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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마이뉴스 이종호


글/김시연 기자
사진/이종호 기자


"내딸 머리카락은 내 손으로..." 정주희 양 어머니(47)가 딸의 머리카락을 손수 깎고 있다. ⓒ 오마이뉴스 김시연
입을 굳게 다문 여대생들의 몸에 하얀 이발 가운이 걸쳐지고 친구들의 서투른 가위질이 시작되자 주변은 온통 머리카락과 눈물로 뒤범벅이 됐다. 등산복 차림의 한 아주머니가 다가와 한 학생의 이발 가위를 대신 잡아 쥔 건 바로 이때였다.

"제 아이 머리(카락)는 제가 직접 깎고 싶어요."
재단 이사장의 전횡에 맞선 덕성여대생들이 집단 삭발 시위를 벌인 24일. 정주희(23, 덕성여대 국문학과 98학번) 양의 머리카락을 자른 이는 바로 그녀의 어머니였다.

[특별기획] 덕성여대와 교육민주화

"목숨 걸고 하겠다는 데 어떻게 말리겠어요. 처음엔 데모 못하게 하려고 강원도에 데려다 놓기도 했지만 아이 뜻을 알고는 포기하고 협조하게 됐죠."

이발기로 마무리하고 나오는 순간까지 애써 담담해 하던 어머니는 말문을 트는 순간 끝내 눈시울을 붉혔다. 인문대학 학생회장인 정주희 양의 삭발은 지난 4월에 이어 이번이 두 번째. 하지만 정작 어머니를 안타깝게 하는 건 이날로 17일째를 맞은 딸의 무기한 단식이었다.

"머리야 다시 기를 수 있지만 아이 건강이 문제죠. 하지만 이번엔 저도 마음 굳게 먹었어요. 또 다시 이런 마음 고통을 다른 학생과 그 어머니들이 겪게 만들 수 없잖아요."

▲정주희 양의 어머니는 딸의 머리를 직접 삭발해 주었다. 친구들을 향해 웃어보이는 정주희 양 ⓒ 오마이뉴스 이종호


"교육부가 학생들을 삭발로 내몰았다"

집회가 금지된 교육부(정부종합청사) 앞을 대신해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뒤편 소공원에 덕성여대 학생, 교수, 노조원 등 학내 구성원 100여명이 모인 건 24일 오후 2시경. 애초 이번 시위는 재단의 새 이사 선임을 막고 교육부에 관선이사 전면 파견을 요구하기 위한 '평범한' 집회였다.

하지만 집회를 앞두고 학생회장단이 교육부에 대한 강력한 항의 표시로 삭발을 결의하고 민교협 소속 회장단과 노조위원장도 동참하기로 하면서 갑작스레 '삭발식'이 결행된 것. 여기에 '01학번 새내기'를 비롯한 20여명의 여대생들 역시 함께 삭발을 결의함으로서 결국 이날 집회는 학생 18명, 교수 5명, 노조간부 2명 등 모두 25명이 참여하는 '집단 삭발 시위'로 번졌다.

김나영(25, 정치학과 4학년) 덕성여대 총학생회장은 "새 이사 선임으로 분규가 더 악화될 수밖에 없는 상황인데도 교육부는 23일 면담에서 법적 근거만 내세워 무책임한 반응을 보였다"면서 "어젯밤 학생대표자회의에서 새로운 투쟁방향을 고민하게 됐고 오늘 낮 집단 삭발을 결정했다"고 밝혔다.

교수협의회 회장으로 이날 삭발에 동참한 신상전 교수는 "교육부의 미온적인 태도가 결국 학생들이 삭발에 나서게 만들었다"면서 교육부가 학내 분규에 적극 개입해 줄 것을 요구했다.

선후배 따로없이... 사학과 학생회장 임나영(왼쪽 사진) 양과 풍물패 새내기인 한승리(01학번) 양 ⓒ 오마이뉴스 이종호


"후배에겐 이런 일 없게 할래요"

오후 3시경 "다시는 후배들이 삭발, 단식, 혈서로 인해 눈물 흘리는 일이 없게 만들겠다"는 김나영 총학생회장의 다짐을 시작으로 삭발을 결심한 여대생 18명의 결의가 차례차례 이어졌다. 이 가운데는 올해 대학에 갓 입학한 01학번 '새내기'도 4명이나 끼어 있어 지켜보는 선배들을 안타깝게 했다.

"전 8일 만에 단식을 풀었어요. 목숨 걸고 단식하고 있는 선배들에 비하면 삭발쯤은 어려울 거 없어요." (조은정 사회과학부 01학번)

"어제 교육부 면담 뒤 장관도 법도 덕성을 살릴 순 없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5천 덕성인의 힘만이 대학다운 대학, 민주적인 대학을 만들 수 있습니다." (김정선 경영학과 99학번)

"내 권리 찾기 위해 옳은 일 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혼자가 아닌 모두가 하는 일이기 때문에 두려움 없이 삭발을 결정했어요." (김지혜 사회과학부 01학번)

"이런다고 교육부가 우리 말을 들어줄까 싶기도 하지만 우리 모두 하나가 된다면 못할 것도 없다고 확신해요." (김혜진 국문과 2학년)

결의를 마친 학생들은 흰 이발 가운을 몸에 두른 채 차례차례 길바닥에 앉았다. 머리카락을 깎기로 한 학생들 역시 생전 이발 가위나 '바리깡'(이발기계)을 들어본 적 없는 초보 이발사들. 하지만 모두 눈시울만 붉힐 뿐 그들의 서투른 가위질을 나무라거나 쥐가 파먹은 듯 웅큼 웅큼 잘려나간 머리카락을 보면서 웃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삭발을 마친 학생들을 둘러싸고 서로의 머리를 어루만지며 울음을 터뜨리는 장면이 곳곳에서 벌여졌고 눈물이 멈춘 자리엔 결의 어린 표정들만 남았다.

현장에 뒤늦게 도착한 교수협의회 회장 신상전(독문과) 교수와 부회장 한상권(사학과) 교수 역시 학생들과 노조간부의 뒤를 이어 삭발에 동참했다.

"학생들의 결의는 우리도 막지 못합니다. 오직 교육부만이 막을 수 있습니다."
집회 현장에 와서 뒤늦게 제자들의 삭발 소식을 들은 남동신 사학과 교수는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그와 양만규, 김경남 교수 등 3명의 재임용 탈락교수들 역시 끝내 어린 제자들의 뒤를 따랐다.

▲학생들과 함께 삭발한 교수협의회 회장 신상전 교수 / 삭발 시위를 마친 뒤 잘린 머리카락을 모아 교육부에 전달하려 했으나 경찰의 저지로 끝내 무산됐다. ⓒ 오마이뉴스 이종호 / 김시연


"새 이사 선임은 재단측 마지막 발악"

97년 학내 비리로 물러났던 박원국 이사장이 복귀하면서 시작된 올해 덕성여대 분규는 지난 8월 교육자원부가 감사 결과를 발표하고 재단측에 정상화 방안을 요구하면서 한차례 전기를 맞는 듯 했다.

하지만 25일로 임기가 만료되는 박원국 이사장이 지난 22일 자신의 측근인 이혜자 전 총동장회장과 역시 사학비리로 문제가 된 정희경 청강학원 이사장을 새 이사로 선임하면서 사태가 극단으로 치닫기 시작했다.

10월 들어 현 이사진 전면 퇴진과 관선이사 파견을 요구하며 교수협, 학교 노조 등과 함께교육부 앞 24시간 1인 시위, 100인 단식단 구성 등 총력 투쟁을 벌여온 덕성여대생들이 집단 삭발까지 결행한 것은 이번 새 이사 선임이 교육부의 관선이사 파견을 막으려는 재단측의 술책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김나영 총학생회장은 "학교 민주화가 가까워진 시점에서 교육부가 재단 이사회를 방관함으로서 상황을 악화시켰다"면서 "이번 삭발은 교육부에 대한 항의 표시이자 현 이사진에 대한 경고 메시지"라고 밝혔다.

학생들과 함께 삭발에 참여한 문성운 덕성여대 노조위원장은 "이번 이사 선임은 재단이 학교 정상화 의지가 없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라면서 법 논리만 앞세워 관선이사 파견을 머뭇거리고 있는 교육부를 질타했다.

▲제자와 나란히 앉아 삭발하고 있는 한상권 사학과 교수(왼쪽) ⓒ 오마이뉴스 이종호



<2신-10월25일 오전 11시> 덕성여대 정문 긴급 기자회견

박원국 이사장의 임기가 공식 만료되는 10월25일 덕성여대 교정의 아침은 평온했다. 하지만 전날 집단 삭발 시위의 여운은 여전히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단식 18일째를 맞은 학생들의 가슴을 짓누르고 있었다.

단식 18일째, 투쟁은 계속되고... 덕성여대 정문 앞 천막농성장에서 단식투쟁을 벌이고 있는 학생들 ⓒ 오마이뉴스 김시연


덕성여대 총학생회, 교수협의회, 직원 노조, 총동문회, 민주동문회 등 학내구성원은 25일 오전 11시 기자회견을 갖고 지난 22일 이사로 선임된 정희경 청강학원 이사장과 이혜자 전 총동창회장의 자진 사퇴를 요구했다.

교수협의회 부회장인 한상권 교수는 "오늘 박원국 이사장의 임기가 만료되는 건 투쟁의 결과지만 반쪽 승리에 불과하다"면서 "나머지 절반의 승리를 거두려면 박씨 일가가 재단을 떠나고 개혁적 인사를 영입해야 한다"고 밝혔다.

김나영 총학생회장은 "어제 삭발은 우리가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면서 "지난 국감에서 10월15일까지 학교 정상화가 안되면 관선이사를 파견하기로 한 교육부 장관의 약속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교육부의 약속 이행이 안될 경우 11월1일 교육부 앞에서 집회를 갖고 교육부 퇴출 운동도 불사할 계획이다.

"교육부와 재단에 대한 경고 메시지" 기자회견문을 낭독하고 있는 김나영 총학생회장(맨 오른쪽) ⓒ 오마이뉴스 김시연


기자회견 뒤 단식 학생들은 학내 집회를 갖고 전날 삭발 시위에 대한 경과를 학생들에게 알렸다. 전날 삭발에 동참했던 최영진(전산과 3학년) 양은 "오랜 단식으로 힘이 없다가도 거울로 삭발한 내 모습을 보면 곧 기운이 난다"면서 오랜 투쟁에 지친 학우들을 격려해 큰 박수를 받기도 했다.

어제의 눈물은 사라지고... 25일 학내 집회에 참석한 삭발 여학생들 ⓒ 오마이뉴스 김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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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사회부에서 팩트체크를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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