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폭 바람'의 배경에는 삼위일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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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의 한 장면. ⓒ자료사진
올 봄 곽경택의 <친구>를 시발점으로 이어지고 있는 한국영화의 '조폭 바람'은 2002년을 목전에 둔 12월까지도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신라의 달밤>과 <조폭 마누라>가 <친구>의 바통을 이어받아 롱런 태세를 갖추더니 이어지는 <달마야 놀자>에서는 조계종 지도부까지 관객으로 가세했다.

이 '바람'을 든든한 후원자로 등에 업고 12월14일 개봉예정인 '2001 한국 조폭영화의 결정판(?)' <두사부일체>. 12월 6일자 모 스포츠신문에 따르면 영화의 시사회장에 나타난 메이저리그의 두 영웅-영웅이란 단어를 이렇게 막 붙여도 되는지는 의문이지만 어쨌건- 박찬호와 김병현은 "우리 정서에 맞았고, 마음을 울린 영화"라고, "감동이 돼 눈물이 다 나왔다"고 <두사부일체>를 추켜세웠단다.

박찬호건, 김병현이건 한 사람의 영화관객으로 영화를 보고 그 작품에 관해 한마디 한 것이야 무슨 잘못이 있을까. 하지만 영화전문가도 아닌 야구선수들의 영화관련 '코멘트'를 1면에 싣고, '박찬호와 <두사부일체>의 주연배우 정준호가 동향(同鄕)'이라느니, '시사회가 끝난 뒤 뒤풀이를 위해 모처로 이동했다느니'하는 시시콜콜한 개인사를 대서특필한 그 신문의 보도태도는 "스포츠지가 으레 그렇지"라는 푸념만으로는 선뜻 수긍하기가 힘들다.

바로 이런 언론의 무비판적 조폭영화 띄워주기는 정상적 사고방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조폭의 전성시대' 도래에 한몫을 담당하고 있다. 여기에 '돈 되는 영화'만을 만들려는 충무로의 제작관행이 보태지고, 관객의 고질적인 '영화 편식증'까지 가세해 만들어낸 삼위일체(三位一體). 그 아래서 우리는 지금 "깡패 만세!"라는 얼토당토않은 숭배의 함성을 내지르고 있는 건 아닐까?

영화 속 조폭, 현실의 조폭

앞서 언급한 영화들에 등장하는 조직폭력배의 모습은 화려하고 멋있다. 화려하고 멋있는 것만으로는 모자라 가끔 아니, 자주 의인(義人)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배기량 3000cc의 검은색 세단을 타고 특급호텔에서 프랑스정식을 먹는 그들의 씀씀이는 중소기업 사장을 능가하고, 걸쳐 입은 아르마니 정장의 맵시는 패션모델 뺨을 칠 정도다. 뿐이랴, 힘없는 친구가 아무리 큰 실수를 해도 "괜찮다. 친구 아이가"라는 한마디로 용서할 만큼 아량도 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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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폭 마누라>의 한 장면. ⓒ자료사진
죽음을 앞둔 언니를 위해 마음에도 없는 사람과 억지결혼을 하고, 사랑하는 분식집 주인 처녀를 위해 싫어하는 라면을 매일 먹는 순정까지 보여준다. 거기서 그치는 게 아니다. 흠모하는 여교사를 떠올리며 두목의 영어작문 숙제를 대신해주고, 대로 한복판에서 불편한 관계에 있는 연적(戀敵)의 손을 마주잡고 흔들며 걸어가는 귀여움도 발휘한다.

여기까지는 그래도 참을 만하다. 이런 사람, 저런 사람이 있듯, 이런 깡패, 저런 깡패가 있을 수 있으니까. 하지만 엇나간 한국의 학교현실에 분노하여 부패한 사학재단과의 의로운 싸움에 나서는 '지사(志士)적 조직폭력배'와 열심히 공부해서 반에서 10등 안에 들면 부하로 삼아준다며 철없는 학생들을 타이르는 '학구적 조직폭력배'까지 영화에서 만날 때면 실소를 금할 수 없다.

모든 것은 '영화적 표현의 하나'일 뿐이라는, '영화적 현실과 사회적 현실에는 차이가 있다'는 말만으로 이 모든 것이 이해가 가능한가? 묻겠다. "모든 예술은 당대 사회현실의 반영"이란 명제가 있다. 영화만이 이 명제에서 자유로울 수 있나? 만약 자유로울 수 있다고 대답한다면 영화는 예술이 아닌가?

현실에서의 조직폭력배 혹은, 깡패는 어떤가. 서민들을 대상으로 고리(高利)의 대출을 일삼고, 돈의 회수를 위해서라면 협박과 폭행은 물론 여성 대출자에게 '신체포기각서'를 쓰게 만들고 매춘까지 시키는 자들이 조직폭력배다.

영세한 상인들에게 '보호비'라는 명목으로 금품을 갈취하고, 재개발 지역 힘없는 보통사람들에게 쇠파이프와 각목을 휘둘러 그들을 생존의 벼랑 끝으로 몰아가는 전위부대가, 마약류의 생산과 유통에 관여해 대규모의 이권을 챙기고, 관할구역(나와바리)을 지킨다는 턱없는 명목으로 밤거리에서 시퍼런 칼을 휘두르며 죽고 죽이는 살벌한 패싸움을 벌이는 자들이 조직폭력배다.

죄를 짓고 벌을 받으러 들어간 교도소에서조차도 폼을 잡고 으스대며 교도관들에게 특별대우를 요구하는 자들이, 가출한 10대 소녀들을 감금시키고 몸을 팔게 만들어 그 눈물 묻은 돈을 빼앗아 착복하는 파렴치한들이 바로 조직폭력배다.

'힘'이 곧 '정의'가 되는 괴이한 세상

현실에서 드러나는 조폭의 모습은 인면수심(人面獸心)의 잔인함을 보이는 패륜아의 그것인데도 불구하고 왜 관객들은 그런 조폭을 그려낸 영화에 환호를 보내며 열광하는 것일까?

그 이유는 '힘이 정의가 아니라, 정의가 힘이 되는 사회'에서 단 한번도 살아보지 못한 한국의 부끄러운 역사와 짧은 시간을 사용해 단숨에 인간을 굴복시킬 수 있는 '폭력'에 대한 비뚤어진 숭배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5.16 군사쿠데타 이후 30여 년을 지속된 군사독재. 70~80년대 총칼에서 나오는 '힘'은 곧 정의와 진리였다. 그 시절 교사들은 다수의 학생들을 효과적으로 지도한다는 명목 아래 곧잘 '설득' 대신 '몽둥이'를 휘둘렀다. "조선놈과 명태는 맞아야 한다"는 식민지 시대 일경(日警)의 말을 부끄러움도 모른 채 그대로 인용하며.

현재 조폭영화의 시나리오를 쓰고 이를 제작하는 사람, 만들어진 영화를 관람하고 열광하는 사람의 대부분은 바로 그 시절을 살아온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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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마야 놀자>의 한 장면. ⓒ자료사진
왜곡된 것일망정 '힘'이라면 그것이 긴급조치와 계엄령을 수시로 발동해 국민들을 공포에 떨게 만든 유신독재건, 한 도시를 죽음의 쑥대밭으로 만들고 들어선 군인들의 정권이건 '정의'라고 배웠고, 효율적 수사를 위해서는 인간을 파멸에 이르게 한다는 '극단적 폭력' 고문조차도 공공연히 용인된 시대를 허위허위, 겨우겨우 견디며 살아온 사람들.

하지만 '모든 잘못은 시대에게 있으니 조폭영화를 제작하는 개인의 과오에는 면죄부를 주자'는 발상은 위험하다. 예술에 있어서 '선택·향유권'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바로 '대중 파급력'이기 때문이다.

조폭영화를 만들어 혼자서 보고 낄낄대는 제작자와 감독, 시나리오 작가를 책할 사람은 없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한국에서 조폭영화란 이미 수백만 명의 관객을 동원할 수 있는 고부가가치의 문화상품으로 자리를 잡았다. 영화의 대중파급력은 어느 장르의 예술도 따라갈 수 없는 상황으로 가고 있고, 이 현상의 가속화는 불을 보듯 뻔하다.

바로 이 시점에서 우리는 예술이 가진 '시대를 이끄는 힘'에 주목해야한다. 대중을 추수하는 것이 아니라, 시대와 그 시대 속 사람들을 일깨우는 역할.

여기에서 굳이 <라 마르세에즈>가 1789년 프랑스 혁명 당시 파리 민중들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파블로 네루다의 시 한 편이 칠레 광산노동자들에게 어떤 힘으로 작용했는지를 재삼 거론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왜 그 노래가 프랑스 국가가 됐으며, 네루다가 어떤 이유로 칠레의 국민시인으로 추앙받는지도.

결국 예술이란 시대와 장소를 뛰어넘어 대중에게 미친 '긍정적 영향력'을 기준으로 평가받는 것이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 <친구>와 <신라의 달밤>, <조폭마누라>와 <달마야 놀자> 그리고 <두사부일체>가 의도하지 않았건 혹은, 의도한 것이건 관객들에게 보여준 '조직폭력배 미화'와 '폭력 숭배'는 시간이 흐른 후 어떤 평가를 받을까?

'폭력'과 '조폭'의 찬미를 중지하라

기자는 "모든 문화예술은 프롤레타리아의 중심에 굳건한 뿌리를 내려야 한다"는 레닌의 지난 시절 러시아적 테제를 아직까지도 들먹이는 과거회귀론자가 아니다. 그러나, '재미만 있는 영화'와 '의미를 가진 영화'를 동일선상에 놓고 단순하게 저울질하는 것에는 단호하게 반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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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사부일체> 포스터. ⓒ자료사진
'좌편향'만큼이나 위험한 것이 '우편향'이며, '육식주의' 이상으로 위험한 것이 '채식주의'다. 다른 모든 가능성을 젖혀둔 채 '조폭편애'와 '깡패숭배'만을 향해 달리는 한국영화는 이미 넘지 말아야 할 선까지 넘었다. 도대체 깡패를 미화해서 무얼 어쩌자는 것인가? 폭력을 찬양하는 노래로 우리는 어디에 가 닿을 수 있나?

이 물음에 정확하게 답하지 못한다면 "조폭영화를 만드는 사람은 조폭에 다름 아니다"라는 비판으로부터 한국영화계는 결코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김지하의 어투를 빌어 한국영화를 향해 이런 고언을 던져본다.

"한국의 영화제작자들여! 나는 중언부언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지금 당장 폭력의 찬미를 중단하라. '조폭의 굿판'을 걷어치워라. 그대들은 옳지 못한 길을 걷고 있다. 스스로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알면서도 모른 체 하며."
2001-12-06 21:09 ⓒ 2007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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