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재원은 활동가가 되기 전까지 자칭 ‘착한 장애인’으로 살았다. 지난해 9월 서울대 행정대학원 석사과정 졸업식때 아내 이가연씨와 함께.
변재원
인터뷰로 처음 만난 사람한테 다짜고짜 내밀한 개인사부터 묻는 건 실례다. 무례한 일이기도 하거니와 그렇게 해선 진솔하고 깊이 있는 답변을 끌어내기 힘들다. 처음에는 가벼운 농담이나 신변잡기로 시작해서 근황에 대한 이야기를 거쳐 삶의 이력으로 넘어가는 게 내가 아는 인터뷰의 정석이다.
그런데 변재원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정책국장의 경우는 달랐다. 어쩌다 보니 자리에 앉은 지 5분도 지나지 않아 그의 장애와 결혼에 대한 이야기가 펼쳐졌다. 내가 질문을 던지고 그가 응답을 하는 방식이라기보다는 그의 스토리텔링에 내가 취하듯 빨려 들어간 셈이다.
발단은 내가 "집이 여기서 가까운가요?"라고 물은 것이었는데, 운이 좋아 전셋값이 폭등하기 직전 대출 잔뜩 끼고 안성맞춤의 전셋집을 구한 얘기가 일사천리로 이어졌다. 그는 쾌활한 재담꾼이었다.
"홍제동에 방 두 개 딸린 셋집에서 짝꿍이랑 살아요."
'짝꿍'이란 말에 나도 모르게 눈이 휘둥그레졌나 보다. "일찍 결혼한 편이죠." 그가 빙그레 웃으며 덧붙였다.
변재원은 1993년생, 28살의 젊은 활동가다. 생후 10개월 만에 의료사고로 척수장애인이 됐다. 신장 140cm에 척추는 45도 휘어졌고 왼쪽 다리는 앙상하게 굽어서 땅을 딛지 못한다. 설상가상 몇 년 전 교통사고를 당해 끊임없는 통증이 그를 엄습한다. 그래도 그는 늘 유쾌하고 기발하다. 장애인 친구들과 강남의 유명 클럽을 찾아 목발을 흔들고 전동휠체어의 전조등을 반짝이며 클러버들과 어울려 논 '장애인의 옥타곤 클럽 체험기'를 써서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 활동가로 일하기 시작한 건 지난해 2월부터다. 그 이전까지 그는 '착한 장애인'으로 살아왔다고 했다. 제주도에서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검정고시를 거쳐 2012년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입학해 예술경영학을 전공했다. 구글코리아에서 인턴사원으로 근무했고 서울대 행정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고학력 연구자인 그가 최저시급을 받는 장애인 활동가가 된 동기는 무엇인지, 지금 전장연에서 벌이는 탈시설운동은 그에게 어떤 의미인지, 청년활동가 변재원이 꿈꾸는 미래는 무엇인지... 나는 제법 긴 질문지를 준비해 갔지만 이미 시작된 이야기의 흐름을 바꾸고 싶지는 않았다. 말 나온 김에 20대 장애인 변재원의 결혼 이야기를 더 듣고 싶었다.
장인의 가르침 "가짜로 살지 말아라"
- 결혼은 언제 하신 거예요?
"2016년 7월이요. 5년 전이죠. (웃음)"
아내와 처음 만난 건 2014년 인턴을 하던 직장에서였다. 네덜란드에서 유럽법을 전공한 아내는 서울대 교환학생으로 와서 공익인권법재단 '공감'에 인턴으로 들어왔고 변재원도 같은 시기 장애인권 관련 인턴으로 들어갔다. 6개월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두 사람은 운명처럼 사랑에 빠졌다.
2년 뒤인 2016년 여름 두 사람은 양가의 축복 속에 결혼했다. 귀국한 뒤 고려대 대학원에서 헌법학을 전공한 아내 이가연씨는 지금, 진보적인 장애인 인터넷신문 <비마이너> 기자로 일하고 있다. 박봉이지만 둘이 함께 장애인운동을 하는 것도, 같은 건물에 사무실이 있어 매일 아침 함께 출근하는 것도 이들 부부에겐 큰 기쁨이다.
- 실례되는 질문인데 결혼할 때 처가에서 반대는 없었나요?
"중요한 질문이죠. 한국사회에서 비장애 여성이 장애인 남성과 결혼한다고 하면 대개는 당황스러워하시니까요. 근데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저만 그 걱정을 한 셈이었고요, 장인 장모님은 전혀 거리낌이 없으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