 주도면밀하게 파악한 그는 "아이들이 내가 쓴 로봇 변신 화면해설을 들으며 마음껏 영상 속 장면을 상상하고 또래 아이들과 웃고 떠들며 이야기 나눌 수 있기를" 희망한다.
"자막을 어떻게 해설해 주는 게 좋냐고요? 저희에게 가장 좋은 건 TV를 보는 비시각장애인 가족이나 친구와 같은 타이밍에 웃는 거예요. 남들은 이미 다 웃었는데 자세한 해설을 듣다가 저만 한 박자 늦게 웃는다면 예능을 보는 의미가 없죠. 그렇지만 그렇게 딱딱 해설을 쓰는 게 쉽지는 않겠죠?"
쉽지 않음에도 계속 쓰겠다고, 들려주고자 하는 마음의 바탕에는 그들 곁에 한 친구가, 한 가족이, 한 이웃이 청취자로 살아가는 까닭일 것이다. 시각장애인이라는 단어 앞에 '청취자'라는 단어를 먼저 붙여보자. 당신이 접한 한 편의 이야기는 오늘 누군가가 절실히 듣고자 했던 한 편의 '사이다' 같은 휴식이자 긴요한 쓰임이 예정된 생활정보일 수 있다.
권리 주장 그만하라는 섣부른 편견을 꺼내기 전에 자생을 위한 삶의 기반을 이웃들에게 주었는지 먼저 질문해보자. 내 친구의 인생영화는 무엇일까. 내 친구가 최고로 뽑는, 꿀꿀한 하루를 쾌적하게 해준 최고 예능프로그램은 무엇일까. 그리하여 작가 임현아가 화면해설을 제작한 애니메이션을 본 어린이의 시점으로 가 본다.
"블랙 재규어의 몸통과 뒷다리는 썬더라이온의 왼발이 되고, 타이거볼트의 몸통과 뒷다리는 오른발이 된다." 그의 화면해설 중 한 문장이다. 합체하는 캐릭터들의 근사한 공생 장면을 귀로 그리며 오늘 한 어린이는 세상을 더욱 선명하게 마주할 것이다. 꿈을 그릴 것이다. 눈에 선하게. 구체적으로.
눈에 선하게 - 세상을 글로 그려내는 사람들, 화면해설작가
권성아, 김은주, 이진희, 임현아, 홍미정 (지은이), 사이드웨이(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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