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그날들> 포스터어느덧 10주년을 맞이한 뮤지컬 <그날들>이 유준상, 오만석, 오종혁, 김지현 등 화려한 출연진과 함께 돌아왔다. 서울 공연을 성황리에 마친 <그날들>은 연말까지 지방 공연을 이어간다.
인사이트엔터테인먼트
'가객' 김광석의 노래들로 만들어진 주크박스 뮤지컬 <그날들>이 어느덧 10주년을 맞이했다. 지난 7월부터 9월까지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서울 공연을 성황리에 마친 <그날들>은 안성(10/6~7)과 대구(10/13~15)를 거쳐 강릉(10/27~29), 대전(11/17~19), 수원(11/25~26), 고양(12/22~24), 세종(12/30~31)까지 지방공연을 앞두고 있다.
<그날들>은 1992년과 2012년, 20년의 간격을 두고 청와대 경호실에서 벌어지는 유사한 두 사건을 교차하여 보여준다. '그날들', '서른 즈음에', '사랑했지만',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 등 김광석이 부른 노래들을 통해 이야기를 전달한다.
원칙을 철저히 지키는 경호원 '차정학' 역엔 유준상, 이건명, 오만석, 엄기준이, 정학의 동기 '강무영' 역엔 오종혁, 지창욱, 김건우, 영재가, 피경호인 '그녀' 역엔 김지현, 최서연, 제이민, 효은이 각각 캐스팅됐다. 이외에도 서현철, 이정열, 고창석, 김산호, 박정표, 손우민, 이정화 등이 출연진에 이름을 올렸다.
무력한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것
1992년 갓 청와대 경호원이 된 '정학'과 '무영'에게 '그녀'를 경호하라는 명령이 떨어진다. '그녀'는 한중 수교 당시 통역을 맡았던 인물로, 행사가 끝날 때까지 청와대의 한 건물에서 지내게 된 것. 그러나 안기부가 한중 수교 회담 당시 오갔던 말들을 알고 있는 '그녀'를 제거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이 사실을 '정학'과 '무영'이 알게 된다.
그런 시대였다. 시대가 개인을 무력하게 만들었고, '정학'은 그 상징적인 인물이다. 이때 '정학'과 '무영'이 할 수 있는 건 무엇이었을까? '무영'은 '그녀'를 데리고 도망가는 것을 택했다. 상황으로부터 회피한 것이다. '정학'은 그런 '무영'을 바라보고만 있다.
'정학'이 도망가는 '무영'과 '그녀'를 바라보는 장면은 회전무대를 통해 구현된다. 회전무대는 원을 그리며 돌아가고, 회전무대 주변에서 안기부 직원들과 청와대 경호원들이 급박하게 움직인다. 이때 '정학'은 돌아가는 회전무대 한가운데 덩그러니 서있다. '정학'은 그저 바라보기만 할 뿐, 주체적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시대 앞에 무력해진 개인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 같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정학'이 움직인다. 회전무대를 가로질러 앞으로 나오는데, 이때 '정학'은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넘버 '그날들').
"잊어야 한다면 잊혀지면 좋겠어. 부질없는 아픔과 이별할 수 있도록."
'무영'이 회피를 택했다면, '정학'은 망각을 택했다. 시대 앞에 무력한 개인에게 선택지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아주 쉽게 잊을 수 있어", 과연 그런가
자신들에게 어떤 일이 닥쳐올지 아직 알지 못했던 '정학'과 '무영'은 넘버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마'를 노래한다.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마. 추억은 그렇게 잊혀지면 돼.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마. 어린아이들의 가벼운 웃음처럼
아주 쉽게, 아주 쉽게 잊을 수 있어."
이후 일련의 사건이 벌어지고 앞서 말했듯 '정학'은 망각을 선택한다. 이때 '정학'이 "잊혀지면 좋겠어"라고 노래할 때, 나는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마'를 노래하던 이들의 과거가 떠올랐다. 그리고 생각했다. "잊혀지면 좋겠"다던 그날의 기억은 과연 "아주 쉽게 잊을 수 있"는 것이던가? 이 질문은 공연 내내 이어졌다.
동료와 피경호인을 놓친 '정학'은 좌천된다. 어느 날, 좌천된 '정학'에게 청와대에서 대통령의 식사를 담당하던 '운영관'이 찾아오고, 그는 '정학'에게 청와대로 다시 돌아오라며 자신의 이야기를 전한다. '운영관'은 자신의 아픈 과거를 이야기하며 잊으려 했는데 잘 안 된다고, 어떻게 잊겠냐고 덤덤하게 이야기한다(넘버 '서른 즈음에').
2012년 청와대로 돌아온 '정학'은 경호인과 피경호인이 함께 사라지는 사건을 겪게 되고, 1992년 '무영'과 '그녀'가 함께 사라졌던 그날을 기억한다. 그런 '정학'은 어쩌다 '무영'이 남긴 편지를 줍게 되고, 곧이어 '무영'의 환영이 나타난다. "너를 정말 미워했다"는 '정학'의 말에 '무영'은 "살려고 그랬겠지"라며 되레 '정학'을 위로한다.
20년 전 모습 그대로 나타난 '무영'과 마지막 인사를 나눈 '정학'은 다시 살아난 그날의 기억을 안고 청와대로 복귀한다. 다시 질문해본다. "잊혀지면 좋겠"다던 그날의 기억은 과연 "아주 쉽게 잊을 수 있"는 것이던가? <그날들>의 마지막 넘버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는 이 문제를 풀 수 있는 약간의 힌트를 주는 듯하다.
"잊혀져 간 꿈들을 다시 만나고파.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