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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미
[아랫목] '세상 빡세게' 일하는 스무 살에게도 취미가 있습니다
작가는 대학을 다니는 친구를 따라 그리스 비극을 다룬 스터디에 동석하기도 한다. '공부 꽤나 하는' 이질적인 세계에 관해 "생각보다 훨씬 기득권"이라고 솔직하게 말한다. 그 경험을 영화 <설국열차>의 세계관에 비유하기도 한다. "저게 하도 오래 닫혀 있으니까 이젠 벽처럼 느껴지기도 하는데, 실은 저것도 문이란 말이야!"라고 외치는 남궁민수(송강호 배우)의 대사를 복기하며 모종의 닫힌 사회적 문을 골똘히 탐구한다.
철학을 논하는 세계로 외출하고 돌아온 뒤 그는 땀내 나는 현실로 복귀한다. 동료와 전세 자금 대출과 적금 현황을 공유한다. 꼬박꼬박 집에 돈 부치는 선배와 자기 삶의 모양을 들여다본다. 돈을 벌기 위해 일찍 시작한 일의 세계에서 서로의 사정을 나누며 "돈이 전부가 아님"을 자각한다. 잃어버린 시간과 공허를 깨닫기도 한다. '자녀에게 돈을 부쳐달라고 하는 게 쉽지 않았을 거'라며 부모의 입장을 담담히 헤아리기도 한다.
열아홉 가을 무렵, 나는 입사한 회사에서 업무를 익히기 위해 퇴근 후 OJT일지(on-the-job training education journal, 하루 동안의 OJT교육내용을 기록한 문서. 교육 대상자의 성명과 소속, 직급 등을 정확히 기재하고 당일의 교육사항을 요약하여 간결하게 약술)를 들고 종종걸음으로 분주했다.
몇 개월간 아득해진 밤마다 집 대문을 열었다. 당시는 주5일제 시행이 정착되지 않았고 학교 필수 출석일을 채우는 조건으로 16일 동안 쉬는 날 없이 일했다. 열아홉 겨울, 방문을 잠그고 가족이 잠든 걸 확인한 후 목놓아 울었다. 명랑하고 시원하게.
어린 마음에도 그 모습을 들키면 부모의 마음이 무너질 거라고 확신했다. 눈을 꾹꾹 누르며 욕실로 직행한 날도, 월급을 항목별로 나누며 계산기를 두드리던 날에도 꼬박꼬박 삶의 유희를 찾았다. 메밀국수를 나눠 먹기도 하고 배낭여행도 떠났다.
작가는 일본 여행 기록을 책에 담았다. 도쿄의 꼬칫집에서 술잔을 기울였다. 청년의 삶엔 일만 있지 않았다. 작가는 일을 끝내고 노곤하게 밥상 위에 한숨을 내려놓는 이국의 풍경을 들여다본다. 사람이 사는 풍경에서 안심을 배운다.
[이부자리]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습니다
"가끔 동생이랑 이야기하다 보면, 오늘은 어디 공사현장에 다녀왔다, 저기 세워진 전봇대 내가 작업했다, 뿌듯하게 말할 때가 있어. 그러면 애틋한 마음이 드는데, 그게 참 싫어. 동생이 자기 일에 가지는 자부심을 나도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으면 좋겠어."
책 끄트머리, 친구 S가 작가에게 쓴 편지글 중 한 토막이다. 읽으면서 자랑스러워지는 사람들이 보였다. 월급통장 말고도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피면 일하는 사람의 흔적이 우리 삶 가까이 배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작가는 누군가를 호명하는 기쁨을 언제든 누릴 수 있음을 알려준다. 교복 위에 작업복을 입고도, 작업복 위에 교복을 입고도 누구든 힙해질 수 있다. 글을 쓸 때마다 타인에게 준 상처를 발견한다는 작가에게서 누군가의 명함과 이름이 빛나는 풍경을 본다. 열아홉 작은 사람의 시간을 담은 큰 일기에서 어쩌면 우리는 우리를 발견할 수 있다.
교복 위에 작업복을 입었다 - 경계의 시간, 이름 없는 시절의 이야기
허태준 (지은이), 호밀밭(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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