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1.01 12:16최종 업데이트 22.11.01 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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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농촌을 떠올렸을 때 갖게 되는 몇 가지 고정관념이 있다. 푸른 들판만 있을 것 같은 막연한 이미지, 영화 <리틀 포레스트>의 여유롭고 한적한 삶이 이어지리라는 기대 따위가 대표적이겠다.

여기에 여성이라면 어쩔 수 없는 농촌에 대한 고정관념이 있다. 삶의 터전으로 삼기엔 너무나 불편하고 불친절한 공간이리라는 생각이다. 생활편의시설 부족은 물론이고 "결혼은 안 해?" 같은, 여성에게 가해지는 한국사회 특유의 무례한 호기심과 간섭이 여전하기에 이는 일견 타당하고 현실이 그대로 반영된 고정관념이기도 하겠다.


약간 결이 다른 얘기이긴 하나, 여성 농민은 신우염 등 신장 질환에 쉽게 노출된다. 이들이 일하는 들판엔 화장실이 없기 때문에 발생하는 대표적인 여성농민 직업병 중 하나다. 아주 기본적인 생활시설이 설치되지 않았다는 것은 한편으론 한국 사회의 심각한 불균형을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하다.

하지만 과연 그런 모습만 있을까? 이런 고정관념이 농촌을 제대로 이해하는 데 장애물이 되고 있지는 않나? 그래서 여성들로 하여금 행복한 삶을 꾸려가는 또 하나의 선택지를 놓치게 하고 있지 않은가?
 

지난 9일 전북 순창군 시골언니들이 '시골언니 프로젝트' 홍보자료를 만들기 위해 사진촬영을 하고 있다. ⓒ 강민재

 
이런 고민에서 출발한 것이 농림축산식품부의 '시골언니 프로젝트'다. 정식 명칭은 '청년여성 농업농촌 탐색교육'인데, 각 지역에서 먼저 자리잡아 살아가고 있는 시골언니들이 호스트가 돼 진행하면서 시골언니 프로젝트라는 별명이 붙었다.

이 행사에는 전국 8개 지역에서 활동하는 시골언니들이 참여했다. 강원 강릉(생태전환마을 내일협동조합), 충남 서천(자연에서 찾은 행복), 전북 순창(10년후순창), 인천 강화(협동조합 청풍), 충북 제천(덕산누리협동조합), 울산 울주(울산생태문화교육협동조합), 경북 상주(청년이그린협동조합), 그리고 <월간 옥이네>를 만드는 충북 옥천의 고래실까지.

8개 운영기관이 지난 7월부터 각 지역과 그곳에서 살아가는 시골언니들의 특성을 반영한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10월 현재 거의 대부분의 지역에서 프로그램이 마무리됐고, 전북 순창이 11월 중으로 마칠 예정이다.

시골언니를 내세웠다는 점 뿐 아니라 각각의 지역에서 마련했다는 것 역시 그간의 귀농귀촌 프로그램과는 결이 달랐다. 기존의 남성·농업·중장년 중심의 내용에서 탈피해 시골언니만의 특별한 관점이 프로그램 전반에 자연스레 녹아들었다. 서는 곳이 다르면 보이는 풍경이 달라진다는 말처럼, '농촌에서 살아가는 여성'이라는 남다른 지위를 가진 이들이 보고 듣고 경험한 농촌이 프로그램에 반영될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어떤 지역은 퍼머컬쳐를, 또 어떤 곳은 농촌의 다양한 청년 활동을 소개하는가 하면, 세대를 넘나드는 농촌 여성과의 네트워크 형성, 지역 살이를 통한 스스로의 삶 성찰 등 각양각색의 프로그램이 탄생했다. 그 속에는 농촌 풍경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내 몸의 소리를 듣는 치유의 시간부터 농촌에서 살아가려면 어떤 경험과 준비가 필요한지를 알아보는 실용적인 시간도 포함됐다.

옥천은 '여성 로컬미디어주간'이라는 제목으로 그간의 미디어에서는 볼 수 없던 농촌 속 사람과 이야기를 만나고, 로컬 미디어가 지역 공동체 형성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살펴봤다. 이를 통해 친환경 농업 운동가와 토종씨앗을 지키는 여성 농민, 타국에서 시집와 농촌의 가부장제와 싸우는 이주여성, 나고 자란 지역에서 의미 있는 공동체 활동을 만들어 가는 청년 여성 등 몰랐던 농촌의 이면을 마음껏 경험했다.

"전에는 농촌이라고 하면 막연히 고리타분할 것 같아 거부감이 들었는데 이제는 농촌에 대한 호기심, 어떤 기대감 같은 게 많이 생겼어요. 여기는 어떤 사람들이 살까, 또 어떤 새로운 이야기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옥천에서 만난 사람들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왠지 모르게 가슴이 뜨거워지는 기분이에요. 동시에 이런 사람들이 옥천뿐 아니라 전국 어디든 있다는 이야기가 인상 깊었어요. 어려움이 있을 때 피하기보다 그걸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온 사람들, 그런 분들을 제가 사는 지역에서도 만나보고 싶어요. 제가 지역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뭐가 있을지 찾아보려고요."
 

옥천 여성 로컬미디어주간 참가자들의 말이다. 이들의 이야기는 이번 프로젝트가 단순히 농촌의 즐거움을 경험한 데 그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농촌과 농촌 사람에 대한 이해의 세계로 한 걸음 나아갔음을, 더불어 각자의 시각이 넓어지고 관점이 달라졌음을 말해준다. 
 

옥천에선 시골언니 프로젝트 '여성 미디어 주간'을 진행했다. ⓒ 박누리

 

옥천에선 시골언니 프로젝트 '여성 미디어 주간'을 진행했다. ⓒ 박누리

    
농촌 여성의 재발견

긍정적인 변화는 여기 또 있다. 시골언니 프로젝트에 참여한 농촌 여성들이 스스로의 존재를 재확인하게 됐다는 것이다. 취재를 하다 보면 농촌 여성들에게서 가장 많이 듣게 되는 말가 있는데, "내 이야기가 뭐라고 들어, 아무 것도 없구만" 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농촌 사회는 여성 없이 돌아갈 수 없다(이게 어디 농촌 사회에만 국한된 것이겠냐만은). 하다 못해 마을 회의 하나를 해도 여성이 없다면 제대로 진행되기 어려운 게 농촌 사회다. 지역 온갖 축제나 행사에서 무대에 서고 마이크를 드는 것은 대부분 정장을 빼입은 남성들이지만, 무대 뒤에서 온전히 일이 진행되도록 진땀을 빼는 이들은 여성들이다.

그러나 마이크를 들 기회도, 자신의 이야기를 공식적으로 발화할 자리도 없던 농촌 여성들이었기에 자신의 일에 대한 외부의 인정을 경험해 볼 시간도 많지 않았다.

반면 시골언니 프로젝트는 도시의 2030 청년 여성과 농촌 여성의 만남을 통해, 농촌 여성 스스로의 존재를 긍정적으로 재인식하는 시간이었다. 도시 언니에게는 보이지 않던 가려진 농촌 여성을 만나게 되는 자리, 그래서 농촌 사회에도 비빌 언덕이 될 언니들이 많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한편 농촌 여성에게는 내 삶의 굴곡을 이해하고 내 일을 인정해주는 여성이 다른 지역에 있다는 응원을 전하는 자리였던 것이다.

시골언니 프로젝트, 전과 후

물론, 그래도 여전히 "시집 안 가냐"는 동네 어르신들의 말은 즐겁지 않다. 그러나 이 선을 넘는 관심이 때로는 내 안전과 건강을 염려하는 마음에서 기인하기도 한다는 것을, 시골언니 프로젝트 후의 우리는 조금 더 이해할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됐다. 때때로 이해되지 않는 농촌 사람들의 방식이 이곳에서 오래도록 고군분투한 결과라는 것도, 그에 대한 존중의 태도가 서로를 이해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데 조금 더 도움이 된다는 깨달음도 함께 말이다.

시골언니, 그리고 도시언니들의 앞날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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