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히 60년을 이어온 BBC 드라마 <닥터 후>는 그 긴 역사에서 여러 차례 위기를 맞았다. 그중 손꼽는 것은 스스로가 묶어온 매듭을 풀어야 할 때였다. 그 매듭들이 시리즈를 이끈 동력이기도 했으므로, 쉽게 접근해서는 안 되는 문제이기도 했다.
 
시간여행에 따르는 수많은 금기들과 닥터 스스로가 만들어온 원칙들이 대표적이다. 오랜 시리즈 가운데 가능한 것과 가능하지 않은 것을 구분해온 엄격함은 이 시리즈가 되는대로 만들어진 드라마가 아니란 사실을 증명했다. 하나의 우주엔 하나의 시간선이 존재하고, 그리하여 자신들의 과거며 미래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원칙이 특히 그러했다. 언제고 있을 일이지만 제 죽음을 마주하는 것과 같은 것 또한 금기시되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이러한 매듭들이 불편해질 때가 온다. 오래 신은 신발이 작아졌을 때처럼 더 나아지기 위해 과감히 벗어던져야 할 때가 있는 것이다.
 
닥터 후: 닥터의 시간 포스터

▲ 닥터 후: 닥터의 시간 포스터 ⓒ BBC

 
모든 목숨을 다 썼을 때
 
오리지널 시리즈부터 뉴 시즌, 나아가 지난 스페셜에 등장한 전쟁의 닥터에 이르기까지 <닥터 후: 닥터의 시간> 앞엔 현 닥터(맷 스미스 분)를 포함해 모두 12명의 닥터가 있었다. 닥터의 종족인 타임로드라고 해서 무한한 생명력이 있는 것은 아니다. 모든 에너지엔 한계가 있고 질서에서 무질서로 흐르는 에너지의 법칙은 무한한 시간을 허락하지 않는다.
 
<닥터의 시간>에서 아주 오랜 시간을 보낸 뒤 늙어버린 닥터는 제게 더 이상 재생성(정체성을 유지한 채 새로운 몸으로 갈아입는 타임로드의 고유 능력)을 할 능력이 없음을 고백한다. 바야흐로 반세기를 이어온 드라마 주인공의 최후를 짐작하게 하는 말이다. 그 역시 유한한 에너지를 가진 생명체로, 이번이 그 마지막이라는 인식은 그전 시리즈를 통해 수차례 예고된 것이기도 했다.
 
뉴 시즌 5부터 시리즈를 이어받은 수석작가 스티븐 모팻은 이 문제를 풀어야만 했다. 역대 가장 큰 규모로 성장한 시리즈를 흐지부지 끝낼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무명의 배우에서 일약 세계적인 지명도를 얻은 맷 스미스의 계약 또한 갱신하지 않기를 선택했다. 한계에 다다른 생명을, 이 드라마의 정체성을 깨면서까지 이어갈 수 있느냐는 기로에 몰려 그는 어떤 선택을 내려야만 했다.
 
닥터 후: 닥터의 시간 스틸컷

▲ 닥터 후: 닥터의 시간 스틸컷 ⓒ BBC

 
닥터의 죽음, 새로운 시작
 
<닥터의 시간>은 시작부터 닥터의 죽음을 예고한다. 앞선 시리즈에서 닥터는 자신이 묻히게 되는 행성의 이름이 '트란잘로어'라는 사실을 안다. 그리고 뉴 시즌 7 뒤 나온 스페셜 회차에서 그를 트란잘로어에 데려다 놓는다. 제 끝으로 예정된 곳에서 벗어날 길 없는 싸움을 벌여야 하는 닥터의 모습이 이 스페셜 회차 동안 거듭된다. 컴패니언인 클라라(제나 콜먼 분)를 런던의 집으로 돌려놓은 뒤 홀로 이 행성에 남아 수백 년의 시간을 저를 증오하는 달렉에 맞서 싸움을 벌인다.
 
뉴 시즌 5부터 뉴 시즌 7까지 긴 시간을 채워온 11대 닥터다. 그의 예고된 종말을 드라마는 최대한의 화려함으로 꾸민다. 이제껏 등장했던 수많은 악당들, 즉 달렉과 사이버맨, 우는 천사, 사일런스 등 수두룩한 강적들이 총동원된다. 지루함을 참지 못하던 그가 홀로 1000년 가까운 시간을 이 춥고 적막한 행성에서 싸워나가야 할 만큼 사태는 급박하게 흘러간다. 그 시간 동안 닥터가 멀리 도망치게 한 인간 클라라는 단 두 차례 이곳을 방문하게 될 뿐이다. 그때마다 비춰지는 닥터의 모습은 눈에 띄게 늙고 쇠약해져 있다.
 
모팻은 이 회차에서 다시 한 번 닥터를 살려낸다. 11대 닥터의 몸, 그러니까 맷 스미스를 없애며 그 다음 닥터를 맞이하는 것이다. 주어진 재생성의 한계를 넘는 계기를 마련하고 저를 위기로 몰아넣던 달렉을 싹 쓸어버리는 역전의 이야기를 써내려간다. 말하자면 이 행성에 갇혀 무려 1000년 가까이나 공격을 받던 기나긴 전쟁을 마침내 닥터의 승리로 귀결시키는 것인데, 이것이 뉴 시즌 7과 다음 있을 뉴 시즌 8의 세계관과 맞물리게 되니 드라마는 다시 수십 년을 이어갈 수 있는 동력을 얻는 것이다.
 
닥터 후: 닥터의 시간 스틸컷

▲ 닥터 후: 닥터의 시간 스틸컷 ⓒ BBC

 
끝내 남아 기억되는 것, 캐릭터
 
<닥터의 시간>은 영국에서만 35%가 넘는 시청률을 기록했다. 향후 있었던 시청자수 조사에선 1100만 명이 넘는 사람이 이 시리즈를 동시 시청한 것으로 평가됐다. 그로부터 각종 OTT 서비스를 통해 꾸준한 시청자가 유입되는 에피소드가 되었으니 세상에 이토록 큰 관심을 받은 드라마도 많지는 않을 것이다. 이 회차는 <닥터 후> 역사상 가장 많은 인기를 누린 배우 맷 스미스의 하차가 이뤄진 편이자 새로운 닥터들의 고생길이 열리는 회차이기도 하다. 가위로 싹둑 잘라버린 매듭은 다시 묶기가 어려운 법이기 때문이다.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된 이 드라마가 걸어온 길은 뒤를 잇고자 하는 수많은 콘텐츠 제작자들에게 영감을 던진다. 사랑받는 캐릭터는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작가는 그 캐릭터의 생명력을 어떻게 유지하고 가꾸어야 하는지, 그것이 위기에 봉착한 순간 어떻게 풀어나가야 하는지를 말이다.

스페셜과 각 에피소드, 시즌은 언젠가 끝나지만 끝내 남아 기억되고 이어지는 것은 캐릭터라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 된다. 지금보다 더 나은 콘텐츠 강국을 꿈꾸는 한국 작가들이 유독 취약한 부분이 바로 여기에 있다는 점은 여러모로 큰 시사점을 던진다.
 
닥터 후: 닥터의 시간 스틸컷

▲ 닥터 후: 닥터의 시간 스틸컷 ⓒ BBC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얼룩소(https://alook.so/users/LZt0JM)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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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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