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벗어날 탈 脫> 포스터

영화 <벗어날 탈 脫> 포스터 ⓒ 씨네소파

 
마침내 돌아갈 것이 삶이다. 이 땅에 태어난 인간 가운데 죽음을 피한 이가 없었고, 영원히 생명을 유지한 이 또한 없었다. 아무리 승하는 기운일지라도 언젠가는 쇠하고, 마침내 나기 전의 없음으로 돌아갈 것이 정해진 법칙이다.
 
그러나 죽음은 여전히 두려운 것이다. 물에 빠져 허우적대는 이처럼 주변의 모든 것을 움켜쥐려 안달하는 것이 보통의 삶이다. 이승에서 저승으로 무엇 하나 가져갈 수 없음을 알면서도 단 하나라도 더 움켜쥐려 안달하는 건 그저 존재의 어리석음 때문일까.
 
삶의 덧없음을 알면서도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은 이전에도 수없이 많았다. 그들 가운데 깨달음을 얻고 자유로워졌다 주장하는 몇몇이 있었으니 사람들은 그들을 중심으로 종교를 이루어 그 가르침을 오늘까지 전한다.
 
이미 한국에서 대중적인 종교를 이루었다 해도 좋을 불교는 그 대표주자 가운데 하나다. 삶과 죽음, 욕망과 깨달음, 관계와 벗어남에 대하여 일찍이 이보다 많은 고민을 거듭한 종교가 따로 없었을 정도다.
 
 영화 <벗어날 탈 脫> 스틸컷

영화 <벗어날 탈 脫> 스틸컷 ⓒ 씨네소파

 
불교적 상징들과 만나다
 
쌓이면 마침내 흘러서 나오는 것이 세상의 이치다. 불교적 깨달음이 한 편의 영화로 탄생할 때도 없지 않으니, 제목부터 그 흔적을 알도록 하는 <벗어날 탈 脫>도 그와 같은 영화다. <허공꽃> <선잠> <탈날 탈> 등의 단편을 연출한 서보형의 첫 장편으로, 생의 여러 번잡한 것들로부터 벗어나려 애쓰는 남녀의 이야기를 다뤘다.
 
영화는 시작과 함께 구도하는 한 사내의 모습을 비춘다. 벽에 대고 절을 하고 정좌하여 명상한다. 그의 이름은 영목(임호준 분), 애인을 떠나 작은 아파트에 들어와 좌선 수련에 매진 중이다. 집중에 집중을 더하지만 어디선가 걸려오는 전화 소리가 그를 방해한다. 들려오는 목소리는 다름 아닌 애인이다.
 
이렇다 할 말 한마디 없이 훌쩍 저를 떠난 사내를 그녀는 비난한다. 현실에 집중하지 못하고 관념에만 붙들려 있는 사내를 여자는 이해할 수 없었다. 하물며 이불 하나 달랑 들고 집을 떠나니 이토록 무책임한 관계 맺음에 여자는 화를 참지 못하는 것이다. 다른 여자가 생긴 거라면 이해할 테니 말을 해달라는 그녀의 목소리는 저대로 절박하지만, 구도의 길에 접어든 사내에겐 닿을 수 없는 것이다.
 
 영화 <벗어날 탈 脫> 스틸컷

영화 <벗어날 탈 脫> 스틸컷 ⓒ 씨네소파

 
태우고 비워야 마주하는 꽃
 
108배를 하고, 명상을 하고, 아파트 주변을 걷고, 온갖 불교서적들을 들춰보는 것이 사내의 일상이다. 그러던 중 단지 내 나뭇가지 그득 쌓인 공간에서 사내는 깨달음의 실마리를 만난다. 나뭇가지 가운데서 무언가 타는 듯한 소리를 들은 그가 다가가 나뭇가지를 헤치자, 그 안에 나무 한 그루가 있고 다시 뻗은 가지 위에 한 송이 붉은 꽃을 만난 것이다. 새빨간 꽃은 일순 사라지고, 집에 돌아와 펼친 책 가운데 '해탈'이란 제목의 시 한 수와 만난다.

불 속에 옮겨 심은 그림자 없는 나무, 봄비조차 필요치 않고 붉은 꽃을 어지러이 피운다는 이 시의 구절이 곧 사내의 구도행과 긴밀히 맞닿는다. 빨간 꽃을 어떠한 깨달음이라 한다면 그 깨달음은 스스로를 태워 없애는 불길 속에서 피어난다는 것일까. 갈수록 '없음'을 향해 침잠해 들어가는 사내의 구도는 어느 순간부터 붉은 옷을 입은 여인의 환상과 맞물리며 영화에 미스터리적 분위기를 가미한다.
 
사내에 대응하는 저편엔 한 여인이 있다. 애니메이터인 그녀의 이름은 지우(위지원 분), 거듭하여 떠오르는 한 남자의 잔상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중이다. 옛 연인에게 온 소포를 받아 들고, 그 안에 담긴 편지와 사진 따위를 아무렇지 않게 태우는 그녀지만 유독 한 남자의 모습은 지우기가 어렵다. 오래전 프랑스 니스 해변에서 찍은 한 장 사진 속, 제 프레임에 담겨든 사내는 그 해변에서 죽은 채로 발견되었다던가.
 
 영화 <벗어날 탈 脫> 스틸컷

영화 <벗어날 탈 脫> 스틸컷 ⓒ 씨네소파

 
비워내는 남자, 채워내는 여자
 
거듭하여 끝으로부터 도망치려 드는 지우의 이야기와 저를 없애는 구도에 나선 영목의 이야기를 교차하며 영화는 조금씩 제가 하려는 이야기에 다가선다.
 
모호하면서도 은근한 상징들이 나름의 힘을 발하는 영화다. 모든 것을 멈춤과 없음으로 돌리려는 이와, 마침내 일어나 멈춰버린 것을 되살리려는 이 사이를 수시로 오가며 무엇이 깨달음인지를 묻는다. 마치 선문답을 보는 듯, 명확하지 않아서 난해한 인상이 적지 않으나 그것이 또 그대로 영화적 재미를 준다.
 
결국 생이 그러하듯 관객은 각자의 방식으로 영화와 마주한다. 한 줌 의미조차 없어 보이는 삶 가운데 나름의 의미를 거듭하여 발굴하듯, 영화의 온갖 상징들에 나름의 의미를 부여하게 되는 것이다. 누군가는 비우려 하고, 누군가는 세우려 한다. 그중 무엇도 섣불리 틀렸다고 할 수 없는 것은 영화 또한 삶과 마찬가지라 하겠다.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얼룩소(https://alook.so/users/LZt0JM)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벗어날탈脫 씨네소파 서보형 임호준 김성호의씨네만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