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에서 네 번째로 많은 사람들이 사는 나라, 아시아에서 다섯 번째로 큰 나라, 세계에서 섬이 가장 많은 나라, 세계에서 무슬림이 가장 많은 나라. 이 나라가 어디일지 묻는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고개를 갸우뚱한다. 이토록 인구가 많고 영토가 넓다면 알고 있어야 마땅한데 한국에 이 나라는 너무나도 생소하게 마련이다.

미국이나 유럽을 여행하며 현지인들이 한국이 어디에 붙어 있는지, 한국의 역사와 기업, 인물을 알지 못해 답답해한 때가 적지 않았다. 그러나 돌아와 생각해보면 우리는 국경 밖 나라들을 얼마나 알고 있는가. 미국과 중국, 일본 같은 몇몇 나라를 제외하곤 아는 것이 거의 없다해도 크게 틀리진 않을 것이다.

위 문제의 답은 인도네시아다. 동남아시아 남단의 섬나라로, 호주와 인도차이나 반도 사이 대부분의 땅이 이 나라 영토라 해도 틀리지 않다. 동남아시아 공동체인 ASEAN에서도 수장노릇을 하며 명목 GDP가 1조달러를 넘는 경제대국이기도 하다. 한국과도 활발히 교역하는 나라로, 한국 기준 12위 교역 상대국이라 하겠다.

그러나 한국에선 인도네시아에 대해 들어볼 일이 얼마 없다. 이따금 정상회담을 할 때나 뉴스에서 언급이 될 뿐, 그 나라의 역사며 문화에 대해선 놀랄만치 소개되는 일이 드물다. 서구 여러나라가 여러 매체를 통해 직간접적으로 소개되는 것에 비하면 인도네시아에 대한 무관심이 과하단 걸 알 수 있다.
 
나나 포스터

▲ 나나 포스터 ⓒ M&M 인터내셔널

 
낯설어서 의미 깊은 인도네시아 영화

생각해보면 우리가 보는 영화와 책, 만화 등에서도 인도네시아는 소외돼 있다. 인도네시아에서 나오는 작품이 서구 선진국에 비해 완성도가 미흡한 경우가 많으니 그럴 법도 하지만 평생에 걸쳐 인도네시아 작품을 단 한 편도 보지 못하는 사례가 많다는 건 지나친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그런 면에서 카밀라 안디니의 최신작 <나나>는 의미가 깊은 영화다. 보기 드문 인도네시아 영화로, 비극적 현대사 가운데 선 한 여자의 삶을 그렸다.

이야기는 외딴 마을 깊은 숲속에서 시작한다. 숲 속을 걷는 자매에게선 어딘지 모를 긴장이 느껴진다. 언니는 동생 나나(해피 살마 분)에게 소리내지 말고 뒤를 따르라 전한다. 그녀가 잠시 숨돌리며 상황을 이야기할 때에야 관객들은 사정을 알게 된다. 반군 지도자가 동생을 아내로 삼기로 했다고, 집에 있으면 잡혀갈 것이니 아버지가 도망가라 말했다는 것이다. 이미 결혼한 그녀지만 오랜 전쟁 속에 남편은 사라진 지 오래다. 유부녀까지 제 여자로 삼겠다는 군 지도자가 두려워 언니도 저도 숨죽여 숨을 지나는 것이다.
 
나나 스틸컷

▲ 나나 스틸컷 ⓒ M&M 인터내셔널

 
역사 속 무력한 여성, 저택 안 외로운 아내

영화는 이내 수년 뒤 한 마을 저택으로 옮겨간다. 그녀는 이 저택의 안주인이 돼 있다. 나이든 지주의 아내가 되어 두 딸과 아들 하나를 두었다. 우연히 숲을 지나던 지주가 그녀를 구했고 그렇게 결혼에 이르렀다고 그녀는 옛일을 회상한다. 삶에 큰 걱정 없는 부유한 집이지만 그녀에겐 채워지지 않는 아픔이 있다. 가족은 뿔뿔이 흩어지고 첫 남편의 생사도 모르는 것이다. 더구나 주변 사람들은 출신 모르는 그녀가 저택의 안주인이 된 것에 못내 불편한 시선을 흘린다.

무엇보다 그녀의 남편도 의심스럽다. 집엔 때때로 그의 연인이 우편을 보내온다. 공공연한 연애행각에도 그녀는 이를 문제삼지 못한다. 숨죽이고 마음 낮추고 소리 없이 사는 여자가 그녀다. 마을 사람들 불러다 여는 잔칫날에도 그녀는 제 자리를 지키지 못한다. 뒤뜰에서 홀로 담배나 태우는 게 스스로 마음이 편해서다.

그녀는 우연히 한 여자를 만나며 위안을 얻는다. 마을 시장에서 푸줏간을 운영하는 젊은 여자 이노(라우라 바수키 분)가 그녀다. 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이노를 처음 나나는 남편의 외도 상대로 의심한다. 그러나 차츰 그녀에게 빠져든다.
 
나나 스틸컷

▲ 나나 스틸컷 ⓒ M&M 인터내셔널

 
숨 쉴 틈이 되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

나나에게 이노는 숨 쉴 구석을 준다. 그녀가 예쁘다고 말해주고 두려워하던 물건을 아무렇지 않게 대해주며 함께 일탈을 즐긴다. 아이들을 돌봐주기도 하고 저를 업신여기는 다른 아낙에게 대신 일침을 놓아줄 때도 있다. 나나가 이노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을 리 없다.

영화는 답답했던 나나의 삶에 나타난 이노, 그녀의 등장으로부터 이어진 변화, 그 앞에 나타난 새로운 인물의 이야기까지 이어간다. 느릿한 진행 가운데 나나의 섬세한 심경 변화가 영화가 집중한 것인듯 섬세하게 표현된다.

영화는 거듭된 악몽과 환상, 이따금 들려오는 풍문들과 라디오 방송으로 독립 후 인도네시아의 불안정한 사회상을 들춘다. 네덜란드 식민지배와 독립 뒤 난립한 군벌, 이어진 군부 집권에 이르기까지 불안정한 사회상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개인의 삶도 크게 다를 순 없다. 나나는 매일 악몽을 꾼다. 사내들은 그녀의 첫 남편을 붙들고 죽이고 심지어는 그녀의 목까지 벤다. 화들짝 놀라 깨어나지만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다. 집 안에서 소가 지나다니고 있을 수 없는 사람이 모습을 보이는 환상도 거듭된다. 나나의 삶은 좀처럼 현실에 안착하지 못하고 뿌리 없는 유령처럼 제 주변을 떠돈다.
 
나나 스틸컷

▲ 나나 스틸컷 ⓒ M&M 인터내셔널

 
영상 만큼 이야기에도 공을 들였다면

카밀라 안디니의 영화는 한 눈에 보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박찬욱이며 왕가위가 떠오르는 화면은 한 장면 한 장면에 얼마나 공들여 찍었는지를 알게한다. 분위기 있는 화면구성이 보는 눈을 즐겁게 하고 그 안에 든 이색적 사물과 사람이 머리를 일깨운다.

다만 아쉬운 건 이야기다. 큰 위험도, 이렇다 할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 전개가 극을 다소 지루하게 한다. 나나의 환상과 악몽 너머로 제도며 사회의 불안정함이 넘실거리지만 나나와 세상은 좀처럼 서로 맞닿지 못한다. 영화는 오랫동안 둘 사이에 거리를 두니 관객은 영화가 진실로 하고픈 이야기가 무엇인지 알아채기 어렵다. 땟깔에 비해 이야기가 아쉽단 평이 따라붙을 만한 구성이 아닐 수 없다.

여러모로 <나나>는 훌륭한 영화는 못된다. 그러나 인도네시아 영화가 어느정도 수준에 와 있는지, 또 그들의 문화가 현재 주류 문화에 어떤 파장을 미칠 수 있는지 짐작해볼 단서는 된다. 여성 서사가 부족하단 평을 받는 한국 영화계에서 두 여성 중심 영화의 새로움도 분명하다. 인도네시아에 나나와 이노가 있다면 한국에도 그런 이들이 있을 것이므로, 한국 창작자들이 닿지 못한 이야기가 세상에 너무 많이 있음을 이 영화가 알게 하는 것이다.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나나 M&M 인터내셔널 카밀라 안디니 인도네시아 김성호의 씨네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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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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