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생일> 스틸컷영화 <생일>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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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겨진 가족의 이야기에 집중하는 만큼, 어떤 인물도 놓치지 않고 극을 이끌어가는 점은 이 작품에서 중요한 부분이다. 그 경계에 위치하고 있는 것은 딸 예솔의 이야기이며, 아무것도 모를 것만 같은 소녀의 심리까지 끌어내 표현해내고 있는 이종언 감독의 시선은 세심하고 정밀하다.
영화는 현재 곁에 있는 존재가 아니라 이미 세상을 떠난 대상과 부모, 아니 한부모인 엄마의 – 예솔은 처음에 정일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아버지와 떨어져 오래 지냈다. – 사랑을 두고 경쟁해야 했던 예솔의 마음은 물론, 이미 수호에게 다 쓰이고 난 뒤에 남은 사랑의 찌꺼기마저 긁어 모으려는 듯한 안타까움까지 놓치지 않고 그려내고 있다. 오랜 시간 떨어져 지낸 정일의 존재를 쉽게 받아들이는 것은 그것이 핏줄이라는 당위보다 갈급했던 사랑에 대한 갈증 때문이라고 보게 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러니까, 예솔은 자신에게 마땅히 주어져야 했을 것들에 대한 투정이나 요구는 생각한 적도 없거니와, 눈 앞에서 쏟아져 흐르는 엄마의 상실에 대한 깊은 슬픔 앞에 자신의 아픔을 드러낼 생각조차 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미 물이 다 빠져나간 갯벌을 두고 아빠에게 안겨 힘껏 몸부림치는 장면은 그렇게 숨죽이며 지내온 어린 소녀의 진짜 모습을 드러내는 장면이자, 엄마에게는 단 한번도 부릴 수 없었던, 하지만 그 나이 또래에는 충분히 자연스러운 행동이라 할 것이다. 거대한 슬픔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을 이는 아무도 없다는 의미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05.
이 작품 전체를 되돌아보면서 다시 한번 느끼게 되는 지점도 있다. 어떤 결과를 대하는 방식에 대한 문제다. 하나의 상황을 대하는 것에 대한 태도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는 부분을 이 영화는 객관적으로 설명해낸다. 납골당에서 다른 유가족 부모들과 조우하게 되는 장면이 대표적이다. 영화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는 인물이 순남이기에 그들의 모습은 순남의 시선에서 다소 불편하게 그려지지만, 실상 그 속을 들여다보면 방식에 차이만 있을 뿐 모두가 아파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직접적으로 등장하지는 않지만 위로금을 받겠다는 부모에 대한 묘사 역시 각자의 사정이 있을 뿐이라고 설명된다. 영화는 그 모든 이들의 슬픔을 끌어안는다. 각자의 사정이 있을 뿐, 슬픔을 끌어안는 방식에 옳고 그름은 없다는 것이다.
순남의 무너져가는 삶을 지탱해주는 이들이 항상 그녀의 주변에 함께하고 있는 이웃이라는 부분도 그 맥을 함께한다. 지극히 이상적이기만 한 장면과 행위의 연속이지만, 순남은 그들의 관심과 배려 속에서 조금씩 껍질을 깨고 나온다. 오히려 그녀에게 불편한 것은 친척이라는 이름으로, 가까운 사이라는 이름으로 그 외면의 것들에만 집중하는 사람들의 변질된 사랑이다. 평소에는 먼 곳에 존재하다가 결정적인 순간에야 나타나 첨언하려고 드는 인간들. 아무런 악의가 없던 정일의 보상금 이야기에 격렬하게 반응하는 순남의 모습 속에서 그 지난하고 긴 순간들을 엿볼 수 있다.
이 영화의 클라이맥스와도 같은 순남의 울음은 90분 가까이 쌓아온 이 영화의 모든 갈등을 해소하는 장면이다. - 울음 소리만으로도 인물의 모든 감정을 전달해내는 배우 전도연의 진가를 느낄 수 있는 장면이기도 하다. - 2년, 3년, 혼자서는 몇 년을 반복해도 해소되지 않던 것들이 이제사 놓아지는 까닭은 이제 더 이상 혼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언제나 함께였지만 제대로 마음에 품지 못했던 딸 예솔도, 가장 어두운 순간에 빈자리로 남아있던 남편 정일도 이제는 모두 그녀의 품 속에 있다. 이 장면 뒤로 등장하는 30분 가까운 생일 모임 장면 역시 이 지점의 감정적 해소로 인해 똑바로 설 수 있게 된다. 폭발하듯 터져 나온 감정 뒤로 남은 잔재들을 모두의 힘을 빌려 정리해가는 것이다. 생각보다 시간은 조금 더 걸리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