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7년 '이리역 폭발사고'는 전라북도 이리시 이리역(현 전북 익산역)에서 발생한 대형 열차폭발 사고로, 무려 59명이 사망하고 1343명이 부상을 당했으며 수많은 이재민들을 만들어낸 초대형 참사다. 위험한 고성능 폭발물을 싣고 운송하던 차량에서 벌어진 비극은, 호송원의 어처구니없는 부주의와 안전불감증, 그리고 상식과 원칙을 소홀히 여기던 당시 한국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들이 맞물려서 일어난 명백한 인재(人災)였다.
 
21일 방송된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 120회에서는 '1977 사라진 도시와 맨발의 남자' 편을 통해 이리역 폭발사고를 조명했다.
 
익산의 이전 명칭인 이리는 당시 호남선과 전라선, 군산선이 연결되는 철도교통의 중심지로 이용객이 수도 서울 다음이라고 할 정도로 거쳐 가는 사람과 화물이 많았고, 역 주변의 상권도 크게 발달해있었다.
 
1977년 11월 11일 금요일 밤, 이리의 대표적인 공연장인 '삼남 극장'에서는 당대 최고의 여가수 하춘화가 공연을 펼치고 있었다. 당시 하춘화는 전국순회공연을 펼치며 매년 두 번씩은 정기적으로 삼남극장에서 공연을 빼먹지 않았을만큼, 이리는 팬들이 많은 큰 도시였다. 훗날 코미디의 거장이 되는 '한국의 찰리 채플린' 고 이주일도 당시는 무명이었지만 하춘화 리사이틀의 전속 MC자격으로 항상 공연마다 하춘화와 동행했다.

같은 시각, 이리역에 있는 한 사무실에는 역무원들이 월드컵 축구 최종예선 경기를 시청하고 있었다. 인기가 높은 하춘화 리사이틀에 국민적 관심이 쏠리는 월드컵 예선 경기까지 겹치면서 그날따라 이리 거리에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갑자기 귀가 찢어질 듯한 굉음과 함께 온 시내 전체가 흔들렸다. 엄청난 폭발이 일어나며 이리는 순식간에 폐허와 아비규환으로 변해버렸다. 폭발의 충격으로 이리 시내의 숨많은 집과 건물이 무너졌고, 거리는 건물에서 쏟아져나온 유리창 파편과 각종 잔해에 뒤덮였다.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한 사람들의 절규과 몸부림이 곳곳에 울려퍼졌다.
 
폭발의 충격은 삼남극장에도 미쳤다. 생존자인 하춘화는 당시 상황에 대하여 "오프닝 끝나고 들어와서 다음 준비를 하고 있을 때, 갑자기 폭풍이 불러오고 땅이 뒤집히면서 흙 속에 파묻히는 느낌이 들었다. 하늘을 보니까 극장 지붕이 날아가고 별만 보이더라. 그리고 이리시가 전체가 불이 나가버렸고. 유리란 유리는 다 깨졌다. 그때는 북한에서 내려와 전쟁이 난 걸로 생각했다."고 회상했다.
 
하춘화의 목숨을 구해낸 것은 이주일이었다. 그는 어둠속에서도 달려와 하춘화를 찾아냈고, 두 사람은 무너진 극장 담벼락을 넘어서 무사히 탈출했다. 심지어 이주일은 머리에 큰 부상을 입은 상황에서도 무서워하는 하춘화를 위해 자신의 머리를 딛고 담벼락에서 무사히 내려올 수 있도록 도왔다고 한다.
 
하춘화는 "이주일은 제 생명의 은인"이라며 고마움을 전했다. 이에 이주일은 "하춘화가 죽으면 내 밥줄이 끊어지기 때문"이라며 농반진반으로 화답했다고 한다. 이주일은 당시 두개골 함몰로 큰 수술을 받아야 했지만 천만다행으로 뇌를 다치지는 않아서, 몇 달 후엔 무대로 돌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당일 삼남극장에선 안타깝게 무려 100여 명이 부상을 당하고, 7명이 목숨을 잃었다.
 
한편 간발의 차이로 사고를 피하는 행운을 누린 이들도 있었다.승객 600여 명을 태운 서울발 남원행 101 특급열차는 이리역 바로 전역인 황등역에 정차하고 있었다. 원래 특급열차는 황등역을 무정차 통과했지만, 황등역 직원이 이리역이랑 연락이 끊긴데 의구심을 품고 정지신호를 내린 것이 열차의 운명을 바꿨다.
 
당시 열차 기관사였던 김영시 씨는 이리역으로 운행을 재개했지만 만일을 대비하여 시속 25km 이하로 조심스럽게 저속운행을 했다. 이리역을 목전에 두고 수상한 느낌에 운행을 멈춘 뒤, 영시 씨는 비로소 엄청난 폭발사고가 난 것을 두 눈으로 확인했다. 만일 열차가 정상적으로 운행했다면 영시 씨와 600여 명의 승객들도 모두 목숨을 잃을 뻔했다. 불과 5분의 차이로 큰 참사를 모면한 것이다.
 
이 폭발 사고로 부상을 당한 사람은 무려 1,400여 명. 공식 사망자만 59명에 이르렀다. 대부분의 피해자가 이리역 인근 200m 내에서 발생했다.

폭발의 위력으로 인근의 주택들은 대부분 무너졌고, 반경 4-8km 이내 주택들도 일부가 파손되거나 유리창이 부서지는 피해를 입었다. 철로에서 가장 가까운 동네였던 창인동은 전체 가구의 43%가 집을 잃었다. 폭발이 발생한 이리역에는 직경 30m, 깊이 10m의 웅덩이가 파였다. 바로 국내 최악의 열차 사고로 불리는 '이리역 폭발 사고'였다.
 
이리역에서는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사상 초유의 피해가 발생한 역대급 열차 사고에 당시 박정희 대통령까지 현장을 찾아올 만큼 국민적 관심이 쏟아졌다.
 
사건의 진실을 가장 먼저 알게된 것은 당시 지역 신문사 기자였던 나훈 씨였다. 그는 혼란한 상황 속에서도 기자정신을 발휘하여 폭발의 근원지를 찾아나섰고, 이리역에서 모종의 사건이 있었음을 알게 된다.
 
나훈 기자는 역 대합실에서 우연히 수상한 남자 하나를 발견했다. 그는 화약 회사의 직원으로 인천에서 광주까지 화약 배달 업무를 맡고 있는 호송원 신씨였다. 그가 다니던 화약 회사는 국내 최초로 화약을 개발해 관련 산업을 독점하고 있었으며 1977년 당시 무려 15개의 계열사와 200억대 자산을 보유한 엄청난 기업이었다
 
신씨가 배달하던 화약 중 가장 많은 양은 '다이너마이트'였다. 도로나 건물, 철도 등을 건설할 때 사용되는 고성능 폭발물인 다이너마이트는 당시 화약 열차엔 무려 22톤 규모에, 914개나 되는 물량이 실려있었다.
 
또한 초산 암모니아와 폭약 상자 뇌관까지. 폭발을 일으킬 수 있는 온갖 원료들을 포함하면 총 1,250상자, 30톤 분량에 이르렀다. 한 마디로 폭탄을 가득실은 화약 열차가 인천에서 출발해 광주로 가던 중, 이리역에서 갑자기 폭발해 공중분해 되어버린 것이었다.
 
신씨는 저녁을 먹으려고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사고가 났다고 변명했다. 하지만 나훈 기자는 신씨와 대화를 나누면서 기자 특유의 직감으로 그가 이번 사건과 중대한 관련이 있음을 눈치챘다.
 
나훈 기자는 설득 끝에 신 씨를 경찰에 넘겼다. 경찰은 수사를 통하여 신씨가 진술한 내용과 목격자들의 증언이 다르다는 것을 파악했다. 처음엔 폭발의 원인을 잘 모르겠다고 한 신씨의 이야기는 모두 거짓말이었다. 경찰은 신씨를 추궁한 끝에 마침내 폭발사건의 황당한 전모를 밝혀냈다.
 
사건 당일날, 신씨는 열차 대기 중 저녁식사를 겸해 술을 마시고 화약 연료가 가득 들어있던 열차 화물칸에 들어와 잠을 청했다. 신 씨는 쌀쌀한 날씨 때문에 머리맡에 촛불을 켜두고 잠이 들었는데 그 사이에 화약 상자에 불이 옮겨 붙었다는 것이다.
 
어처구니없게도 호송원 경력만 7년째인 신 씨가 화약 열차 안에서 촛불을 켜고 지낸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신씨는 심지어 다이너마이트 상자옆에 취사도구까지 갖춰 놓고 식사를 해먹는 등 위험천만하고 비상식적인 행동을 일삼았던 것으로 드러났다. 화약관리와 운송에 대한 전문적인 교육 시스템이 없었던 환경에서 전형적인 무지의 소치였다.
 
신씨의 악행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신씨는 주변에 폭발의 위험을 알리지 않고 "불이야!"라고만 외치고 홀로 열차에서 도망나왔다. 당시 역에 있던 검수원들은 영문도 모르고 불을 끄기 위하여 열차 쪽으로 달려왔다가 폭발에 휘말려 변을 당했다. 검수원 임사견 씨를 비롯하여 먼저 달려간 사람들은 안타깝게도 시신도 제대로 찾지 못했다고 한다.
 
개인의 문제만이 아니라 관리 체계도 엉망이었다. 신씨를 비롯한 화약물 호송직원 전원이 화약 호송에 반드시 필요한 화약류 취급 면허도 없는 무자격자였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고성능 폭발물을 잔뜩 싣고 장거리 운행을 하는데 호송원이 단 한 명이었던 것도 문제였다. 그만큼 위험물이 방치되거나 돌발적인 상황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회사는 이 모든 위험을 알면서도 '이윤' 때문에 극도로 중요한 업무를, 터무니 없이 허술하게 관리해 온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또한 대형 참사의 또다른 원인은 철도 운송 과정에서의 잘못된 관행이었다. 폭발한 화약열차는 예정과 달리 무려 22시간이나 이리역에 머물렀다. 이리역의 배차담당자가 '뒷돈'에 해당하는 급행료를 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일부러 배차를 지연시킨 것이다.

당시 급행료는 관공서, 병원, 군대, 택시, 영구차까지 돈을 내는 화물 위주로 먼저 보내주는 것이 비공식적인 관행이었다고 한다. 신씨의 부주의, 회사의 관리 부재, 철도직원들의 비리, 셋 중 하나만 없었더라도 최악의 참사까지는 벌어지지 않을 수도 있었다.
 
불의의 사고로 하루아침에 소중한 동료, 가족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는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유족들은 시신 일부만 간신히 찾아내 장례를 치러야했고 그마저도 찾지 못한 사람들도 있었다. 사고로 목숨을 잃은 이리역 직원만 총 16명에 이르렀다.
 
이리 참사의 공식적인 사망자는 59명으로 발표됐지만, 정작 이리 주민들은 실제 사망자는 그보다 몇 배는 더 많았다고 증언한다. 당시 신분을 확인할 수 없는 희생자들은 공식 사망자에서 제외되었기 때문이다. 교통거점이었던 이리역 주변에는 신원이 불분명한 타지인들이나 홍등가에서 근무하는 여성들도 많았다고 한다. 연고를 찾지못한 유해들은 그렇게 세상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 이들도 부지기수였다.
 
결국 사고를 일으킨 책임이 있는 호송원 신 씨와 화약회사 대표, 배차 담당자 모두 구속을 피하지 못했다. 하지만 죄의 무게에 비하여 처벌은 너무나 가벼웠다.
 
신씨는 미필적 고의에 의한 폭발물 파열치사상죄로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았다. 고의로 불을 낸 것은 아니지만 폭발의 위험성을 알고서도 무시했다는 이유였다. 위법한 인력 운용과 화약 관리를 해온 화약 회사의 사장은 항소심에서 형량이 징역 8개월에서 벌금 20만 원으로 크게 감형되었다. 다만 민심을 의식하여 회장은 대국민 사과와 전 재산인 90억 원을 피해가 컸던 이리 시민들을 위한 피해보상금으로 지급하겠다고 발표했다.
 
모든 처벌이 끝난 후 철도청은 사고 후 잠시 중단시켰던 화약회사의 운송 재개를 허가했다, 그리고 화약운송을 위한 필수적인 조치에 대한 규칙이 제정됐다. '화약 적재시 화약취급면허 소지자 입회', '화약을 실었을 때는 즉시 경찰에 신고하고 임검을 받을 것', '호송원 2인은 화약류 취급 면허 소지자와 청원경찰 각 1인씩', '호송인은 소화기 휴대 필수' 등의 조항들이었다. 어쩌면 너무나 기본적이고 당연한 일이건만, 너무 큰 희생을 치르고 난 뒤에야 원칙이 다시 세워진 것이다.
 
다행히 이후로 화약 열차 사고는 더 이상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원칙을 어기면 더 많은 이득을 볼 수 있지만, 원칙이 어겨지기 시작하면 반드시 큰 대가를 치르게 된다는 것은, 이리사고를 비롯하여 지금까지 일어난 대형 참사들이 우리에게 알려준 뼈저린 교훈이라고 할수 있다.
 
당시 박정희 정부는 흉흉해진 민심을 달래기 위하여 '새이리 건설 계획'을 발표하고 발빠르게 이리 복구와 재건에 나섰다. 1년도 안되어 이리역 앞 도로를 넓히고 초대형 아파트 단지를 속전속결로 건설했다. 당시 복구작업에 26만명에 이르는 인원이 동원되었고 전국에서 모인 성금만 6억 6천만원에 이르렀다.
 
이리사고의 피해자이자 생존자인 가수 하춘화 이재민 돕기 공연을 열고 수익금을 이재민들에게 기부했다. 전 국민들의 온정어린 손길에, 이리 시민들은 겨우 상처를 추스르고 차츰 일상을 회복할 수 있었다. 1995년 이리는 익산군과 합쳐지면서 익산시가 되면서 역 이름도 익산역으로 변경된다.
 
그런데 이리역 사고로부터 4년 뒤인 1981년, 또 하나의 대형참사인 경북 경산열차사고가 발생한다. 여객 열차끼리 충돌하여 사망자 55명, 부상자 254명이 발생한 대형사고였다. 당시 현장에 가장 먼저 달려가 피해자들을 돕고 헌혈 활동에 동참한 것이 바로 이리 주민들이었다. 도움이 도움을 낳는다는 말처럼, 반복되는 참사에도 우리가 무너지지 않는 건, 극복을 돕는 손길도 반복됐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한편으로 사고 유족들이 아직도 큰 상처를 받는 순간은, 주변의 경솔한 오해와 막말이라고 한다. 이리 사고로 남편을 잃은 수남 씨는 허름한 판자촌 움막집에 살다가 피해자에게 제공된 새 아파트에 이주하여 집값이 오르면서 시샘한 일부 사람들로부터 "사고 덕분에 전화위복이 된 것 아니냐"는 말을 듣고 너무나 큰 상처를 받았다고 한다.

"어떠한 발전도 누군가의 희생을 통해서만 이룰 수 있는 것이라면 마냥 좋아할 일은 아니지 않는가."

유족들이 마지막으로 전한 메시지는 지금 우리 모두가 곱씹어야봐야 할 대목이 아닐까.
꼬꼬무 이리역폭발사고 철도사고 1977년 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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