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 시대극 <수사반장 1958>에는 깡패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이 드라마에서 깡패들이 '경찰의 적'이 아니라 '경찰의 협력자'로 비쳐질 때가 많다.
 
4월 26일 방영된 제3회에서는 종남경찰서장 최달식(오용 분)이 정치깡패 이정재의 행사를 도울 목적으로 경찰관들을 대거 동원하는 장면이 나왔다. 경찰서 전체가 이정재 행사에 동원되는 틈을 타서 종남서 관할구역에서 은행 강도를 벌이려는 일당들이 있었다. 최달식은 이에 관한 보고를 사전에 받고도 경찰관들을 이정재 행사에 파견했다. 경찰과 깡패가 밀착했던 이승만 집권기를 반영하는 한 장면이다.
 
 드라마 <수사반장 1958> 이미지.

드라마 <수사반장 1958> 이미지. ⓒ MBC

 

깡패의 등장

한국인들이 폭력 조직을 깡패로 부르기 시작한 것은 이승만 집권기 때다. 갱(gang)이 들어간 깡패라는 표현은 이 시기부터 유행했다.
 
방성수 조선일보사 기자가 쓴 <조폭의 계보>는 "검찰의 내부 교육자료에 따르면, 깡패란 말은 1945년 해방 이후 미군부대 주변의 구두닦이들이 영어의 gang을 우리식 발음으로 '깡'이라고 읽고 여기에 전통적인 패거리를 지칭할 때 사용하던 패(牌)자를 합해 비속어로 사용한 데서 유래됐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고 설명한다.
 
이정재의 측근인 유지광은 깡패라는 용어가 1953년부터 유행했다고 생각했다. 2014년에 <향토서울> 제86호에 실린 서준석의 '자유당 정권에서의 정치테러'라는 논문은 "깡패란 용어는 해방 이후에 생겨난 신조어"라고 한 뒤 "유지광은 회고에서 깡패란 용어가 1953년 동두천 일대의 미군 부대를 맴돌던 구두닦이 소년들의 입에서 나오기 시작했다고 밝혔다"라며 "신문지상에서도 1953년도 이후부터 깡패라는 용어가 등장하기 시작했다"고 기술한다.
 
이승만 정권은 이런 깡패들의 일부를 정치깡패로 전환시켰다. 그런데 이런 정치깡패는 해방 직후의 극우 청년단체와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정치적 목적을 위한 폭력 행사에 동원됐다는 점에서는 정치깡패나 극우단체나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조직의 정체성은 달랐다. 서북청년단 같은 극우 단체들은 정치 조직의 성격이 더 강한 반면, 이정재 등이 이끈 깡패 단체는 폭력 조직의 성격이 더 강했다. 정치깡패는 '깡패 정치인'과 달랐다. 이들의 본질은 어디까지나 깡패였다. 이런 폭력 조직들이 이승만 정권의 간택을 받아 국정 운영의 파트너가 됐던 것이다.
 
국가는 '사적 폭력'을 억압하고 '공적 폭력'을 제도화하는 기구다. 깡패건 정치깡패건 폭력 조직은 '사적 폭력'에 속한다. 그런 사적 폭력과 제휴했다는 것은 이승만 정권이 국가이기를 포기했다는 의미가 된다.
 
이승만은 독립운동을 방해한 혐의로 1925년에 임시정부에서 탄핵을 당했다. 또 하와이에서 오래 생활했고, 성격이 지나치게 독단적이고 이기적이었다. 그래서 독립운동 진영에서도 기반이 약하고 한국 국내에서도 대중적 기반이 취약했다. 이런 상태에서 미국의 지원을 받아 대통령이 된 그가 집권 뒤에 심혈을 기울인 분야 중 하나는 지지 기반 확충이었다.
 
그 당시 친일세력이나 보수세력의 주류는 김성수의 한국민주당(한민당)을 편들었다. 이승만은 대통령이 되는 단계까지는 한민당과 손잡았지만, 그 직후에 한민당을 배신했다. 그런 일이 있은 뒤에 그의 지지 기반 확충에서 나타난 인상적인 현상은 적산(敵産) 활용과 신흥세력 충원이다.
 
일본인들이 두고 간 재산을 헐값에 불하하는 방법과 지방 토착세력 및 신흥 자본가들을 끌어들이는 방법이 이승만의 세력확장에서 나타났다. 그중 지방세력 및 신흥 자본가들과 관련해 김영모 중앙대 명예교수의 <한국 권력지배층 연구>는 "지방에서 좌익계를 타도하는 데 기여한 지방의 친일 부르주아들이 그 핵심"이었다고 말한다.
 
이승만의 만행

친일청산을 외치거나 한반도 분단을 반대하면 좌익 빨갱이로 불렸다. 해방공간에서 빨갱이 소탕에 나선 세력 내의 비주류가 이승만의 지지 기반으로 충원됐다. 이 세력이 집결한 곳이 이승만의 여당인 자유당이다. 한국전쟁(6·25전쟁) 발발 1년 반 뒤인 1951년 12월 23일의 자유당 창당은 이승만이 전쟁의 혼란을 활용해 지지 기반 확충에 성공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승만은 자유당에 100% 만족하지 못했다. 그는 자신을 도와 자유당을 창당한 한국광복군 참모장 출신의 이범석과 그를 따르는 족청계(민족청년단계)의 파워가 불편했다. 장기집권을 위한 1952년 헌법 개정(이른바 발췌개헌)을 위해 이범석을 내무부장관으로 기용해(1952.5.24) 국회를 무력화하고 개헌을 성사(7.4)시킨 이승만은 그 뒤 곧바로 이범석 축출에 착수했다.
 
임시수도가 부산에 있을 때 자행된 이승만의 불법 개헌은 부산정치파동으로 불린다. 이때 이승만을 도운 이범석은 그 여세를 몰아 그해 8월 5일의 대통령선거에 이승만의 러닝메이트로 출마했다.
 
그런데 이승만은 자신의 러닝메이트를 돕지 않고 무소속 대통령후보 함태영을 도왔다. 이 과정에서 경찰력이 함태영의 당선을 위해 사용됐다. 대통령과 부통령을 각각 선출하는 이 대선은 대통령은 자유당에서 나오고 부통령은 무소속에서 나오는 것으로 결말을 맺었다. 이승만이 이범석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매우 경계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이승만이 애초에 이범석과 제휴한 것은 이범석이 세력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승만이 이 세력을 팽하려면 대안이 될 만한 세력을 확보해야 했다. 이승만 정권은 그 대안을 깡패들 속에서 찾아냈다. 이는 한국 현대사에서 정치깡패 등장의 신호탄이 됐다.
 
위 서준석 논문은 "자유당 정권과 폭력 조직이 긴밀하게 협력관계를 형성하기 시작한 것은 1953년 중반 자유당이 이기붕을 중심으로 재편되는 과정에서였다"라며 "당시 자유당은 창당 주체세력이자 1952년 부산정치파동에서 주요한 역할을 했던 족청계 인사들에 대한 숙청이 진행 중이었다"고 설명한다.
 
자유당 장악의 임무를 받은 이기붕은 이승만처럼 독자적 기반이 약했다. 이기붕은 기반 확충을 위해 깡패들에게 손을 내밀었다. 깡패들과 손잡고 자유당 장악에 나선 것이다. 위 논문은 "이기붕은 단순히 이승만을 충실하게 따르는 비서일 뿐 아니라 여타 경쟁세력들을 제압할 수 있다는 점을 증명해야 했다"고 한 뒤 이렇게 기술한다.
 
"이를 위해 이기붕이 택한 방법은 테러였다. 이기붕은 서울의 이름난 폭력배들인 명동파의 이화룡과 동대문시장의 이정재 등을 접촉했고, 정치적 야망을 품고 있었던 이정재가 그와 손을 잡았다."
 
이정재는 이기붕을 아버님으로 불렀다고 한다. 대표적인 정치깡패가 이승만의 대리인을 아버지로 부른 일은 자유당이 정치깡패의 모태가 됐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이라 할 수 있다. <수사반장 1958>의 종남경찰서장이 은행강도 방비보다 이정재 행사에 더 신경을 쓴 것은 이정재가 정권의 아들이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국가지도자가 폭력조직을 이용하는 일은 다른 나라 다른 시대에도 있었지만, 이승만 정권은 매우 노골적으로 폭력조직과 제휴했다. 사적 폭력을 억압하는 것이 국가의 역할임을 간과한, 국가이기를 포기한 행태였다. 그런 이승만이 윤석열 정권하에서 국부로 숭상되는 것은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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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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