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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협은 중국의 것? 이 영화가 모색한 또 다른 가능성

[김성호의 씨네만세 691] <태백권>

24.04.15 14:08최종업데이트24.04.15 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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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다른 시각이, 적어도 두 가지 시각이 있다. 물이 반쯤 담긴 컵을 보며 "물이 반 밖에 없네" 하는 이와 "반이나 있네" 하는 이가 동시에 존재하듯, 작품에 대하여도 서로 다른 태도가 공존할 수 있다. 특히나 만듦새가 조금 빠지는 영화에 대하여서 이러한 태도가 중요한 차이를 빚어내고는 한다.

말하자면 누구는 어느 작품의 단점을 지적하길 즐긴다. 또 누구는 장점을 드러내길 좋아한다. 단점을 지적하는 일은 비판으로부터 나아짐을 생각하게 하고, 장점을 드러내는 일은 작품에 마땅한 평가를 안기는 것으로 둘 모두 비평의 역할이라 하겠다. 그러나 작품이 볼만한 점은 적고 아쉬움이 클 때, 조잡하여 보는 이를 실망하게 할 때, 비평의 두 가지 태도는 극명한 효과의 차이를 내보이게 마련이다.

장점을 끌어내는 비평은 아쉬운 작품에도 긍정적 측면이 있음을 곱씹게 한다. 그로부터 섣부른 결론지음을 경계하게 한다. 반면 단점만 지적하자면 누가 보아도 아쉬운 작품이 어떠한 기능도 하지 못한 채 사라지게 할 뿐이다. 즉 작품의 완성도와 그를 대하는 자세는 서로 호응하며 변화해야 유익한 일이다.
 

영화 <태백권> 포스터 ⓒ 드림팩트엔터테인먼트


흥행 참패 코미디에서 발견한 매력

<태백권>은 2020년 개봉해 혹평만 받은 채 물러난 코미디 영화다. 고작 2000명을 조금 넘는 관객이 들었고, 영화 관련 매체에서조차 평을 찾을 수 없을 만큼 관심을 받지 못했다. 영화를 보고 나면 이 같은 외면에도 나름의 이유가 있는 게 아닌가 생각될 만큼 여러모로 만듦새가 아쉬운 게 사실이다. 오지호와 신소율이란 이름이 알려진 배우들의 출연에도 각본과 캐릭터의 설득력이 없어 그 연기력이 살아나지 못한다. 그 밖에도 수많은 패인이 있을 테지만 굳이 그를 구체적으로 논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굳이 이 영화를 꺼내 곱씹는 건 그럼에도 이 영화로부터 끌어낼 수 있는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 또 그것이 OTT 시대의 도래에도 소재고갈에 빠진 한국 콘텐츠 시장에 자극을 줄 수 있는 때문이다.

콘텐츠가 전과 달리 문화를 넘어 산업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한 지 반 세기 가량이 되었다. 그중에서도 첨단기술과 결합한 지난 10여 년의 콘텐츠 유통방식의 변화는 전과는 전혀 다른 방식의 콘텐츠 제작 및 소비를 이끌어왔다. 필름이 아닌 디지털 시대, 쉽게 찍고 더 많이 소비하는 것이 가능해진 21세기 영화예술은 더는 한 편의 영화를 더 완성도 있게 높이는 데 전력투구하지 않는다. 지속이 가능한 콘텐츠를 쏟아낼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관객이 더 오래, 더 많이 관련 콘텐츠를 소비하도록 이끈다.
 

영화 <태백권> 스틸컷 ⓒ 드림팩트엔터테인먼트

 
한국영화 속 시리즈 세계관의 가능성
 
세계관 구축은 관객이 특정 콘텐츠에 오래 머물도록 하는 효과적 수단이다. 마블과 DC코믹스로 대표되는 미국 만화 기반 영화들이 전 세계적 흥행을 이루면서 잘 알려지지 않았던 캐릭터조차 슈퍼스타로 만들어온 지난 20여 년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한국에서도 <범죄도시>와 같은 시리즈가 특별히 새로운 이야기 없이도 거듭 흥행에 성공하고 있지 않은가. <반지의 제왕>이며 <해리포터> <듄> <헝거게임> <신비한 동물사전> 등 저만의 세계관을 바탕으로 세계적 흥행을 이루어낸 영화가 끊이지 않고 제작돼 온 것도 세계관을 구축한 작품군이 발휘하는 힘의 크기를 보여준다.
 
외연적으로 전성기를 맞이한 한국영화 가운데 과연 몇 편이나 저만의 세계관을 구축하고 있는가를 따져보면 아쉬움을 금하기 어렵다. <범죄도시>를 비롯하여 속편이 꾸준히 나오는 작품이 없는 건 아니지만 캐릭터를 넘어 세계관이라 부를 만큼 틀이 닦인 작품을 만나기는 어려운 게 사실이다.
 
어쩌다 <콘크리트 유토피아>처럼 현실로부터 한 걸음 떨어진 세계관을 보이는 작품이 흥행에 성공한다 해도 단편으로 끝나기 일쑤다. 판타지며 공포, 그밖에 창의적인 세계관의 작품이 각광받는 시대에도 그처럼 도전적인 작품을 만나기 어렵단 건 아쉬운 대목이다.
 

영화 <태백권> 스틸컷 ⓒ 드림팩트엔터테인먼트

 
무협은 중국 중심이어야 할까?
 
<태백권>은 한국적인 무협과 판타지의 세계관 구축이 얼마든지 가능함을 일깨운다. 한국에서 쓰인 무협지조차 대부분 중국을 배경으로 하고 있음을 살펴볼 때 이 영화가 깔고 앉은 한국적 무협의 틀은 인상적이라 할 만하다. 태백산과 금강산, 백두산의 정기를 받은 문파가 있고, 그곳의 무예 전승자가 있으며, 속세와는 떨어져 저만의 터전을 이루고 있음을 이 영화는 말한다. 그로부터 저만의 독문무공을 선보이고 오래 얽힌 사연들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이다.
 
중국 중심 무협 세계관에선 9파1방이라 불리는 문파들이 저마다의 독문 무공을 가르쳐 발전시킨다. 일찍이 김용의 <영웅문>을 위시한 무협의 전성시대 가운데 정립된 세계관은 소림과 무당, 화산, 아미, 청성, 곤륜, 종남, 점창, 공동의 아홉 개 문파와 개방이라는 정보집단, 또 여러 세가와 종교까지 더하여서 속세와 대비되는 무림이라는 세상을 그려낸다. 그 가운데 태어난 이야기가 무협과 신무협, 퓨전판타지에 이르는 수많은 작품군을 만들어냈는데, 한국에서도 관련된 작품이 수천 편은 쓰인 일이다.
 
불교와 도교, 그 밖의 여러 종교와 사상이 넓은 영토와 문화권과 어우러지며 이 같은 세계관의 구축에 영향을 주었음은 분명하다. 반면 한국에는 오랜 역사성과 잘 닦인 사상이며 학문에도 불구하고 독자적인 작품이 얼마 쓰이지 못하였다. 오늘날 한국적 판타지가 얄팍하단 평가를 받는 데는 이러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태백권>은 태백에 터 잡은 문파의 독문무공 태백권을 둘러싼 이야기다. 성준(오지호 분)은 사형 진수(정의욱 분)와 함께 일인전승되는 태백권의 전승자가 되기 위해 수련을 거듭한다. 마침내 진수와 대련을 펼쳐 승자는 전승자가 되고 패자는 스스로 무공을 폐해야 하는 결전의 날이 닥쳐온다. 그러나 전날 밤 진수가 홀연히 자취를 감추고 성준은 무공의 비기를 전수받지 못한 채 사형을 찾아 속세로 내려오기에 이른다.
 

영화 <태백권> 스틸컷 ⓒ 드림팩트엔터테인먼트

 
한반도 독자적인 무협의 가능성을 꿈꾸다
 
영화는 성준이 속세에서 보미(신소율 분)를 만나 가정을 이루고 지압원을 차려 생계를 이어가는 과정을 그린다. 진수는 찾을 길 없고 생계는 감당하기 벅찬 것인데, 성준과 보미 앞에는 재개발과 폭력적 철거라는 위기까지 닥쳐온다. 심지어 태백의 오랜 맞수인 백두와 금강까지 모습을 드러내니 무공을 완전히 이어받지 못한 성준은 이를 완성하기 위해 각별히 노력하게 되는 이야기다.
 
영화는 보잘것없는 수준에 머무르고 말았으나 그것이 구축한 세계관만큼은 결코 가볍게 넘겨선 안 되는 작품이다. 한국엔 다양한 무공이 있고, 그 가운데는 실전된 무예 또한 여럿이 있다. 또한 한국엔 다양한 명산과 사상, 또 지역이 있고, 그로부터 여러 문파의 가능성을 피워낼 수도 있는 일이다. 그렇다면 김용에서 시작하여 마침내 수많은 콘텐츠의 장을 연 무협의 세계관을 한반도 안에서 새로이 구축하지 못하란 법도 없다.
 
<태백권>이 가진 제일가는 미덕은 바로 그 가능성에 있다. 한국만의 독자적인 무예를 상상하고, 문파를 상상하고, 삶의 방식을 그려낸 영화가 가진 가능성 말이다. 태백과 금강과 백두가 가능하다면 지리며 한라며 수많은 명산 가운데서도 이야기와 인물이 탄생할 수 있는 일이다. 그것이 실존했느냐를 따지는 건 의미 없는 논쟁이 될 뿐이다. 김용이 속세와 분리된 무림이란 차원을 열어내어 수많은 콘텐츠를 태어나게 했듯이 한반도 위에 그와 같은 작업을 해내면 될 일이니 말이다.
 
세계관의 구축만큼 콘텐츠의 범람 가운데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성공을 가능케 하는 수단이 없다는 것, 그리고 <태백권>은 그 가능성을 품고 있는 영화라는 것, 이 영화로부터 끌어올릴 이야기가 있다면 바로 이것이라고 하겠다.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얼룩소(https://alook.so/users/LZt0JM)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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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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