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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정신좀 차리라니깐" ⓒ 오마이뉴스 오연호



아무도 이어주지 않는 30대 취객의 '끓긴 필름'

서울, 2001년 7월 19일 0시40분.
광화문에서 3호선 경복궁 역 쪽으로 약 20미터 지점.
한 30대 취객이 쓰러져 있었다. 인도와 차도의 경계선에서.
위험스러웠다.

그러나 심야의 행인들은 아무도 그를 추스리려 하지 않았다.
쓰러진 그로부터 경복궁역 쪽으로 불과 30여미터 앞에서는 이번 호우로 구멍이 뚫린 도로를 땜질하기 위한 심야 긴급복구공사가 한창이었다. 달라붙은 인부만 20여명.
그러나 세파에 지친 한 30대 취객의 필름끓긴 한밤을 '복구'해줄 사람은 없어 보였다. 인도 보행자도, 운전자들도 그냥 지나쳤다.

'늘상 보아오던 취객중의 한 사람, 지금은 동사할 걱정도 없는 여름이잖아. 빨리 사무실에 들어가 취재가방을 챙겨 집으로 가 원고를 써야 한다. 너무 늦었다.'
1차는 대학동창들, 2차는 시민단체 관계자-언론인들과 12시20분까지 맥주를 마신 기자는 그런 핑계를 대고 그를 한번 뒤돌아볼 뿐이었다.

세종문화회관 뒤편에 있는 사무실에 들어가 취재가방을 챙겨 나왔다. 그러나 집을 향해 걸으려던 기자는 30대 취객이 쓰러져 있던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인도와 차도의 경계에서 너무 위태롭게 쓰러져 있었던 그이지 않았나.

30대는 토하고 40대는 '참선'중? ⓒ 오마이뉴스 오연호


"큰일 났구만, 쟤 때문에 술 다 깨네"

"집이 어디여?" ⓒ 오마이뉴스 오연호
그런데 약 20분이 지나 그 자리에 다시 찾아갔을 땐 새로운 장면이 펼쳐져 있었다.
새벽 1시, 이젠 한 사람이 아니라 두 사람의 취객이 거기에 앉아 있었다.

30대 취객은 가로수 밑둥을 붙잡고 음식물을 토해내고 있었다. 마치 가로수에 바가지로 물을 주듯이 마신 술을 좌악좌악 쏟아냈다. 그런데 그런 그로부터 4-5미터 떨어진, 인도 한가운데에 한 아저씨가 007가방을 엉덩이에 깔고 앉아 마치 참선하는 자의 자세로 눈을 지긋히 감고 있었다. 그는 큰 키에 얼굴이 야윈 40대 취객이었다.

안경을 끼고, 와이셔츠 차림에 넥타이를 맨 30대가 모든 것을 다 토해내고 그 자리에 주저앉자 40대가 그에게로 다가가 어깨를 두드리며 "집에 가야지"했다.
그때부터 기자는 두 사람의 '실갱이'에 끼어들었다. 친구 사이냐고 물었다
-아니야. 나보다 젊은 사람이 쓰러져 있어서 집에 먼저 보내려고....
인사불성인 사람한테서 어떻게 더 젊다는 것은 알아냈을까.
-내가 76학번인데, 몇마디 물어보니까 '네, 네' 하더라고. 그러니까 나보다 젊지. 그런데 그 다음에는 씨팔 씨팔 해대는데, 옛날 생각 나더라고. 쟤 때문에 술 다 깨네."

40대는 30대의 어깨를 흔들어댔다.
-정신좀 차리셔.
"....."
-아, 정신좀 차리라니깐.
"....."
-이 사람 반지 끼고 시계 찼으니까 결혼은 한 것 같고 처자식이 있을텐데. 가다 보니깐 위태롭게 널부러져 있잖아, 나보다 더 취해 보이니까, 내 정신이 번쩍 깨버리데. (30대가 길거리에 쓰러지니까) 저봐, 저거 큰일 났구만.


"처자식 있는 사람이....이럴수록 열심히 살아야 해"

1시 20분, 40대의 윗 호주머니에 꽂힌 핸드폰이 울렸다.
-집에 가다가, 여기 광화문인데, 취객을 만나서 집에 데려다주려 하는데 막무가내네. 나는 집에 다 왔어, 내 집이 연희동이잖아. 내 걱정하지 말어. 고마워. 난 집에 잘 가고 있으니까 걱정하지마.

그는 "걱정하지마"를 반복하면서 핸드폰을 끊었다.
누구냐고 물었더니 "같이 술마시던 친구가 나 집에 잘 갔냐고 하는 전화야" 한다.

그는 한 중소기업에 다닌다고 했다. "오늘 밤에 회사 임원들 단합대회 하고 12시 30분까지 마셨다"면서 시계를 내려다봤다.
-여기서 한시간 이상을 헤매고 있네.... 여보쇼, 이럴수록 열심히 살아야 해. 처자식 있는 사람이.

구경꾼은 이러지 말고 경찰에 신고하면 어떻겠느냐고 조심스레 안을 제안해봤다. 단박에 고개를 흔든다.
-30분 전에 119를 불렀지. 오더니 '아이 술취한 사람을 어떻게 데려다주냐"면서 그냥 가버리데. 그러니 내가 보내줄 수밖에.

그는 다시 앉아있는 30대에게 눈높이를 맞추려 허리를 구부린다.
-여보쇼, 집이 어디요.
"....."
30대는 답도 없이 침만 질질 흘리고 있다.
-아이, 중심 좀 잡아봐 좀.
"....."
-씨펄, 처자식 있는데 어디서 엎어져 있는 거야.
그는 30대의 어깨와 무릎을 흔들어본다.
-고개를 들어봐, 집이 어디여. 진짜 우리 1분간만 딱 정신 차리고 택시 잡아 갑시다.

▲"진짜 우리 1분간만 딱 정신 차리고 택시 잡아 갑시다" ⓒ 오마이뉴스 오연호


"1분간만 딱 정신차리쇼"

ⓒ 오마이뉴스 오연호
그래도 30대 취객은 묵묵부답이다. 그때 다시 40대의 핸드폰이 울렸다. 1시 32분.
-어, 다 왔어. 나 여기 아우 만나 가지고.....

"아우"란다. 역시 같이 술 마시던 친구의 "집에 무사히 갔냐"는 안부전화였다. 의리의 사나이들?

40대는 오늘의 그의 행동은 신세갚음의 하나라고 했다.
-내가 왜 이 사람 보고 걱정되느냐 하면 전번에 노원역에서 내가 취해 쓰러져 있는데 어떤 아저씨가 나를 일으켜 세우면서 정신나게 해주더군. 그때 내 생명 같은 가방, (인도 한켠에 놓인 007가방을 가리키며) 저기 저것을 잃어버릴 뻔했는데, 그 가방을 다시 보니 정신이 바짝 들었지. 내가 신세 한번 졌지. 그때 내가 살아가면서 큰일은 못하지만 술취해 쓰러진 사람 깨워 집에 보내는 일은 한번 해야겠다 생각했지.

30대가 깨어날 기색이 없자 40대는 엄포를 놓아본다.
-여보쇼, 나한테 한번 혼나볼텨?
"......"
-(손으로 내려치려는 시늉을 하며) 내가 우리 처남만 같아도 탁 그냥....좀 일어나쇼, 해도 너무하네. 1분간만 정신 차리쇼.
그래도 답이 없자 40대는 "에이씨...."하면서 자기 얼굴을 움켜쥔다. 그리곤 쌩쌩 달리는 차들을 멀거니 보면서 한숨을 푸욱 내쉰다.

그는 30대에만 신경을 쓸 뿐 전에 잃어버릴 뻔했던 '생명 같은 가방'은 이제 안중에도 없었다. 그의 007가방은 저 멀리에서 임자없는 것처럼 덩그라니 놓여져 있었다.
1시40분. 그는 30대의 등을 몇 차례 두드리고 '협박'을 하다 그의 귀를 30대의 입에 가져가더니 드디어 "합정동"이라는 소리를 얻어냈다.
"이제야 이야기하네, 이게"

1시 41분. 40대는 택시를 잡기 시작했다.
"합정동, 합정동"
그는 달려오는 택시들을 향해 손을 내흔들었으나 5분여간 별 소득이 없었다.
다시 그는 30대에게 다가가 "차비가 있냐"고 물었다. 30대는 묵묵부답. 40대는 더 묻지도 않고 바지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더니 1천원짜리 여섯장을 30대의 손에 쥐어주었다.

▲"저 사람 좀 집에 잘 데려다 주쇼" ⓒ 오마이뉴스 오연호


손에 쥐어준 택시비 6천원

임무수행은 끝나고. ⓒ 오마이뉴스 오연호
그러고도 또 10여분간 40대는 택시들을 향해 "합정동"을 외쳐댔다. 그러나 취객 두 명을 태워야 한다고 생각해서인지 택시운전사들은 차를 멈출듯하다가 달아나곤 했다.
1시 52분. 드디어 택시 한 대가 멈춰섰다. 40대는 택시가 행여 그냥 갈까봐 앞문을 열어 부여잡고 운전사에게 "저 사람 좀 집에 잘 데려다 주쇼", 신신당부했다.

그렇게 40대 취객의 30대 취객 집에 보내주기는 1시간 30분만에 끝났다.
떠나는 택시를 한참 바라보고 있는 그에게 한마디 건넸다.
"성공하셨네요."
-나는 성공한 것 없는데.....저 사람이 성공해야 할텐데, 집에 끝까지 잘 가야 할텐데.

그는 아직 성공하지 않았다고 보고 있었다. 그는 유일한 구경꾼에게 악수를 청하며 말했다.
"인연이 있으면 또 만납시다."
그는 잠시 잊어두고 있던 '생명 같은 007가방'을 챙겨 연희동쪽을 향해 걸었다. 희미한 가로등 불빛 속으로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은 가뿐해보였다.
그는 중소기업 신영00에 다니는 김00 씨(46, 연희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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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hmyNews 대표기자 & 대표이사. 2000년 2월22일 오마이뉴스 창간. 1988년 1월 월간 <말>에서 기자활동 시작. 사단법인 꿈틀리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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