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일 뉴욕, 워싱턴 등을 강타한 '비행기 테러'로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죽는 것을 보니 솔직히 슬픔보다는 막막함이 밀려왔습니다. 10만여 명이 사는 뉴욕의 한인들도 피해가 없지 않을 것 같은데, 어마어마한 피해 규모에 기가 막힌다는 생각입니다.

저도 사람이니 어쩔 수 없이 많은 분들처럼 저와 제가 사는 사회에 미칠 영향을 생각하게 되죠. 미국 경제가 재채기하면 세계 경제가 몸살을 앓는다는데, 주식이 폭락하고 유가는 뛰고 그 피해는 서민들이 고스란히 지겠구나 하는 생각.

누군가로부터 테러를 당했으니 효용성을 떠나 안보에 투자하자는 조지 부시 대통령의 MD 구상이 힘을 얻겠다는 생각. 유태인들이 장악한 서구 언론이 더 더욱 사안을 왜곡하겠구나 하는 생각. 극단적인 사안을 보는 생각도 양극단으로 갈리겠구나 하는 느낌.

그 와중에도 영화 해설 기사를 주로 쓰기 때문인지 문득 떠오르는 생각은 "이건 정말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얘기구나. 할리우드의 누군가는 남몰래 쾌재(?)를 부르며 열심히 시나리오 작업에 들어갔겠다"하는 것입니다.

일부에서 '제2의 진주만'이라고 흥분하는데, 지난 여름 개봉해서 예상 외로 여론의 몰매를 맞은 '진주만'의 제작사 디즈니가 1주일 정도 영화를 반짝 상영해서 재미를 보지 않을까 하는 억측도 들더군요.

그러나 역시 선명하게 떠오르는 이미지는 3년 전에 본 한 편의 영화였습니다. 바로 덴젤 워싱턴과 브루스 윌리스, 아넷 베닝이 공연한 '비상계엄(The Siege)'입니다. 마치 '9.11 테러'를 연상시키는 영화 내용을 아신다면 작가의 '예지력'에 놀라실지 모르겠습니다.

간략히 내용을 요약하면, 반미 테러를 자행하는 아랍 테러리스트들을 다스리기 위해 계엄령이 뉴욕에 내려집니다. 범인 색출이라는 명분과 애국주의적인 이상에 심취한 계엄사령관인 윌리엄 데브로 장군(브루스 윌리스)은 지역 내의 아랍계, 특히 남자들을 거대한 임시 수용소에 가둡니다. 그는 의심을 받는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고문하고 공개 처형합니다.

계엄령 발표 이전 뉴욕에서 테러 저지 활동을 하던 미 연방수사국(FBI) 요원 앤서니 허바드(덴젤 워싱턴)가 중앙정보부(CIA)의 엘리스 크래프트(아넷 베닝)와 힘을 합쳐 진범을 잡고 뉴욕의 치안을 원상 회복합니다. 그리고 데브로 장군은 권력을 남용한 혐의로 결국 법의 심판을 받게 되죠.

에드워드 즈윅이 감독한 영화는 7천만 달러를 투입해서 4천1백만 달러밖에 못 벌었으니 죽쑨 영화의 범주에 들 수 있겠죠. 더구나 영화 개봉을 전후해서는 아랍계 미국인들의 상영 반대 운동이 벌어졌습니다. 아랍계를 테러리스트 등으로 부정적으로 묘사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랍계가 영화 개봉에 반발, 들고일어난 데에는 그 동안 자신들에 대해 부정적인 묘사로 일관한 할리우드에 대한 반감도 크게 작용했으리라 봅니다. (아놀드 슈왈츠제너거의 94년작 '트루 라이즈'를 떠올려보시죠.)

'비상계엄'은 정치적인 깊이가 없는 평범한 액션 오락영화라는 평가가 지배적이지만, 유태계 자본이 장악하고 있는 할리우드의 현실에서 이 정도나마 아랍계를 이해하려고 하는 영화가 있었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시오니즘을 신봉하는 유태인들의 팔레스타인 강탈기(强奪記) '엑소더스'가 당당하게 상영되고, 2차대전 중 유태인들을 괴롭힌 독일인들은 세상에 둘도 없는 악으로 묘사되는 할리우드 아닙니까?

영화는 아랍국가들의 반미 노선의 본질-이스라엘을 일방적으로 지지하는 미국의 편파적인 외교정책에 대한 분노-을 건드리지는 못하지만, 인권적인 측면에서 아랍계 미국인들 전체에 대해 '국가의 테러'를 저지르려는 미국의 처사에 대해 의문을 제기합니다.

더구나 문제의 단초를 제공하는 테러리스트들이 한때 엘리스가 후세인 제거를 위해 양성하다가 미국의 대 중동전략이 바뀌면서 버림받은 조직원들로 밝혀지는 대목에서는, 국익을 위해서는 배신과 변명을 밥먹듯 하는 미국의 이중성을 느끼게 합니다. 미국 내에서 찬반 양론이 뚜렷이 갈리는 중동문제에 새롭게 접근한 상업영화는 양자는 물론, '미국 만세'를 외치는 국수주의자들로부터도 배척을 받습니다.

그러나, 이 영화가 정작 던지는 질문은 한 국가가 테러를 당한 상황에서 대응 방식 역시 테러여야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바로 지금 미국이 처한 상황에서 분노를 외부로 발산하는 것이 문제에 대한 적절한 해결 방식인지를 묻고 있는 셈입니다.

영화속 브루스 윌리스의 캐릭터는 너무나 조국을 사랑하는 나머지 모든 문제의 근원을 외부에서 찾고, 섬멸할 '외부의 적'을 찾아다니는 군국주의자입니다. 자신의 신념에 충실하다보니 스스로의 손에 직접 피를 묻히는 것도 마다하지 않죠.

저는 유감스럽게도 브루스 윌리스의 모습을 현실의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에게서 봅니다. 여러분은 11일 저녁(현지 시간) 발표된 부시 대통령의 대 국민 연설문을 보면서 어떤 느낌이 드셨습니까? 저에게 부시의 연설문은 아직 실체가 드러나지 않은 적을 철저히 짓밟아야 한다는 '선전포고문'으로 다가왔습니다.

'응징'과 '정의'라는 개념이 반복되지만,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국정 최고 책임자가 사태가 이 지경까지 오도록 대비를 철저히 하지 못한 것에 대해 '미안'하거나 '죄송'하다는 표현을 연설문에 넣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미국이 비록 전대미문의 고강도 테러 공격을 받았을지언정 특정 국가와 전쟁을 벌이는 위급 상황도 아닌데, 국민 재산과 항공 안전을 담보하지 못한 사람이 너무도 당당하게 "우리가 테러의 대상이 된 것은 그만큼 자유의 빛을 밝혔기 때문"이라고 아전인수식 해석이나 일삼는 것을 보고, 측은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플로리다주에서의 석연치 않은 개표 판정을 덮어 세계적인 망신을 당하고도 "미래를 위해 나라를 맡겨보자"고 힘을 실어준 미국 국민들이 애처롭기까지 했습니다.

여하튼 부시 대통령은 한순간에 가족과 친구를 잃은 국민들의 흐느낌을 명분삼아 곧 범인 색출에 나설 것으로 보입니다. 테러가 발생한 지 채 하루도 지나지 않았고, 아직 증거도 나오지 않았는데, 아랍권을 비롯, 미국의 '적대국가'들이 공공연히 배후로 지목되는 분위기입니다. 설령 진상이 영영 미스테리로 남는다고 해도 어떻게 해서든 희생양이 만들어지지 않으면 안되는 분위기가 미국 내에서 조성되고 있습니다.

미국이 이라크나 유고 등을 깡패국가로 규정해서 '응징'하는 동안 무고하게 희생된 민간인들의 참상을 생각하면 미국의 희생자들만이 부각되는 것이 처연하게 느껴지는군요. 자신이 꿈꾸는 '응징'이 도를 지나칠 경우 정당성을 잃게 될 것임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미국 정부의 '응징'은 테러에 직접적으로 관여한 그룹들에만 한정되길 바랍니다. 지금처럼 주변국가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군수자본의 배를 불리기 위해 미사일 방어체제(MD)를 추진하고, 미국의 이익을 위해 쿄토기후의정서를 일방적으로 파기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길 바랍니다.

자신에게 찾아온 극단적인 상황을 극단적인 방법으로 극복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 그것이 아마도 3년 전 '9.11 테러'를 예견한 영화가 주는 교훈일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이 아무리 영화와 흡사하게 전개돼도 영화만큼 깔끔히 마무리되지 못하는 것도 '우리 시대의 비극'일 것입니다.

덧붙이는 글 | 굳이 미국까지 갈 필요도 없을 겁니다. 장소와 시간이 관계없이 만나서 허심탄회한 대화만 자주 해도 통일이 그리 어렵지 않을 텐데... 

한쪽에서는 미국이 방해한다, 경제 지원이 필요하다고 요리조리 핑계... 또 다른 한쪽에서는 거봐라 이용만 당한다, 나라가 공산화된다고 핑계... 자기 이익만 채우려는 무리들의 원심력 앞에 절충점을 찾으려는 대화파만 바보되는 세상입니다. 하긴, 언제는 역사가 '기회주의자'의 것이었나요?

2001-09-12 13:40 ⓒ 2007 OhmyNews
덧붙이는 글 굳이 미국까지 갈 필요도 없을 겁니다. 장소와 시간이 관계없이 만나서 허심탄회한 대화만 자주 해도 통일이 그리 어렵지 않을 텐데... 

한쪽에서는 미국이 방해한다, 경제 지원이 필요하다고 요리조리 핑계... 또 다른 한쪽에서는 거봐라 이용만 당한다, 나라가 공산화된다고 핑계... 자기 이익만 채우려는 무리들의 원심력 앞에 절충점을 찾으려는 대화파만 바보되는 세상입니다. 하긴, 언제는 역사가 '기회주의자'의 것이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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