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프로야구 최초의 은퇴식1989년 8월 17일 잠실 롯데전 6회말 4번 지명타자로 출전한 윤동균이 김시진의 공을 때려 2루타를 기록하자 경기가 잠시 중단되었고 윤동균의 은퇴식이 거행되었다. 윤동균은 프로야구 최초의 은퇴식을 치렀고, 2번째 영구결번의 주인공이 되었으며, 최초의 프로선수출신 감독이 되는 영예를 누렸다.
두산 베어스
그리고 윤동균은 선수 겸 감독으로 활약한 백인천을 제외하면 프로야구 창설 시점에서 6개 구단을 통틀어 가장 나이가 많은 선수였고, 그 자격으로 1982년 3월 27일 출범식에서 선수단을 대표해 선서를 한 인물이기도 했다. 공교롭게도 그 해 타격 1위는 .412의 역사적인 타율을 기록한 40세의 백인천이었고 33세의 윤동균은 .342를 기록해 2위에 오르며 나란히 '나잇값'을 했다. 그는 1987년까지 꾸준히 중심타자로 활약하며 노련함과 성실함을 무기로 훌륭한 성적을 거두었을 뿐 아니라 나이 차이가 많지 않던 코칭스태프와 어린 후배들 사이를 잇는 형님으로서 리더십을 발휘해 베어스가 1980년대 내내 꾸준히 강팀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크게 기여하기도 했다.
그런 윤동균을 위해 OB 베어스는 1989년 한국 프로야구 역사의 첫 번째 은퇴식을 마련해주었고 동시에 그의 등번호 10번을 구단의 두 번째 영구결번으로 선정했으며, 2년 뒤인 1991년 말에는 또다시 한국 프로야구 최초의 선수 출신 감독으로 선임하는 기록을 만들기도 했다. 선수 인생 내내 정상급 활약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개인타이틀은 단 한 개도 얻어보지 못했던 것과는 대조적인 영광이, 은퇴 후에 겹쳐서 찾아왔던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영구결번의 역사에서 두 선수는 예외로 취급되는 경우가 많다. 김영신은 그 이후의 모든 사례와 달리 '애도와 추모'의 의미였다는 점 때문이며, 윤동균은 얼마 뒤 '영구결번 해제'라는 조치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감독으로서 2년차를 맞이하던 1993년을 앞두고 벌어진 스카우트 전쟁에서 신일고의 천재 좌타자 강혁을 영입하기 위해 윤동균은 역대 최고액의 계약금에 더해 이미 영구결번된 자신의 등번호 10번을 얹어주겠다고 선언하며 영구결번 해제를 자청했다. 결국 강혁이 우여곡절 끝에 한양대에 입학하면서 그의 등번호를 이어받을 주인공은 나타나지 않았지만, 말이 씨가 되어 이듬해인 1994년 시즌 중에 벌어진 항명파동으로 윤동균 감독이 불명예퇴진하면서 영구결번 해제는 결국 실행되어버리게 된다. 그의 '사상 최초' 기록에 '영구결번 해제'라는 민망한 항목마저 추가된 사연이다.
비우는 미국, 이어받는 일본
김영신과 윤동균의 사례는 흔히 초창기, 특히 OB 베어스가 가지고 있던 한국 프로야구의 역사에 대한 얕은 인식의 단면으로 언급되곤 한다. 한국 프로야구가 성공적으로 정착하고 꾸준히 성장해나갈 것이라는 미래에 대한 장기적인 안목이 부족해 섣부른 결정과 해제가 반복되었다는 인식이다.
하지만 은퇴한 선수의 등번호에 대한 한국 야구의 인식이 변화해온 과정에 대한 이해가 반영된다면, 조금 달리 평가될 수도 있다. 미국과 일본의 야구문화가 다르고, 문화적으로 일본 야구에 좀더 가깝던 한국 야구가 점차 미국 쪽으로 이동하면서 생긴 변화가 영구결번이라는 제도에 관한 인식에서도 나타났기 때문이다.
미국에서는 1939년 뉴욕 양키스가 4번 타자임을 표시하기 위해 달기 시작했던 루 게릭의 등번호 4번을 이후 누구에게도 달아주지 않기로 결정한 것을 시작으로 구단마다 많게는 20명이 넘는 선수, 감독, 때로는 구단주나 팬(들)의 등번호를 비워갔고, 그 수를 모두 합치면 120여 명에 이른다. 반면 일본에서는 영구결번자의 수가 20명도 안 되는데 프로야구의 역사가 미국에 비해 70여 년 짧은 것을 감안하더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적다.
미국 야구에서 위대한 선수를 기억하는 방법으로 '그 선수의 등번호를 비우는 것'이 주로 활용된다면, 일본 야구에서는 반대로 '그 선수의 등번호를 이어받는 것'이 익숙하기 때문이다. 1944년에 전사한 사와무라 에이지의 14번과 1947년에 장티푸스로 사망한 쿠로사와 토시오의 4번이 한국에서와 비슷한 '추모'의 의미로 영구결번된 것을 시작으로 카와카미 테츠루, 가네다 마사이치, 나가시마 시게오, 오 사다하루 등 초창기 전설적 스타플레이어들의 등번호들이 영구결번되기도 했지만 오릭스 버팔로스가 팀의 1번 타자들에게 한큐 시절의 전설적 도루왕 후쿠모토 유타카의 7번을 부여하는 것처럼 위대한 선수의 번호를 계승하며 기억하는 경우도 흔하다.
야쿠르트 스왈로즈는 팀을 대표하는 간판타자들이 1번을 물려받게 하고 있으며 각 팀의 명포수들이 달아왔고 역대 최고의 공격형 포수로서 '미스터 스왈로즈'라고 불린 후루타 아츠야도 달았던 27번 역시 그에 버금가는 후배 포수들의 것으로 정해 남겨두고 있다. 도이 쇼조와 시노즈카 카츠노리부터 사카모토 하야토에 이르기까지 요미우리 자이언츠 내야 수비의 리더들이 6번을 이어가는 것이나 호크스가 전설적인 포수 노무라 가쓰야의 19번을 아끼고 아낀 끝에 '제 2의 노무라'로 기대받고 있는 카이 타구야에게 물려준 것도 비슷한 일이다.
왼손 강타자의 10번과 왼손 강속구 투수의 47번
1980년대와 90년대 한국 프로야구에서도 많은 선수들이 존경하는 선수의 등번호를 달고 싶어했다. 윤동균과 장효조, 김기태, 이정훈, 양준혁으로 이어지는 왼손 강타자들의 번호는 10번이었는데 일본 프로야구에서 통산 3000안타를 기록한 장훈을 존경하고 따르는 의미였다.
그리고 '가을까치' 김정수를 시작으로 이상훈, 이승호, 권혁, 나성범과 김범수 등에 이르는 왼손잡이 강속구 투수들의 47번은 미국의 톰 글래빈과 일본의 쿠도 기미야스의 번호이기도 했다. 물론 한국의 젊은 선수들 중에는 글래빈과 쿠도가 아닌 이상훈을 바라보며 47번을 선택한 경우가 적지 않다. 그 외에 일본에서 1번 타자의 상징으로 통하는 등번호 7번은 1번 타자이자 유격수로서 한 시대를 풍미한 김재박을 통해 유격수의 상징으로 변해 이종범, 박진만, 김상수, 김하성으로 이어지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