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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욕먹을 얘기지만 나는 친일 문제에 대해서도 신중한 편이다."

- 그 친일 관련 발언은 상당히 많은 사람들의 비판을 불러일으킬 것 같은데.

"범위와 정도를 정해야 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그것에 대한 합의가 없다. 사람들이 프랑스와 독일의 예를 우리와 비교하는데, 2차 대전 중 5년 '점령'당한 나라와 36년 동안 '합방'당한 우리가 어떻게 똑같을 수 있는가. 신문을 예로 들어 미안하지만 이런 가정을 해 보자. 일제 36년 동안 10개의 신문이 있었는데 8개는 항일, 2개는 친일했다고 치자. 그렇다면 당연히 그 신문을 단죄해야겠지. 하지만 그때 현실은 신문은 2개뿐이었고, 지금 어떤 사람들이 그 2개가 친일했다고 비난하는 게 아닌가. 하나의 가정을 더해 보자.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조선, 동아가 있었던 일제 36년'과 '아예 그런 신문조차도 없는 36년' 중 어느 걸 선택하겠는가. 나는 비록 운이 좋아서 일제 시대에 태어나는 걸 면했다. 하지만 해방 50년이 지나 지금 젊은 사람들처럼 그렇게 용감하게 친일을 욕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범위가 애매하면, 그때 태어났다는 것, 그때 살았다는 것 자체가 친일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기준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건 '자발성' '대가성' '상쇄효과' 등의 총체적 고려다."……….
(7월 13일자 조선일보 이문열 인터뷰 중에서)


오늘 조선일보에 실린 이문열 씨의 인터뷰를 읽었다. 아니, 사실은 오마이뉴스에서 그가 '신중한 친일론'을 주장했다는 기사를 읽고 그가 대체 구체적으로 어떤 말을 했나 궁금해 찾아보았다는 게 맞는 말이겠다.

소설가 이문열의 '관대'와 '신중' 사이 - 배을선 기자

인터뷰는, 그가 할 만한 말들이었다. 지금까지 언론사 탈세문제에 대해 그가 보여온 입장들로 견주어볼 때, 사실 조선일보 인터뷰는 그의 지금까지의 입장을 되풀이한 것이라서 친일문제에 대한 부분을 제외하면 그다지 새로운 것도 없었다.

그 친일문제도, 지금까지 조선일보 등 보수층에서 보여주었던 견해들에 비추어, 이문열과 같은 작가가 능히 주장할 만한 이야기들이었다고 생각한다. 내가 좀 어처구니가 없었던 것은, 그가 친일문제에 대한 '신중한' 입장을 주장하는 그 논리전개의 방법과 역사를 해석하는 태도였다.

과연 일류작가답게 그는 자신의 논리를 전개함에 있어 구체적이고 당당하다. 그는 자기 주장을 폄에 있어 있지도 않은 일을 꾸미거나 허위를 강요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또한 실로 교묘하게, 또는 무지하게 하나의 극히 단편적인 사실만을 끄집어내어 전체적인 역사를 무시하는 왜곡된 논리전개를 펴고있다.

하나의 문제를 이해함에 있어서는 그 문제를 둘러싼 전체적 정황을 먼저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것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아이들 싸움을 말리면서부터 터득하게 되는 기초상식이다.

이를테면 A가 B를 때렸다고 하자. 이문열 씨는 A가 B를 때렸으므로 A는 무조건 나쁜 놈이라고 하는 식이다. 한데 실은 B가 강도로, 칼을 들고 C를 강탈하는 중이었다. 마침 지나가던 A가 이것을 보고 B를 때려눕히고 C를 구해준 것이었다.

그러나 이문열 씨에게는 이런 전후사실, 사건의 '총체적 진실'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그는 B를 옹호해야 하고, 따라서 B가 강도건, A가 강도를 막기 위해 폭력을 행사했건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 아니, "말할 필요가 없다." A는 B를 때렸다, 오로지 이것만이 이야기할 가치가 있는 사실이다. 고로 A는 나쁜 놈이다.

이거야 말로 조선일보 식의 '사실보도'고, '정론'이다. 항공사 조종사들이 파업을 했다. 여행객들이 불편을 겪고 있다. 따라서 조종사들은 욕먹어야 한다. 조종사 파업의 원인이 어디에 있건, 항공사의 처우가 무엇이 잘못되었건, 이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 '여행객들이 불편을 겪고 있다' 오로지 이것 하나만이 보도의 가치가 있는 사실이다(조종사 파업에 대해서는 나 자신은 개인적으로는 별로 찬성하지 않는 입장이다).

상대가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어떻게 토의가 되고 '합의'를 이룰 수 있겠는가? 서로간에 입장이 다른 것은 당연한 것이라 하지만, 토론의 기본이 되는 '사실'조차도 자기의 편의에 따라 임의로 취사선택하여 붙인다면 도대체 어떻게 상호 '합의'를 향해 나아갈 수가 있겠는가? 아니, 도대체 무엇이 '사실'인지를 어떻게 알 수가 있겠는가?


어째서 우리는 친일문제에 대한 '합의'를 못 만들어냈는가

이문열 씨는 우리가 친일문제에 대한 '합의'가 없다고 한다. 맞는 말이다. 우리는 아직까지 과거 친일한 인사들에 대해, 그들의 행적에 대해, 어디까지가 단죄해야 할 부분인지, 그 단죄란 어떠한 것이어야 하는지에 대해 한번도 전 사회적인, 국가적인 합의를 이루어낸 적이 없다.

한데, 그 말을 하면서 이문열 씨는 그 합의를 이루지 못한 책임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는지, 또 자금이라도 뒤늦게나마 그 합의를 이루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지에 대해서는 아무 언급이 없다. 합의가 없다, 이것뿐이다. 그럼 합의가 없으니 친일문제에 대한 일체의 언급을 말아야 한다는 것인지, 합의가 없는 고로 지금까지의 친일파 비판이 잘못되었다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해방직후를 보자. 친일파 처벌과 친일문제 청산을 위해 만들어졌던 최초의 거족적 시도였던 반민특위가 와해된 게 누구 때문이었던가? 반민특위 간부들과 그 집행기구였던 특경대를 되지도 않은 죄목을 걸어 체포하고 고문, 투옥한 게 누구였던가? 바로 이승만의 비호를 받은 친일파들, 일제시대 일본에 빌붙어 동포들을 탄압한 과거 일경출신의 경찰들 아니었던가?

또 박정희는 어떤가? 구 일본육군사관학교 출신의 관동군 장교, 만주에서 독립군을 토벌하던 자가 대통령이 되었음에도 누구 하나 그의 친일경력에 대해 공개적으로 입 한번 벙긋해보지 못하지 않았나?

아니, 지금도 일본대사관 앞에서 매주 한번씩 집회를 여는 정신대 문제만 해도, 80년대 들어 이른바 '운동권'들이 나서서 이 문제를 공론화하기 전까지는 정부에 의해 철저히 외면당하지 않았던가?

해방 50년이 넘도록 지금까지 '친일파'라는 이 가장 기본적인 역사적 문제에 대해 조그만치의 사회적 합의도 이루지 못한, 그 자체가 바로 '친일파문제'의 가장 핵심적인 문제라는 것을 이문열 씨는 모르는지? 아니면 무시하는 건지? 아니, 바로 그런 친일문제에 대한 사회적 공론화를 막고 구체적 합의로 나아가는 것을 가로막은 장본인의 하나가 조선일보라는 것을 이문열 씨는 모르는 것인지?


우리가 프랑스보다 관대해야 하는가

이문열 씨는 또 프랑스와 우리를 비교해, "2차 대전 중 5년 '점령'당한 나라와 36년 동안 '합방'당한 우리가 어떻게 똑같을 수 있는가"라고 하였는데, 이 역시 맞는 말이다. (그는 대체로 사실관계를 얘기할 때는 맞는 말만 한다. 적어도 자기가 언급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불과 5년간 '점령'만 당한 나라와, 36년에 걸쳐 공식적인 '식민지'로 아예 '합병'되었던 나라에서의 역사청산의 문제가 어떻게 같을 수가 있나?

사실 프랑스의 경우와 우리의 경우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법적으로 우리는 일본에 '식민지'로 '합병'된 것이었지만, 프랑스는 독일에 의해 군사적으로 '점령'당한 것에 불과했다.

즉 우리는 국가주권을 완전히 상실하고 법적으로나 실제적으로나 일본의 '일부'가 되었었지만, 프랑스는 군사적으로 독일에 항복을 하고 독일군의 주둔을 용인, 협력하였으나 그밖의 일반적인 국가주권은 그대로 프랑스인의 손에 남아 있었다.

한 예로, 프랑스 경찰은 점령 중에도 여전히 사법권과 치안권을 유지하고 있었고, 군대를 제외한 그밖의 모든 국가기능이 그대로 유지되었던 것이다. 원칙적으로 독일군은 프랑스 민간인에 대한 체포권이 없었고 다만 프랑스 영토에서 독일군의 전쟁수행에 방해가 되는 행위에 대해서만 이를 체포할 수 있을 뿐이었다.

이것도 원칙적으로는 그 처벌은 프랑스 경찰에 맡기도록 되어 있었다. (카사블랑카라는 영화 보신 분 있는가? 2차대전 중 프랑스령 모로코를 배경으로 한 그 영화를 보면 험프리 보가트가 프랑스 레지스탕스인 옛 애인을 숨겨주는 술집주인로 나온다. 그 영화에서 주목할 것은, 보가트를 체포하는 게 독일군이 아니라 '프랑스 경찰'이라는 것이다.)

지리적으로도 독일의 점령은 휴전협정 시까지 독일군이 점령한 지역, 즉 중부와 북부 프랑스에 국한되어 있었다. 프랑스 전토의 약 1/3에 걸치는 남부지역과 해외의 자국 식민지에 대해서는 전쟁이전과 마찬가지로 프랑스의 독자적인 국가권력이 행사되고 있었다.

프랑스 정부는 독일에 항복한 후 남부의 비시에 새로운 수도를 세우고 계속하여 비점령지역과 해외식민지에 대한 통치를 유지하고 있었다. 프랑스는 이들 지역에 대해 독자적인 군대(!)를 유지하고 있었고, 외교권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다만, 독일과의 휴전협정에 따라 독일의 전쟁수행에 방해가 되는 행위는 일체 하지 못한다는 제약이 있긴 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프랑스의 경우 국가주권이 점령 당시에도 계속 유지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독일의 점령은 프랑스 정부와의 휴전협정에 의해, 순수히 군사적인 목적에 국한된 것이었다. 즉 프랑스 정부는 독일이 영국을 상대로 전쟁을 계속하기 위해 독일군이 프랑스에 주둔하고 그 시설과 영토를 쓸 수 있도록 용인한다는 것이었지, 국가주권을 독일에 넘긴다는 것이 아니었다.

물론 현실은 이런 협정이나 법률적 정의와는 항상 차이가 있는 것이지만, 그러나 법적으로나 실제로나 완전히 일본의 철저한 식민지가 되어 살았던 우리의 경우와, 국가 대 국가로서 상호 협정에 의한 협력관계(그 협력이란 것이 다소 일방적인 것이기는 했지만)를 유지했던 프랑스의 경우는 거의 하늘과 땅 정도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프랑스는 전쟁이 끝나자 점령기간 중 독일에 다소라도 협력하였던 사람들을 거의 예외없이 처벌하였다.

페탕 장군이라는 사람이 있다. 1차대전 당시 프랑스군 원수로, 대독전쟁을 승리로 이끈 프랑스의 국민적 영웅이었다. 그는 2차대전 때에는 이미 은퇴한 노인이었는데, 프랑스가 독일에 패배하게 되자 급히 불려나와 대독휴전협상을 책임지게 되고, 휴전협상 이후에는 비시에 세워진 신정부의 수반이 되었다. 사실 그가 한 일은 이미 군사적으로 패배가 분명한 프랑스가 더 이상의 손해를 보지 않도록 하기 위해 독일과 강화를 맺은 것에 불과했다.

휴전협상을 하지 않는다면 프랑스 전토가 독일군에 점령당할 것이 분명한 상황에서 프랑스의 주권을 유지하고 국토의 일부나마 건지기 위해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또 휴전협정 이후 영국이나 미국 어느 쪽도 독일을 상대로 당장 싸워 이길 가망이 없던 상황에서, 독일의 전쟁수행에 협력한다는 것은 사실 굴복이라기보다는 국가의 이익을 위해 동맹의 상대를 영국에서 독일로 바꾼다는 것에 불과했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페탕 장군조차도 전쟁이 끝난 후 독일에 부역한 '괴뢰정부'의 수반이라고 하여 법정에 세워지고 사형선고를 받았던 것이다. 페탕은 그 후 1차대전의 전쟁영웅이었던 과거를 고려해 무기징역으로 감형되기는 했으나 결국은 감옥에서 죽었다.


차라리 푸에르토리코를 말하라

이문열 씨는 우리가 프랑스와 다르다 한다. 정말 맞는 말이다. 우리와 프랑스의 역사적 경험이 다르니, 친일문제에 대한 우리의 자세도 프랑스의 그것과는 달라야 할 것이다. 프랑스와 같이, 불과 '5년' 동안 군사적인 '점령'만을 당했던 나라도, 전후 극히 사소한 행위까지도 국가에 대한 반역으로 간주하여 가혹하게 처벌하였다. (전후 프랑스에서는 심지어 독일군 병사와 사랑에 빠져 아이를 가진 여자들조차도 '부역죄'로 처벌을 하였을 정도였다. 그 어떤 정치적 행위가 아니라, 단지 점령군과 연애를 했다는 것조차 처벌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36년이란 기나긴 기간에 걸쳐, 거의 2세대에 걸쳐 완전한 '식민지'로서 국가의 주권과 국민의 모든 기본권, 심지어 자기 문화와 언어까지도 박탈당했던 나라는 더욱 더 친일문제의 청산에 대해 철저해야만 자기의 역사를 바로세울 수 있을 것 아닌가? 한데 우리의 친일파 처벌은 프랑스보다 더 철저하기는커녕, 프랑스만큼이라도 하기는커녕, 프랑스에 비한다면 1/100도 되지 못한다.

이문열 씨의 논조로 보아 그는 친일문제에 대한 작금의 우리 사회의 태도가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 듯하다. 프랑스에 비해 훨씬 가혹한 식민지의 역사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정작 친일문제 청산에 있어서는 프랑스보다 훨씬 우유부단한 우리의 현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그가 주장하는 바는 대체 무엇인가? 우리가 프랑스보다 더 가혹한 처벌을 했어야 한다는 말인가? 아니면 지금의 이 미적지근한 친일잔재 청산의 노력조차도 아예 없어져야 한다는 것인가?

나는 아마도 이문열 씨가 세계 역사에 대해 지식이 짧은 관계로 적절한 비유를 찾지 못해 이런 실수를 했다고 이해한다. 불과 5년의 점령으로도 그토록 가혹하고 철저한 처벌과 청산을 가했던 프랑스의 경우가 아니라, 근 한 세기에 걸쳐 미국의 식민지로 있다가 해방된 이후에는 국어까지도 영어로 쓰면서 그 뒤로도 미국의 사실상의 식민지 노릇을 한 필리핀이라든가, 아예 미국의 한 개 주로 편입되기를 원하는 푸에르토리코 같은 경우를 들었으면 좀더 적절한 비유가 되지 않았겠는가?


일제시대엔 신문이 조선, 동아 2개뿐?

"…그때 현실은 신문은 2개뿐이었고, 지금 어떤 사람들이 그 2개가 친일했다고 비난하는 게 아닌가…"라는 부분에서, '사실'을 자신의 입맛대로 골라 쓰는 이문열 씨의 조선일보식 역사해석은 절정에 이른다.

이문열 씨는 그 당시 '시대일보' 등 일제에 비타협적이었던 여러 신문들이 있었고, 그들이 모두 일제에 의해 폐간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잊어버렸는가? 그 당시 조선과 동아 2개 이외에는 신문이 없었던 것이 현실이 아니라, 일제에 굴종하지 않고 비타협적이었던 신문들은 모두 폐간당하고 오직 일제에 충성한 신문 2개만 남은 것이 그 당시의 '현실'이었다는 것을 이문열 씨는 편리하게도 잊어먹은 모양인가?

삼국지를 다시 쓰기까지 했다는 그가 자기 나라의 현대사에 대해서는 이토록 무지하다는 말인가? 삼국지 식의 어투를 빌려, 참으로 친일한 자는 살아남아 권세와 명예를 누리나, 죽어 땅에 묻힌 애국자는 자신의 존재조차 부정당하여도 누구에게 하소연할 곳이 없는도다!

"…범위가 애매하면, 그때 태어났다는 것, 그때 살았다는 것 자체가 친일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라고 하니, 아마도 이문열 씨는 그 때 살았던 조선인들, 일제에 징용으로 끌려간 사람들, 정신대로 끌려간 처녀들까지 모두 친일의 범주에 들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전 조선민족이 친일파였고, 그 후손인 우리는 전국민이 친일파의 후예인 친일파 국가, 친일파 사회를 이루고 있으니, 그렇다면야 누가 누구를 무어라 비판하겠는가?

그의 말대로, 친일 문제에 대해서는 기준이 필요하다. 과거에 친일했다는 게 문제가 아니라, 그것이 오늘날 한국사회가 발전하는 데 있어 걸림돌이 되고 문제가 되는 부분을 청산하고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 아닌가?

노무현 씨도 말했듯이, 우리가 지금 친일파의 후손들을 보고 목숨을 내놓으라고 하는가, 재산을 내놓으라고 하는가? 다만, 친일을 했던 것은 했던 것이라고 분명하게 밝히고 인정해야 된다는 것, 그래야 역사가 바로설 수 있다는 이 최소한의 요구까지도 이문열 씨는 '과도'한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친절하게도 이문열 씨는 '자발성' '대가성' '상쇄효과' 등 "총체적 고려"라고 자기 나름대로 그 기준까지 제시해주셨다. 어디 한번 이 기준에 맞추어 조선일보를 평가해보자.

우선 조선일보는 '대정친목회'라는, 친일파 실업인들의 조직에 의해 창간되었고, 그 후에는 이완용에 버금가는 친일파라고 불리던 송병준에게 인수되었었다. 1924년 송병준이 경영난으로 말미암아 민족주의자 신석우에게 조선일보를 팔아넘긴 뒤로는 일시 '정통 민족지'로서의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1932년 다시 신문이 친일기업인인 방응모에게 넘어간 뒤로는 완벽한 '친일신문'으로 자리잡았으니, 이 정도면 '자발성'의 측면에서 과히 부족함이 없지 않은가? (여담이지만, 지금 조선일보가 항상 자랑하는 "민족정론지"로서의 역할은 신석우가 조선일보를 인수하고 나서 다시 방응모에게 넘어가기 까지의 1924년–32년간의 기간에 불과하다. 상해 임시정부 각료를 지내기도 했던 젊은 민족주의자 신석우는 조선일보를 인수하고 나서 역시 민족주의자로 이름높던 월남 이상재를 사장으로 임명하고, 젊은 민족주의, 진보주의 성향의 기자, 논설원들을 대거 고용하여 그 이전의 친일적 색채와는 완전히 대별되는 민족적, 진보적 신문을 만들었던 것이다. 이 당시 조선일보는 일제에 의해 정간과 휴간을 반복했고, 홍명희가 유명한 "임꺽정"을 조선일보에 연재하던 것도 이 때의 일이다.)

방응모가 경영권을 잡은 이후로 조선일보는 수많은 잡지, 신문이 폐간, 정간 당하던 일제 말기의 대탄압기에도 살아남았고 방응모도 광산기업 등으로 떼돈을 벌었으니 이 정도면 '대가'도 부족하지는 않을 것이다.

일제말기 많은 언론매체가 폐간당하고 많은 문인들이 스스로 붓을 꺾던 때에, 홍명희가 십여년에 걸쳐 써오던 임꺽정의 집필을 중단하고 스스로 절필을 하던 때에, 조선일보는 '대동아성전'에 적극 호응하고 내선일체를 앞장서서 부르짖으며 수많은 조선 젊은이들을 전쟁터로 내모는 데 주도적 일익을 담당하였으니, 그 '효과'는 조선일보가 존재함으로서 조선민족에게 기여하였을 약간의 긍정적 측면이 있었다해도 그것을 깡그리 상쇄하고도 충분히 남을 만한 것이 아닌가?

참으로 일류작가답게, 이문열 씨는 친일문제에 대해 명확한 기준을 제시하였다. 다만, 자신이 세운 기준에 맞추어 조선일보를 한번 분석해 주었으면 좋았으련만, 그는 역시 대가답게 더 이상의 언급을 않으니 애석한 노릇이다. 어쩌면 기업의 탈세를 비난하면서 자신들의 탈세에 대해서는 침묵하는 조선일보와 그렇게 닮았는가?


'신중한 친일론'? '신중한 친일'?

이문열 씨는 "운이 좋아서 일제 시대에 태어나는 걸 면했다"고 한다. 나도 공감한다. 이문열과 같이 탁월한 글재주와 비뚤어진 역사의식을 겸해 가진 사람이 일제시대에 태어났다면, 우리는 오늘날 이광수나 서정주를 훨씬 능가하는 '위대한 친일문인'을 가지게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나는 이문열 씨가 친일문제에 대해 '신중'하다고 하는 것이, 친일을 비판함에 있어 신중하게 하겠다는 것인지, 친일을 옹호하는 데 있어 신중하게 하겠다는 것인지를 잘 알 수가 없으며, 아마도 그것이 후자의 의미가 아니었는지 의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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