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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진우 씨는 <문학동네> 겨울호에서, 김정란 씨가 '제 멋대로식' 비평을 일삼는다는 근거로 시인 김언희 씨에 대한 비평을 논거로 제시했다.

즉, 김정란 씨가 김언희 시인의 작품들에 대해, 어느 글에서는 엄하게 비판했다가, 다른 글에서는 '세계사 시인선'이 아니었으면 잃어버렸을 빼어난 시인 중 한 사람으로 상찬하고 있다며 혹독히 비판한 것이다.(조선일보 11월 20일자 문화면 보도)

이에 대해, 김정란 씨는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세계사 시인선집의 글은 김언희 씨에 대한 개인적 비평이 아닌 전혀 다른 맥락에서 쓰여진 것인데도, 남진우 씨가 문맥과 관계없이 특정 문장만 뽑아내어 비판함으로써 상호 모순되어 보이도록 왜곡했다고 주장했다.

두 가지 상반된 견해 중 어느 쪽이 타당성 있는 주장인지 독자들이 판단해 볼 수 있도록, 남진우 씨가 인용한 문장이 실린 원문을 아래에 싣는다. 첫 번째 글은 <월간 현대시 97년 12월호 대담>을, 두 번째 글은 <세계사 시인선집 100권 발간 기념 시집 해설>을 발췌한 것이다.(단, 원문이 상당히 길므로, 김언희 시인에 대한 김정란 씨의 평가와 무관한 부분 일부는 생략한다.)

* 현대시 97년 12월호 대담

김정란:한국 근대사는 늘 격동기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만, 올해도 예외없이 복잡한 사건들이 많았던 한 해였습니다. 정치적·경제적 혼란이 정말 극에 달했다고 보여집니다. 시인들의 작업은 그래서인지 상대적으로 위축된 것처럼 보였구요. 《현대시》에서는 올해 한 해, 시적 작업을 정리해보는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중략)

시의 입장은 옹색해질 대로 옹색해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생산되고 있습니다. 올해도 월간지 계간지들을 통해서 많은 시들이 발표되었고, 중견 시인들을 위시한 많은 시인들이 시집을 냈습니다. 우선 시단의 전체적인 동향부터 점검해 보도록 하죠. 올해 출판된 시집들을 살펴보면, 우선 눈에 띄는 현상이, 그 동안 출판사 별로 일정한 특징을 보였었는데, 그 특색이 많이 사라진 것같다는 느낌이 들거든요. 문지 시선이나 창비 시선의 특색이 우선 많이 흐려졌습니다. 세계사 시인선은 그런대로 아직까지 어떤 색채를 고수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만...이 점은 아마도 한국 문학의 현실적 여건과 어떤 연관이 있을 것처럼 생각됩니다. 이 점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이야기를 나누어 보도록 하죠.

(중략)

김정란:올해에 출간된 시집들을 일별해 보면, 신인들의 활약이 오히려 주춤한 상태에서 상대적으로 중견들의 시집 출간이 활발했던 것같습니다. 정진규, 이승훈, 이시영, 마종기, 김형영, 정호승, 최승호, 김혜순, 안도현, 문충성 씨 등 중요한 시인들이 각각 시집을 출간했고, 시집이 나온 것은 아닙니다만, 강은교 씨도 그간 뜸했던 작업을 활발하게 재개하고 있습니다. 이 현상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요? 제 개인적인 견해로는, 이 현상은 유하 씨나 하재봉 씨 등을 중심으로 한 포스트모더니즘 시가 주춤해 보이는 현상과 무관하지 않을 것 같은데요. 남선생님께서는 출판 일선에 서계시니까, 정확한 감각을 가지고 계실 것 같은데...

남진우:우리 문학이 그만큼 성숙했다는 징표의 하나겠지만 시단의 인적 구성이 굉장히 다양해지고 연령층 역시 두꺼워졌습니다. 위로 서정주 구상같은 원로부터 아래로 70년대産 젊은 시인에 이르기까지 각기 다른 시대의 자장을 통과해온 시인들이 각개약진하고 있는 형국입니다. 중견시인들의 건재는 참 반가운 현상이지요. 그만큼 우리 시가 건강하게 약동하고 있다는 점을 일러주니까요. 포스트모더니즘의 유행과 관련해 이야기하자면 지금 열심히 활동하고 있는 중견시인들 중 몇몇은 아직도 포스트모더니즘 신봉자의 대열에 서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시적으로 별로 신통한 결과물을 내놓지는 못한 것 같아요. 젊은 층의 경우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유행적 관심은 상당히 퇴조한 반면 서서히 내면화의 단계에 접어든 것처럼 보입니다. 앞으로의 작품이 기대됩니다.

(중략)

김정란:같은 맥락에서 최근에 계속 얘기되고 있는 <몸>을 둘러싼 담론들 역시 저는 조금 불안하게 느껴지거든요. 김혜순 씨와 채호기 씨가 생산해 내고 있는 시들은 일정한 성취를 확보하고 있다고 보여집니다만, 이 문제가 <여성 육체>에 관한 논의로 넘어오면, 굉장히 큰 혼란을 불러일으키거든요. 이를테면, 김언희 씨는 계속해서 엽기적인 방법으로 여성적 육체를 전시하는 작업에 매달려 있습니다. 이러한 시도가 시인 자신의 내적 추구와 연관되어 있는 의미있는 작업인지, 아니면, 역시 사회가 생산해내는 문화 유행 코드를 추수하는 것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이희중:개성적인 시인들의 시세계를 모아서 하나의 용어로 규정함으로써 잃는 것이 있을 듯합니다.

김정란:어쩐지 대답을 회피하시는 것 같군요(웃음). 남선생님께선 어떠십니까?

남진우:개인적으로 김언희의 시를 대단히 좋아합니다. '끔찍주의’라고나 할까요. 그녀의 시는 고기와 뼈 그리고 점액으로 이루어진 인간의 몸뚱어리를 가차없이 해부해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녀의 극렬한 언어는 읽는 사람의 인내심을 시험하면서 '인간의 죽음’이란 고전적 주제를 환기시키는데 성공하고 있습니다. 물론 거기엔 수사적 과장이 곁들여지고 있습니다만, 그 과장조차도 일정한 시적 효과를 창출하고 있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습니다. 인간에 대한, 육체에 대한, 그리고 性에 대한 어떠한 환상도 거부하고 있다는 점에 그녀 시의 매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있지요. 더 나아갈 수 있는 터널이 원천 봉쇄돼 있다고나 할까요. 그렇게 되면 남는 건 동어반복밖에 없는데 요즘 그녀의 시엔 그런 매너리즘의 흔적이 보여요. 그녀를 포함해서 ‘몸’이라는 테마에 열중하고 있는 시인들이 모두 부딪칠 수밖에 없는 한계지점이 있다고 여겨집니다.

김정란:이 부분에선 남선생님의 견해는 제 견해와 정면 충돌하는 것 같습니다. 김언희 씨의 시는 제가 보기엔 문제가 많거든요. 두 가지 문제를 지적하겠습니다. 우선, 그녀가 제시하는 육체 전시 방법은 여성에 의해서 여성 육체에 가해지는 성폭행이라고 불릴만한 요소를 가지고 있어요. 좀더 심하게 말하자면, 시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강간이라고나 할까요. 가장 자극적인 방법으로 남성들의 가학충동을 만족시켜 주고 있는 셈이지요. 남성을 대신해서 기꺼이 여성의 육체를 난도질해서 구경시켜 주고, 그 몫을 문학적으로 챙기는 것이지요. 다음으로는, 시인의 윤리적 태도가 문제인데요. 그녀의 시적 선택은 윤리적 파탄에 이른 우리나라 정치 행태와 닮은 데가 있습니다. 어떤 선택이 어떤 내적 필연성을 가지고 있는가는 조금도 중요하지 않아요. 나라 꼴이야 어떻게 되든 표만 긁어모을 수 있다면, 무슨 짓이든 마다 않는 정치가들처럼, 이 시인도 자신의 시적 선택이 어떤 부정적 결과를 가져올지 아무 관심도 없습니다. 그저 눈길만 끌어당겨서 자신의 몫만 챙기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게 또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참담한 점인데요. 남성 시인들은 대체로 그녀의 시를 아주 좋아하거든요. 여성 시인들은 거의 모두 진저리를 치고 말이죠.

인간과 육체에 대한 '환상’이 없다고 말씀하셨는데, 저는 김언희 씨의 시야 말로 가학적 환상을 충족시켜주는 시라고 생각합니다. 육체는 조금도 신비스러울 것 없는 '거기 있는 부피’이지요. 그러나 그렇다고 그렇게 추악한 것일까요? 이 추악한 육체 전시 방법은 결국 육체에 대한 뒤집힌 환상에 불과합니다. 제가 김언희 씨의 시에서 문제삼는 것은, 그것이 근본적으로 생에 대한 '증오’에 의해 쓰여진다는 것이지요. 물론 '증오’ 자체가 문제된다고 말하려는 건 아닙니다. 그것도 하나의 선택이니까요. 문제가 되는 것은, 시인 자신은 증오가 생산해내는 부정적 에너지로부터 너무나 얌체처럼 완전히 비켜서 있다는 것이지요. 증오의 흙탕물은 시인 자신에게 한방울도 튀지 않습니다. 생을 담보로 하고 있지 않은 가짜 코드니까요.

그녀의 문학적 재주에 관해서는 어느 수준까지 저도 동의합니다. 그러나 잘 들여다보면, 아주 빤하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약간의 재주를 가지고, 동시대의 여성시인들이 그토록 이해받지 못하며 힘들게 경작하고 있는 여성적 정체성이라는 돌짝밭의 개간 노력을 한꺼번에 초토화시킨다는 것은 일종의 문학적 파탄이지요. 남선생님처럼 문학적 감수성이 뛰어나고, 문학적으로 진지한 태도를 견지해 온 분조차 '여성 육체’의 문제에 대해서는 그토록 무심할 수 있다는 것이 우리 평단의 현실인 것처럼 느껴져서 씁쓰레한 느낌이 드는군요.

얘기가 길어졌습니다. 자, 화제를 바꾸어 보죠. 앞에서 이승훈 시인의 작업을 놓고 얘기를 나누었는데, 정진규 시인의 작업 역시 언급할만한 부분이 있습니다. 정진규 시인과 최승호 시인의 시는 묶어서 언급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우선, 두 시인 모두 동양적 자연 회귀를 기조로 한 우화시들을 쓰고 있죠?
(후략)


다음은, 남진우 씨가 김정란 씨가 한 글에서 비판했던 시인을 다른 글에서 상찬했다고 주장한 근거가 되는 글이다. 김정란 씨는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김언희 시인에 대한 개인적 비평이 아닌 '세계사 시인선'에 대한 평가를 한 글이므로 전혀 다른 맥락임에도 왜곡된 비판을 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 세계사 시인선집 100권 발간기념 시집 해설

<세계사 시인선>에 대한 문학적 평가

김정란(시인, 상지대 인문사회학부 교수)

한 출판사의 문학적 경향, 또는 수준은 그 출판사의 <시인선>으로 가장 잘 드러난다. 문학은 언어의 자의식을 통해 구성되며, 언어적 자의식의 전위를 형성하는 것은 언제나 시이기 때문이다. 한 문학 출판사가 어떤 문학을 지지하고 있는지, 그 문학의 궁극적 색채가 어떤 것인지, 그 출판사가 겉으로 표방하는 문학적 입장과 실제로 지지하는 문학이 같은지 다른지, 또 과연 정리되어 있는 분명한 문학적 입장을 가지고 있는지 알고 싶으면, 그 출판사의 <시인선>을 살펴보면 된다. <시인선>은 그만큼 한 출판사의 문학적 자의식(또는 언어적 자의식)을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 <시>를 제대로 모르면, 문학뿐만 아니라 다른 문화 장르도 제대로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요즘 유행하는 용어를 사용해서 말한다면, <시의 선택>을 놓고, 한 출판사의 편집자는 자신의 문학적 정확성을 질문받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문학적 의미에서 정치성을 명확히 하라는 요구와 같다. 탈근대사회에서 문화를 다루는 자는 언제나 정치적 정확성political correctness을 드러낼 것을 주문받기 때문이다. 소설이나 기타 다른 장르와 달리, 시의 선택은 언어적 의미에서 정치적 정확성을 숨길 수 없다. 내러티브 뒤에 숨어서 언어적 자의식을 숨길 수 있는 소설과 달리, 시는 언어 그 자체가 정치성을 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았을 때, 세계사의 문학적 입장은 아주 뚜렷해 보인다. 세계사는 어떤 출판사보다도 확신을 가지고 실험성있는 문학에 투자해 왔다. <세계사 시인선>의 성격이 그것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이 시인선은 한국 문단 안에서 아주 독특한 입지를 구성하고 있다. 알려진 대가급 시인들보다도 젊고 발랄한 힘없는 목소리들을 발굴하는 데 더 힘을 기울여왔던 것이다. <세계사 시인선>은 한국의 어느 출판사의 시인선보다도 탈권력적, 탈중심적인 언어의 전위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것은 한 출판사로서는 내리기 쉽지 않은 결정이다. 권력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언어의 전위>를 고수한다는 것이 생각처럼 쉬운 일도 아니고(더군다나 대중의 정서적 수준이 그토록 완강하게 전근대성을 고수하고 있는 사회에서), 또 아무래도 상업적으로 많은 부담이 되기 때문이다.

(중략)

세계사의 시인선은 한국 사회에서 언제나 새로운 언어의 아비투스를 구성하려고 애쓰는 힘없는 시인들에게 방점을 찍어 왔다. 다른 출판사들이 어떤 진영을 형성하고 그 안에 안주하며 권력을 발생시키는 동안, 이 출판사는 다만 <문학적>이기 위해서 안간힘을 써왔다. 겉보기에 전위적으로 보이는 다른 출판사들의 시인선이 오히려 전통적인 정서나 상업주의적 색채를 고수하거나 또는 일관성없이 흔들리는 데 반해서, 세계사의 시인선은 놀라울 정도로 참신하고 전위적이며, 상당한 일관성을 유지하고 있다. 거의 <비타협적>이라고 보인다. 한국 문단의 전반적 행태를 감안할 때, 이 특징은 대단히 신선하고 놀랍다. 물론, 모든 시인선이 그렇듯이 경향이나 수준, 그리고 시인들의 선택 기준이 이따금 흔들리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세계사 시인선의 대체적인 방향은 한국의 어느 출판사의 시인선보다도 분명하다. 과감한 실험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이 출판사의 출판 행태가 한국 문학의 큰 특징을 구성하고 있는 연고주의나 온정주의, 그리고 90년대 들어 기승을 부리고 있는 상업주의와 무관했기 때문에(적어도 <시인선>에 있어서만은 세계사의 선택은 <문학적 고려>가 매우 두드러진다) 가능했던 일이라고 생각된다.

<세계사 시인선>이 아니면 따를 수 없었을 원칙에 의해 선택된 시인들이 이 시인선에 다수 포함되어 있는 것이 그 사실을 증명한다. 이연주, 김신용, 박순업, 이향지, 진이정, 허연, 노태맹, 이경림, 김형술, 박서원, 김언희, 박상순, 박서원, 성미정, 김상미, 박정대, 이수명, 함기석, 최정례(지금 출간 준비중인 김윤배, 박남철, 노혜경 등도 꼽을 수 있다) 등은 이런 저런 이유로 인해 한국 시단에서 주류에 편입되기 힘든 시인들이다. <세계사 시인선>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이 빼어난 시인들을 십중팔구 잃어버렸을 것이다.

(후략)

위 원문들을 비교해 본 결과, 남진우 씨의 비판이 과연 적절한지 의문이 든다. 김정란 씨에 대한 남진우 씨의 비판이 정당한지와는 별개로 또 하나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김정란 씨는, <인물과 사상12>(개마고원)을 통해, 남진우 씨가 편집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는 '문학동네'가 94년 출범 이후 초고속 성장을 해 온 것은, 조선일보의 특별한 배려에 의해 가능했다고 주장한 바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조선일보 문화부 박모 기자는 애초 '문학동네' 출범시 편집위원으로 참여했으며, '문학동네' 소속 문인들과 글을 지면을 통해 집중적으로 띄워주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고 한다.(1999년 1월 6일자 <문학동네 출범 4년만에 '90년대 문단' 중심에> 등)

('문학동네' 홈페이지는, 96년 겨울호까지 편집위원으로 활동한 조선일보 박모 기자의 이름을 창간호 편집위원 명단에서 빼놓았다는데, 이유가 궁금하다.)

이에 대해, '문학동네' 측은 현재까지 김정란씨의 비판에 대해 공개 반론이나 해명을 일체 하지 않은 상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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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분야에서 이런저런 일을 하였고, 지금은 고등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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