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7회 부산국제영화제 상영작 <라이스보이 슬립스> 스틸컷
부산국제영화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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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영화의 초반부를 관통하는 동현의 어린 시절 이야기에는 인종 차별에 대한 주제 의식이 강하게 드러난다. 그 시절의 이민자 세대가 겪어야 했던 현실적인 아픔이자 빼놓을 수 없는 서러움을 이 작품에서도 강하게 보여줌으로서 현실성을 획득한다. 아이러니한 점은 외부의 인종 차별은 내부의 적응에의 노력으로 치환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 부분은 동현이 다른 친구들의 폭력에 맞서 자신의 폭력으로 저항했을 때 주어지는 불공평한 결과로 정점에 이른다. 문제의 발단이 되는 백인 아이들은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는 것에 비해 동현은 홀로 일주일의 정학 근신 처분을 받는다. 소영이 학교를 찾아 항변에 항변을 거듭해 보지만 그녀의 말을 들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직전에 언급했던 '적응에 대한 노력'은 표현 그대로 숭고한 종류의 것으로 그려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비참하고 처절하다. 외부로부터 가해지는 불공평하고 억울한 날들 앞에 고개를 숙이고 이를 갈며 속으로 삼켜야 한다. 여기에서의 적응은 그런 것이다. 이제 돌아갈 곳이 없는 이들에게 이 땅은 그저 삶을 살아가기 위한 다른 선택지가 아니라 마지막 장소와도 같기 때문이다. '라이스 보이'라고 부르지 말라고 애원을 하면서도 '라이스 보이'를 안고 살아가야 하는, 공장에서의 부당한 처우에도 그 공장을 그만두지 못하고 적응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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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영화는 중반부를 지나 후반부에 이르기까지는 16살이 된 동현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9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두 사람은 제법 안정적인 상황이 되었다. 소영도 공장에서 편하게 이야기를 나눌 동료를 만들었고, 동현도 어울려 다닐 수 있는 친구가 생겼다. 하지만 동현의 삶은 어딘지 모르게 많이 달라졌다. 친구의 집에서 마약을 하고 술을 마시며 소영의 기대와 달리 그리 착실한 모습의 청소년이 되지는 못한 모습. 술과 마약, 담배는 제발 하지 말아 달라던 엄마의 부탁이 있었음에도 그는 조금도 꺼려하지 않는다.
그의 모습이 이렇게 많은 변화를 보이는 동안 엄마의 삶은 별다를 것이 없어 보인다. 처음 타국으로 건너왔을 때처럼 그녀는 여전히 가정을 지지하는 유일한 버팀목이며, 아들 동현만을 걱정하는 인물로 남아있다. 다만 아들이 어렸을 때와 마찬가지로 그를 보살피고 다독거리며 가까운 거리를 유지하고자 하는 그녀의 마음과 달리 동현과의 거리는 점차 조금씩 멀어진다. 이는 두 사람이 쓰는 언어가 완전히 달라지는 순간으로부터 시각적으로 표현되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여전히 한국말을 쓰는 엄마와 이제 영어가 더 편해진 아들의 거리는 단순히 사용하는 언어가 다르다는 의미에서 벗어나 두 사람이 마음을 두고 있는 공간에 차이가 있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소영은 가정의 내부에, 동현은 외부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