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는 시대극이다. 하지만 관객이 흔히 연상할법한 시대극의 전형과는 아주 멀리 떨어진 자리다. 대개 왕과 귀족들, 유명인과 장군들이 가득 채우게 마련인 일반적인 사극과 달리 <오키쿠와 세계>의 주인공들은 밑바닥 인생에 가깝고 주변 풍경은 지극히 서민적이다. 그렇다고 특별한 인생역전이 펼쳐지지도 않는다. 대략의 시기는 친절하게 표기되지만, 역사적인 사건이나 관객이 떠올릴만한 시대 배경이 깔려 있지도 않다. 이상한 시대극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90분 영화의 상영시간 중 1분 정도의 분량 외엔 철저히 흑백화면으로 일관하고 있다. 대단한 극적 굴곡이나 거창한 풍경이란 찾아보기 힘든 이 영화는 하지만 현미경처럼 세밀한 관찰로 재발견될 준비를 치밀하게 갖춘 채 관객을 기다린다. 선 굵고 주제의식 명확한 작업을 수행해온 일본의 중견 감독 사카모토 준지의 신작은, 감독의 전작들을 경험한 이들에겐 다소 예외의 '미니멀리즘' 소품처럼 보일 테지만, 그 실체는 제목처럼 놀랍고 광활한 '세계'로 확장된다. 그래서 무심코 보다가 경이로운 확장에 경탄을 금치 못하고 말 테다. 대체 어떤 이야기가 펼쳐지길래.
 
3년 동안 그들에게 일어난 사건사고의 기록
 
"오키쿠와 세계"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오키쿠와 세계"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엣나인필름

 
<서장_에도의 똥은 어디로?> _1858년 늦여름, 에도.
 
이야기가 시작된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어느 사찰 한구석, 공중변소 앞에서 두 명의 청년이 비를 피하는 중이다. 하지만 둘 중 한 청년은 다른 청년과 비좁은 처마 아래에서 어떻게든 간격을 띄우려 거듭 부질없는 시도를 이어간다. 자석의 양극처럼 붙었다 떨어지길 반복하는 청년은 폐지장수 '츄지'다. 그는 지물포에서 이면지를 수집해 되파는 장사꾼이다. 츄지가 간격을 벌리려는 상대는 '야스케'다. 츄지는 코를 막으며 필사적이다. 무슨 냄새가 나는 걸까? 알고 보니 야스케는 똥거름장수다. 그는 어깨에 걸친 지게로 공중변소의 똥을 퍼 농촌에 거름으로 판매하는 일을 한다. 자연히 야스케에게선 그가 취급하는 '상품'의 냄새가 깊게 배어난다.
 
비는 그칠 줄 모르는데 절을 나서다 비를 정통으로 맞은 젊은 여성이 급히 변소 처마 밑으로 합류한다. 누더기를 걸친 장사꾼 사이에 수수하지만 기품 있는 여인이 자리하니 분위기가 급변한다. 야스케는 그를 알아보지만 똥 냄새를 풍기는지라 그 여성, '오키쿠'는 야스케에게서 고개를 돌린다. 하지만 츄지에겐 우호적인 시선을 보낸다. 그러나 곧 오키쿠는 위기에 봉착한다. 배에서 신호가 온 것이다. 참다 못한 그는 다급하게 두 청년에게 자리를 피해달라 읍소한다. 상황이 파악된 둘은 장대비 속에 근처 정자로 자리를 피해준다. 시간대만 달리하면 이 캐릭터 조합은 현재의 SNS 쇼츠 설정으로 삼아도 손색이 없어 보인다. 우여곡절 속에 영화의 주인공 셋이 만나는 순간이다.
 
츄지는 폐지장사로 생계가 풀리지 않는다. 그래서 야스케의 동업자가 일을 그만뒀다며 던지는 제안을 못이긴 척 응한다. 이제 둘은 지게와 수레를 끌고 대도시 곳곳의 공동주택과 무가 저택들의 변소에서 똥을 퍼내는 동업자가 되었다. 야스케와 츄지는 수로를 타고 에도로 들어올 때는 근교 농촌에서 채소를 받아 시장에 넘기고 돌아올 때는 수집한 똥을 농가에 판매한다. 오키쿠는 어느 날 아버지와 자신이 기거하는 공동주택에 똥을 가지러 온 츄지를 목격한다. 청춘남녀의 재회장면 치고는 퍽 잔인한 풍경이 아닐 수 없다.
 
<제1장 무적의 오키쿠> _1858년 가을.
 
바다에 면한 에도에는 늦은 폭풍우가 몰아친다. 수위가 올라오자 오키쿠의 공동주택 변소도 덩달아 분출하기 시작한다. 그야말로 '분뇨의 역류'다. 공동주택 이웃들의 원성과 집주인의 철면피 대처, 그 와중에 한 집에 거주하는 에도의 하층민들 신세타령이 해학적으로 펼쳐진다. 그런 왈가왈부가 진득하게 펼쳐지는 도중에 마침내 음지의 '히어로'들이 도착하다. 야스케와 츄지가 스레와 지게를 끌고 당도한 것이다. 그들의 활약으로 마침내 공중변소의 수위가 낮아지기 시작한다.
 
<제2장 원통한 오키쿠> _1858년 늦겨울.
 
한겨울 이른 시간에 츄지는 야스케와 구역을 나눠 오키쿠의 공동주택으로 출동한다. 하필 변소에는 오키쿠의 아버지가 변비로 끙끙대던 중이다. 원래 어엿한 무사였던 그는 잘나가던 시절에는 종이로 뒤처리를 했지만, 이제는 지푸라기로 대용하는 시세라고 씁쓸히 회고한다. 그러던 중 느닷없이 츄지에게 '세계'라는 단어를 아느냐 묻는다. 무학인 츄지로선 전혀 낯선 말이다. 곤혹스러운 그에게 오키쿠의 아버지는 선문답하듯 '세계(세카이)'란 말을 아는지 묻고, 세계에는 끝이 없다며 혹여나 훗날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이 세계에서 제일 좋아한다고 말해주라 전한다. 그날 오키쿠의 아버지는 불귀의 객이 되고 오키쿠는 목을 다쳐 말할 수 없게 된다.
 
<제3장 사랑에 빠진 오키쿠> _1859년 늦봄.

츄지는 오키쿠의 사정을 공동주택 이웃인 통장이 노인에게 듣는다. 목숨은 건졌지만 몇 달간 요양을 마치고 돌아온 오키쿠는 방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는다. 오키쿠의 머리맡에는 단도와 목수건이 놓여 있고 어두컴컴한 실내에는 등잔 위 타들어가는 촛불만이 주위를 밝혀준다. 하지만 공동주택 이웃들은 밖에서 안부를 걱정하며 구운 정어리를 가져다놓고, 주정뱅이 노인은 오키쿠의 부친을 애도하자며 술을 들이킨다. 오키쿠가 생업으로 삼던 교습소 제자와 인연 깊은 스님이 방문해 교습소로 돌아오길 간청한다. 오키쿠는 어렵사리 목의 상처를 보이며 사양하려 하지만 스님은 그에게 해야 할 역할이 있다며 '역할'은 일을 나눈다는 뜻 아니냐 질문한다. 결국 오키쿠는 승낙하고 교습소로 돌아간다.
 
한편 야스케와 츄지의 일상은 변함이 없다. 츄지가 서민 공동주택을, 야스케가 무가 저택을 맡아 오늘도 분주히 똥을 수거하는 중이다. 언뜻 야스케가 좀 더 고상(?)한 구역을 맡은 것 같지만 고용살이하는 하인들조차 야스케를 천대하며 뒷돈을 올려주길 강요한다. 수모를 당한 뒤 거리를 배회하지만 누구나 코를 막을 뿐 그의 곁으로 다가오지 않는다. 하지만 우연히 마주친 오키쿠가 그를 위로한다. 그러나 울분에 싸인 야스케는 그런 오키쿠에게도 역정을 부리다 끝내 사과하고 사라진다. 그 만남을 통해 츄지는 오키쿠가 돌아왔음을 알게 된다.
 
<제4장 바보와 바보> _1859년 초여름, 카사이 영지
<제5장 바보 같은 오키쿠>
 
야스케와 츄지의 수난은 계속된다. 똥거름을 운반하던 중 수레가 부서지는 바람에 일일이 지게로 옮기는 수고를 겪었지만 지주에게 역성만 듣고 똥을 뒤집어쓰고 만다. 욱하는 성질에 무슨 사단이 날 줄 알았지만 야스케는 어쩌지 못한 채 분노를 삭이며 어설픈 개그로 견딜 뿐이다. 한편 어느 정도 일상을 회복한 오키쿠는 서책에서 '츄기(충의)'라는 단어를 보다 먹을 갈아 종이에 '츄지'를 쓴 뒤 아이처럼 즐거워한다.
 
<제6장 그리고 배는 간다> _1859년 늦여름, 나카 강
 
우여곡절을 겪지만 야스케와 츄지는 에도의 똥 수거를 책임지며 여전히 바쁘다. 배에 실어온 똥을 강변 움에 비축한 뒤 물을 부어 무게를 늘리는 야스케에게 츄지는 똑바로 살아야 한다며 타박하지만, 야스케는 거래처 무가와 상인들도 똥의 수거가격을 후려치면서 부당하게 이득을 취하는데 뭐 어떻나며 받아친다. 그렇게 티격태격 하다가 우리가 똥을 푸지 않으면 세상이 어떻게 될까 상상하며 웃어제낀다. 츄지는 언젠가 읽고 쓰는 법을 배우고 똑바로 살겠다고 다짐한다.
 
<제7장 세계의 오키쿠> _1860년 겨울
 
공동주택은 여전히 왁자지껄하다. 정답게 이웃이자 대가족임을 강조하던 집주인은 집세 독촉에는 예외가 없다. 그런 가운데 오키쿠는 츄지를 찾아가 마음을 전하려 한다.
 
<종장 오키쿠의 세계> _1861년 늦봄
 
야스케는 또다시 무가 저택에서 수모를 당하지만, 이번에는 유쾌하게 보복하는데 성공한다. 오키쿠는 교습소에서 '세계'에 대해 설명하는데 아이들 뒤편에는 어른들도 보인다. 그중에는 츄지도 있다.

1858-1861년에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오키쿠와 세계"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오키쿠와 세계"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엣나인필름

  
<오키쿠와 세계>는 아무렇지 않은 척 시치미 뚝 떼고 거대한 역사 속 하층민들의 이야기를 풀어낸다. 무심코 영화를 본다면 굳이 단락을 딱딱 나눠가며 시간성을 강조하는 이유가 잘 수긍이 가지 않을 수도 있겠다. 90분이라는 그리 길지 않은 장편 상영시간을 9등분할 이유가 딱히 이해되지 않을뿐더러, 호흡을 방해하는 느낌도 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하나 찬찬히 뜯어본다면 소름이 돋을 만큼 이 영화는 '세계'의 변화를 함축하고 있다.

시작과 함께 세 주인공(오키쿠, 야스케, 츄지)가 폭우 속에서 만나는 곳은 도쿄 우에노 거리에 지금도 건재한 칸에이지 절이다. 이곳은 일본 불교에서도 가장 고풍스러운 종파인 천태종의 총본산이다. 더 중요한 강조점은 이 절이 바로 에도 막부를 창건한 도쿠가와 가문에 의해 건립되어 가문 대대로 조상의 위패를 모시는 곳이라는데 있다. 굳이 주인공들이 이 상징적인 장소에서 쏟아지는 비 가운데 첫 만남을 갖는다는 것부터 의미심장하지 않을 수 없다. 대체 에도 막부와 도쿠가와 가문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길래? 자연스럽게 영화가 숨겨둔 질문에 머리를 긁적이게 될 수순이다.
 
영화의 시간대에서 5년 전, 미국의 페리 제독은 함대를 이끌고 쇄국정책을 펼치고 있던 일본에 상륙한다. 일본 근대사의 결정적 전환점이 된 '흑선(쿠로후네) 내항' 사건이다. 1년 후 재차 돌아온 페리 제독에 의해 에도 막부는 미일화친조약을 맺고 개항을 맞는다. 당시 조선은 철종 시절, 세도정치 아래 문을 걸어 잠근 채 우물 안 개구리로 머물던 시절이다. 영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1858년은 불평등조약의 전형인 '미일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고 이 조약을 주도한 에도 막부에 대한 불만이 팽배해지던 시기다. 너무나 평화롭게만 보이는 오키쿠와 야스케, 츄지의 세상은 그렇게 실제로는 변화의 격랑 속에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3년 동안이지만 영화 속에서 일본 전통 연호는 무려 3개나 된다. 안정된 시기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영화가 시작될 때는 '안세이' 연호인데 이야기 내내 '만엔' 시기였다가 말미에는 '분큐' 연호가 시작되는 식이다. 이 시기가 바로 일본 시대극을 구성할 때 가장 인기 좋은 두 시기, '전국(센고쿠)시대'와 함께 각광받는 '막말'이다. 아무 일 없는 것처럼 영화 속 주인공들이 일상을 영위하던 1860년 봄에는 에도 막부의 '다이로', 오늘날로 치자면 국무총리에 해당하던 이이 나오스케가 암살당한다. 막부가 독단적으로 감행한 개항과 개방정책에 불만을 품은 존왕양이파 쇄국론자들에 의한 것이었다. 이 사건을 기점으로 천하가 요동치게 된다. 일본 대중문화에 친근한 이들이라면 한번쯤 들어봤을 '신선조(신센구미)'와 인기 만화/애니메이션 '바람의 검심', '은혼'의 배경이 바로 이 시절이다. 10여 년간의 대혼란은 결국 1868년 메이지 유신으로 이어진다. 칸에이지 절 또한 이 난세의 말미에 주요 가람이 소실되고 만다. 그런 역사적 사건들을 돌아본다면 이 영화 속 평범하기 그지없는 흑백의 풍경은 오만가지 현란한 원색으로 머릿속에서 변모하고 말 것이다.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풀처럼 강인한 서민들을 형상화하다
 
오키쿠의 아버지는 어엿한 무사(사무라이)였지만 개화를 추구하며 정치에 몸을 담았다가 몰락한 인물이다. 츄지와의 대화에서 상대는 아직 이해할 수 없지만 '나라가 어수선한 건 우물 안 개구리라서'라며 일본의 당대 쇄국정책을 비판한다. 끝 같은 건 없는 세계인데 당시 일본은 그저 눈감고 귀를 가린 채라는 것이다. 그런 통렬한 비판은 여전히 강성하던 쇄국론자들에 의해 미움을 사 비극적인 최후를 맞게 되지만 그의 통찰이 옳았다는 것은 훗날 역사가 증명하게 된다. 무사들의 세계를 떠난 지 오래건만 정견을 펴는 과정에서 얻은 원한은 너무나 부질없이 이어진다. 서민들로선 통 이해할 수 없는 무의미한 일이다.
 
부친을 잃은 오키쿠의 머리맡에는 두 개의 물건이 단정히 놓여 있다.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집어들었던 단도, 그리고 아버지의 목수건이다. 세상을 떠난 아버지를 기억하는 유품이지만 둘은 너무나 의미가 다르다. 단도는 오키쿠에게 무가 집안의 핏줄이라는 증명이다. '사-농-공-상'의 신분제 사회이던 당시에 '사'에 속하는 증명이자 그 신분의 굴레에 속박된다는 뜻이다. 하지만 오키쿠는 단도로 아버지를 구하는데 실패하고 자신도 영구적인 상처를 입고 말았다. 죽어가던 아버지는 목을 베인 오키쿠를 안타깝게 바라보며 (상처를 지혈하기 위해) 목수건을 전하려 애쓴다. 순수한 사랑과 가족애가 그 목수건에 간직된 의미다. 오키쿠는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
 
오키쿠는 비록 영락했지만 무사의 핏줄을 잇는다. 그 혈통과 교육을 받은 덕분에 비록 가난한 서민들의 공동주택 '나가야'에서 기거하지만 존중을 받고 교습소에서 교사로 일하고 있다. 그런 오키쿠가 밑바닥 똥장수로 전락한 무학의 츄지에게 연정을 느끼고, 처음에는 냄새난다며 상종하지 않던 야스케의 슬픔을 위로하는 변화는 봉건질서가 허물어지고 신분제의 철폐라는 거대한 전환의 서막을 알리는 상징성으로도 기능하는 것이다. 지금의 시각으로는 상상하기 힘든 거대한 구습의 치하에서 이들의 청춘 로맨스는 그 자체로 세상의 변화로 직결되는 전진이다.
 
똥장수들을 통해 구현되는 생태도시 에도의 기억
 
"오키쿠와 세계"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오키쿠와 세계" 스틸 영화 스틸 이미지 ⓒ ㈜엣나인필름

 
야스케와 츄지는 당시 에도의 최하층민이다. 상인이라면 상인이지만 부를 축적해 영주들도 함부로 대하지 못하던 '거상'들과는 천양지차다. 하지만 거대도시에서 그들은 필수적이자 핵심 공공서비스의 담당자들이기도 하다. 런던 인구가 70만일 때 에도의 인구는 100만을 기록했고, 당시 유럽의 대도시들이 몸살을 앓던 하수도 문제를 이 똥거름 장수들이 해결하고 있었던 참이다. 오늘날로 치자면 '유기농 순환경제' 시스템이 가동되던 셈이다. 둘의 동선은 곧 선순환의 모델 자체다.
 
이들은 오늘날 도쿄 외곽지역인 카미야리에서 수운을 이용해 농촌의 채소를 에도 중앙으로 위탁 판매하고 당시 에도 인구의 과반을 차지하던 무사들의 저택과 이들의 생활을 보조하던 서민들의 공동주택을 오가며 하수도 문제를 해결한다. 이들이 운반한 인분은 100만 인구를 먹여 살리기 위한 주변 농촌의 비료 문제를 해소하는 핵심이다. 화학비료가 생산되기 전에 안정된 식량 생산을 위해 필수적인 거름을 운반하는 이들을 주인공으로 삼았다는 점부터 통상적인 시대극의 전형성과는 상이한 주제의식을 엿볼 수 있다.
 
스쳐 지나가는 부분이지만 '똥'의 가치를 영화 속 등장인물 각자가 언급하는 점 또한 주제의식과 연결되는 흥미로운 대목이다. 영주의 위세를 등에 업고 별반 차이 없는 처지의 똥장수를 박대하는 저택의 하인은 '무가의 똥은 먹는 것이 다르기에 가치가 높다!'라며 상납을 올리라고 으름장을 놓는다. 지독한 신분 차별의 과시다. 야스케와 츄지가 겪는 차별은 당시 일본사회에서 필수적인 역할을 소화하지만 허위의식에 의해 천대받던 존재들이 겪어온, 현재도 '부락민(부라쿠민)' 후예들에게 가해지는 보이지 않는 차별과 다르지 않다.
 
하지만 에도 시대에 '똥'은 소중한 자원이었다. 티격태격 충돌이 벌어지긴 해도 야스케와 츄지는 거래를 계속 이어갈 수 있다. 누군가는 처리해야 하는 분뇨이기 때문이다. 또한 거래의 대상이 되기에 공동주택 주민들은 집주인에게 맞서는 수단으로 활용하기도 한다. 집세를 독촉받는 게 일상이지만 세입자들은 자신들이 먹고 싼 인분을 판매한 수입이 집주인에게 적지 않은 이익이 됨을 알기에 당당할 수 있다. 우리가 싼 똥으로 돈을 벌지 않냐는 것이다. (실제로 당시 기록들에서 세입자의 집세보다 인분 수거료가 더 많은 이득이 되었다는 게 발견된다.)
 
이는 웅장한 무가 저택에서도 의외가 아니다. 겉으론 으리으리하지만 에도 시대 말엽 물가가 천정부지로 오르면서 재정난에 시달리던 무가 경제에 인분 수거는 상당한 수입이 되었다고 한다. 당시 상점이나 무가 저택 거주자 성인 1인당 연간 배출 분뇨는 무 50개나 가지 50개 기준으로 거래되었다고 한다. 허리띠 졸라매야 할 무가에서 이런 식재료 교환은 무시할 수 없는 부수입이었을 테다('에도의 패스트푸드' 오쿠보 히로코 저, 청어람 출판사 인용).
 
아래로부터의 민중사와 접속되는 청춘 로맨스가 빛난다
 
<오키쿠와 세계>는 영화 속 현실의 바깥을 상상하게 만드는 영화다. 관객이 보고 나면 궁금할 수밖에 없는 이것저것 요소들을 문득 깨닫는 순간, 단조롭게 여겨지던 소품 같은 작업은 그 어떤 대하 서사극 EPIC 못지 않은 감흥으로 화학적 변화를 일으키기 시작할 테다. 겉으로는 섬세한 주인공들의 감정 변화와 교감의 과정이 잘 어우러진 로맨스 사극으로 비춰지지만, 영화 속에서 세심하게 구현된 당대 서민들의 일상생활 풍경과 에도의 순환경제 모델 재현수준이 상당하기에 역사물을 좋아하는 이들도 즐길 구석이 가득하다. 그런 배려를 통해 시대를 뛰어넘어 사회적 환경에 구속되면서도 일방적이지 않은 민중들의 지혜와 저력을 구현하는 작업이다.

오키쿠는 검을 휘두르는 데 실패했다. 하지만 읽고 쓰는 법을 안다. 학문을 통해 그는 변화의 시대에 필요한 역할을 맡을 수 있다. 그가 다시 세상으로 나오게 만든 결정적 전환점, 스님의 어설프지만 진심 가득한 조언은 '설교'와 '경단'이다. 먹고 사는 문제와 넓은 세계를 상상하게 만드는 교육의 문제가 맞물림을 상징하는 순간이다. 여전히 세상은 차별이 가득하고 카스트 제도의 악습처럼 똥장수와 거래할 때 더럽다며 손도 마주치지 않으려 하는 시절이지만 오키쿠의 인식과 태도가 바뀌는 과정은 시대의 도도한 변화를 그 자체로 구현하고 있다.
 
납작 움츠린 채 너른 세계와 연결되기를 두려워하던 당대 일본에서 영화 말미에 가장 인상 깊던 장면, 전혀 다른 신분의 존재들이 '바디랭귀지'로 필사적인 소통에 나서는 찰나는 배우들의 열연을 통해 너무나 아름다운 순간으로 각인된다. 아직 '수어'라는 게 체계화되기 이전에 말 그대로 몸짓 발짓으로 진심을 전하고 사정을 표현하려는 오키쿠의 분투는 동시대 최고 수준을 자랑하는 배우 쿠로키 하루의 명연기 중에도 다섯 손가락에 들 정도로 압도적이다. 이건 그저 직접 눈으로 확인해야만 이해될 부분이라 꼭 보시길 권하는 바이다. 청춘스타에서 연기파로 거듭난 야스케 역 이케마츠 쇼스케와 근래 주목받고 있는 신예인 츄지 역의 칸이치로도 궁합이 좋다. 여기에 인상 깊은 조연들, 오키코의 부친 겐베이 역 사토 코이치(칸이치로의 부친이다!)와 일본영화에서 감초처럼 등장하는 이시바시 렌지 같은 중견연기자들이 탄탄하게 뒷받침을 해준다.
 
<오키쿠와 세계>는 세밀한 바깥 역사를 소화할수록, 소소한 장치와 배경에 주목할수록 무한대로 확장되는 괴력의 영화다. 사카모토 준지라는 중견 감독 이름값에도 불구하고 제작 초반에 투자를 받는데 애먹는 바람에 개별 단편 조합으로 구성한 단막극 형식도 전화위복으로 그럴싸한 그림이 되어준다. 힘없고 미천해 보이는 민중들이 주역으로 일어서고 봉건제가 사라져가는 변화의 초입을 당대 일본 사극에서 전제로 등장하기 마련인 사무라이들의 활극과 막후의 정치가 아니라 기층 민중사에 입각해 서술하려는 대안적 시대극임은 물론, 영화의 엔딩을 빛내는 '청춘이로구나!'의 감흥을 통해 늘 짓밟히고 고통당하지만 끝내 (김수영의 시처럼) 폭설과 태풍에도 꺾이지 않는 풀의 저력을 증명하려는 도전이 가득한 작업이기도 하다. 시간대를 초월해 차별과 편견을 경계하고 세상 만물이 연결된다는 지극히 당연한 진실을 돌아보게 만드는 이 영화의 매력은 흑백화면의 정서처럼 은은히 배어나 오랜 잔향을 남길 듯하다. '똥'에 대한 편견과 몰이해를 교정하는 건 '보너스'다.
 
<작품정보>
 
오키쿠와 세계 Okiku and the World
2023│일본│청춘 드라마
2024.02.21. 개봉│90분│12세 관람가
감독 사카모토 준지
주연 쿠로키 하루(마츠무라 키쿠 역), 이케마츠 소스케(야스케 역), 칸이치로(츄지 역)
출연 마키 쿠로도(승려 역), 사토 코이치(마츠무라 겐베이 역),
이시바시 렌지(오키쿠의 이웃 역)
수입/배급 ㈜엣나인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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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15회 TAMA 영화상 최우수여우주연상
2023 22회 뉴욕아시아영화제 평생공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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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24회 전주국제영화제 마스터즈 부문 초청
2023 23회 Nippon Connection 초청
2023 25회 상하이국제영화제 파노라마 부문 초청
오키쿠와세계 사카모토준지 쿠로키하루 이케마츠소스케 칸이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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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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