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이야기

권장 공식 음악 : 메레디쓰 브룩스(Meredith Brooks)의 'Bitch'

대학로를 향하는 버스는 종로 5가를 지나고 있었다. 어둠이 이미 으슥으슥 깔리기 시작한 창 밖은 약국들의 커다란 네온사인으로 반짝였다. 약국 간판을 한참 쳐다보고 있자니 피임약과 생리대, 탐폰 등의 여성용품이 떠올랐다.

▲ 탐폰
ⓒ 배을선

탐폰이라. 보통의 경우 여성의 국부(局部)에 넣어서 혈을 흡수시키는 데에 쓰는 생리용 도구인 탐폰을 다른 용도로 사용한다면 어떻게 쓰일까. 성새론 감독은 영화 <탐폰설명서>(Tampon Manual)를 통해 탐폰은 여성의 마스터베이션 도구로도 이용되며, 레즈비언의 섹스 도구로도 사용될 수 있다는 기가 막힌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그녀의 이런 발상은 그녀의 성 정체성과 관련이 있다. 그녀는 레즈비언이다.

그녀와의 인터뷰. 사실 긴장도 조금 했다. 그녀가 날 좋아하면 어쩌지? 아니 내가 그녀를 좋아하게 되면 어쩌지? 어쩌긴 뭘 어째. 성 정체성에 혼란은 조금 오겠지만 레즈비언도 나쁘지 않지.

두 번째 이야기

권장 공식 음악 : 매디슨 아베뉴(Madison Avenue)의 'Don't call me baby'

그녀를 만난 곳은 대학로의 한 멕시코 음식점. 아담한 키에 마른 몸의 성새론 감독은 졸업을 앞둔 대학 4학년생이고, 이번 인터뷰 기사는 그녀의 커밍 아웃이 된다.

그녀가 탐폰을 처음 사용한 곳은 수영장이었다. 삽입하기 전 탐폰을 만지작거리던 그녀는 '탐폰을 탐폰으로만 쓰란 법 있나?'라는 생각을 했고 그 생각은 바로 영화 <탐폰설명서>로 이어졌다.

모두 3부로 이루어진 영화에서 1부는 '정확한 탐폰 삽입법', 2부는 '마스터베이션 도구로서의 탐폰', 3부는 '레즈비언들의 섹스도구로서의 탐폰'을 이야기한다.

▲ 성새론 감독
ⓒ 배을선VX2000, PD100, DSR200 등의 디지털 캠코더와 블루 스크린 스튜디오 등을 빌려 총 제작비 250만원에 제작한 영화 <탐폰설명서>는 괴상한 3류 영화같은 느낌도 나지만 결국 여성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를 터득하도록 연출된 퀴어영화다.

이 영화는 그녀의 대학졸업작품이면서 지금과 같은 실업난에 그녀에게 일자리를 알선해준 반가운 생산물이다. 그녀는 현재 싸이더스 연출부에서 영화 <연풍연가>를 제작했던 박대영 감독의 다음 작품을 위해 일하고 있다.

세 번째 이야기

권장 공식 음악 : 서피스(Surface)의 'The First Time'

첫 경험.

보통의 여성들은 수영장에서의 안전한 물놀이를 위해 탐폰을 처음 사용하게 된다. 탐폰을 사용해본 여성들이라면 첫 경험시 2~3개는 기본으로 쓰레기통에 던져야 했던 기억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다리 한 쪽을 올리고 정말 편안한 마음을 갖고 탐폰을 삽입해야 하는데, 그게 말처럼 쉽지가 않다. 어디로 넣어야 하는지, 어떻게 넣어야 하는지, 때로는 위치와 방법을 터득해도 쉽지 않은 것이 탐폰 삽입이다.

성새론 감독도 3~4개의 탐폰을 내던져야 했던 첫경험이 있지만, 그녀은 아직 마스터베이션 도구와 레즈비언들의 섹스도구로 탐폰을 사용하지는 않았다. 영화의 발상은 경험이 아니라 상상에서 출현한 것이다.

네 번째 이야기

권장 공식 음악 : 요요마(Yo-Yo Ma)가 연주하는 오코너(O'Connor)의 'Butterfly's Day Out'

▲ 손. 탐폰을 삽입하고 영화를 찍고 커피를 마시는 손
ⓒ 배을선1시간여 그녀와 인터뷰를 하면서 나눈 이야기는 그리 많지 않다. 그녀는 자우림의 보컬 '김윤아'와 '시네이드 오코너'의 음악을 듣고 뮤지컬을 좋아하며 사진기를 들고 쏘다니기를 좋아하는, 아직 대학생 티를 벗지 못한 20대의 여성이었다.

장 지오노의 소설 <권태로운 왕> 등의 소설 읽기를 즐기며 땅끝마을로 갔던 여행을 잊지 못하는 부산출생의 그녀를 좀더 느끼고 나니 첼리스트 요요마가 연주하는 오코너(O'Connor)의 'Butterfly's Day Out'이라는 클래식이 문득 떠올랐다.

요요마의 첼로와 마크 오코너의 만돌린, 에드가 마이어의 베이스가 수줍고 아름다운 멜로디를 만들어내는 이 음악처럼, 그녀의 영화세계도 나비의 일상처럼 날개짓을 하고 있었다.

자신의 성 정체성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자신의 세계를 영화로 그려나가는 그녀가 용감하면서도 위태로워 보였던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그녀의 영화 <탐폰 설명서>는 12월 1일부터 열리는 한국독립단편영화제에서 만나볼 수 있다.
2001-11-28 17:44ⓒ 2007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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