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 명정전 앞엔 박석이 깔려 있다.
ⓒ 이종원
들어가는 글

어렸을 때 엄마손 붙들고 창경궁에 놀러간 적이 있습니다. 원숭이, 코끼리가 있는 동물원도 기억나고, 청룡열차가 있는 놀이동산도 어렴풋이 기억이 납니다. 창경궁 벚꽃놀이도 머리 속에 하늘하늘 거립니다.

창경궁을 접할 기회가 또 있었지요. 대학시절 학교가 근처에 있어 매일 원남동 고가도로를 넘으면서 늘 창경궁을 그리워했습니다. 마음 속으로만 그리워했지 몸은 따르지 않았나 봅니다. 그렇게 가까운 곳을 10여년 동안 손가락으로만 꼽을 정도니까요.

며칠 전 아내와 자식을 둘씩이나 데리고 창경궁을 찾았습니다. 그리움을 이어주었던 고가도로는 사라졌지만 궁궐은 변함없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한때 서울시민의 놀이터로 전락하여 '창경원'으로 불린 적도 있었지요. 제 아이들에게 창경궁 본래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 흥화문..공포가 참 아름답다.
ⓒ 이종원

흥화문(보물384호)

정문 홍화문입니다. 지금은 서울대학병원을 묵묵히 바라보고 있지요. 지금은 건물에 묻혀 작아 보이지만 예전엔 참 높았던 건물이었을 겁니다. 2층 누대에 올라 사방을 지켰겠지요. 예전엔 못 느꼈는데 공포가 참 예쁘더군요.

궁궐의 권위를 보여주는 위엄이 정문부터 우러나옵니다. 하긴 민초들이 궁궐에 들어와 보았겠습니까? 그저 대문만 봐도 오금이 저렸을 겁니다. 처마선도 어머님 가슴처럼 풍만한 곡선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 옥천교..물이 흘러 좋다.
ⓒ 이종원
옥천교(보물 386호)

우선 물이 흐르니까 좋습니다. 경복궁이나 창덕궁의 돌다리는 물이 흐르지 않아 다리 역할을 상실했거든요. 이 물이 앞으로 복원될 청계천을 적시고 한강에 흘러갔으면 좋겠습니다. 풍수가 뭐 따로 있겠습니까? 두 홍예가 만나는 곳에 '나티'라는 짐승의 얼굴이 다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저 다리가 보이는 곳 양쪽에 수각이 놓여 있습니다. 다른 궁궐에는 볼 수 없는 독특한 방식입니다. 들어가지 말라는 푯말이 있지만 그곳에서 바라본 옥천교가 그렇게 아름다울 수 없답니다. 살짝 감상하고 나왔습니다.

▲ 명정문은 그 축이 살짝 꺽여 있다.
ⓒ 이종원
명정전 (국보 226호)

옥천교를 건너면 명정문이 나오지요. 명정문은 살짝 각도가 꺾여 있어요. 원래 축선이 일직선이어야 하는데 창경궁은 지대가 좁고 일직선으로 할 수 없는 사정이 있어 이렇게 절묘하게 문을 꺾어 놓았습니다. 활시위를 당기면 110m 날아간답니다. 결국 활이 정면으로 임금님을 향할 수 있기에 문을 꺾어 놓았다는 말도 있답니다. 상상력을 동원하면 건물 읽는 맛이 이렇게 재미있습니다.

정면에 자리잡은 건물이 정전인 '명정전'입니다. 법전인 만큼 월대가 2개나 놓여 있습니다. 하월대는 악공들이 자리잡고 왕의 출입을 알린답니다. 상월대는 당상관 이상이나 왕가의 가족들이 왕을 보위한다고 한답니다.

세월이 많이 흘러 저 같은 백성들도 궁궐에 들어와 이곳저곳 다니면서 신하도 되어 보고, 왕이 되어 호령해 봅니다. 물론 나를 따르는 신하는 하나도 없지만‥. 하하하.

박석 사이 사이에 잔디를 심었답니다. 신하들 가죽신 깔창은 돼지가죽으로 만들었는데 뜨거운 여름엔 발바닥이 무진장 뜨겁겠지요. 그 열을 식히려고 틈새에 잔디를 심었다고 하네요.

품계석

요새도 마찬가지지만 한 칸 앞으로 가려고 얼마나 노력을 했겠습니까? 그 한 칸 때문에 음모와 암투가 벌어졌겠지요. 동쪽은 문반이고 서쪽은 무반이라고 합니다. 이 두 개를 합쳐서 '양반'이라고 부르지요. 오늘날 양반이란 말은 바로 여기서 나왔답니다.

▲ 해태상과 태극문양의 소맷돌 그리고 답도
ⓒ 이종원
소맷돌과 답도

태극문양의 소맷돌이 구름 위를 날고 있습니다. 왕이 구름을 밟고 올라가면 천상의 세계가 나오겠지요. 귀엽게 생긴 해태상이 가운데 계단을 지키고 있습니다. 해학적 얼굴을 하고 있지만 중후한 무게감이 실려 있습니다.

답도에는 봉황이 새겨 있습니다. 중국은 황제의 나라이기에 용이 새겨져 있지만 제후국인 조선은 봉황을 그릴 수밖에 없었지요. 답도 밑에 새겨진 당초는 백성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민초들이 봉황를 떠받드는 형상이지요. 월대의 석물들은 궁궐 중에서 가장 오래된 석물이라고 합니다.

임금님이 계신 곳

명정전 안에는 일월오악도의 병풍이 보이고 그 앞에 용상이 있습니다. 사찰양식과 비슷합니다. 용상 위에는 닫집이 있어 그 화려함을 더해줍니다. 우물천장엔 예쁜 꽃이 화려하게 피어 있습니다. 천장엔 봉황 두 마리가 구름 위에서 노닐고 있습니다. 과연 천상세계를 구현하고 있습니다. 바닥엔 전돌이 깔려 있습니다. 둥근 기둥과 사각기둥이 함께 있네요. 둥근 기둥이 더 격이 있다고 합니다.

▲ 남향을 바라보고 있는 문정전
ⓒ 이종원
문정전

명정전 뒤에 위치하면서 남향을 하고 있어요. 형식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보는 왕실 건물로는 파격적인 배치랍니다. 명정전과 달리 내부 기둥은 네모이고, 바닥은 마루로 깔았습니다. 이곳엔 대비들이 많이 살았기에 '빈전'으로 많이 쓰였다고 합니다. 국상을 당했을 경우 이곳에 빈전이 설치되었고 또 3년상 때는 위패를 모셨던 '혼전'으로도 쓰였다고 합니다.

궁궐의 나무

정원은 계단식(화계)으로 놓여 있어 비스듬한 지세를 잘 활용하고 있습니다. 원래 궁궐은 소나무나 대나무를 많이 심었답니다. 일본이 국권을 침탈한 후 궁궐의 소나무마저 베어져 아카시아와 벚꽃이 대신 심어졌다고 합니다. 참 일본사람 무서워요. 이런 측면까지 고려해서 조선을 짓밟았으니까요. 궁궐에는 심지 못하는 나무들이 있답니다. 오동나무는 속이 비워서 심지 않았고, 가시나무는 임금님 찔릴까봐‥. 그리고 버드나무도 심지 않았다고 합니다.

▲ 숭문당
ⓒ 이종원
숭문당

이름 그대로 학문을 숭상하는 곳이지요. 성종은 어찌나 열심히 공부했는지 새벽 5시에 기상하여나 죽 한 그릇 때우고 아침부터 야밤까지 이곳에서 학문에 전념했다고 합니다. 왕이 주로 노는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숭문당은 건물 구조가 특이하답니다. 앞의 지대가 낮고 뒤쪽이 높기 때문에 누각형태로 지었습니다. 임금님은 방 안에서 신하는 마루에서 대화를 나누었겠지요. 숭문당이란 현판은 영조대왕의 친필이라고 합니다.

천랑을 따라 뒤쪽으로 가면 빈양문이 나옵니다. 이 문을 통과하면 내전 쪽으록 넘어갑니다. 혹자는 겉옷에서 내복으로 넘어가는 곳이라고 합니다.

▲ 함인정
ⓒ 이종원
함인정

빈양문을 벗어나면 가장 먼저 맞이해주는 건물이 '함인정'입니다. 정방형의 특이한 형태지요. 벽도 없고, 시원하게 트여 있고 처마선이 날렵하게 하늘을 향하고 있네요. 여기에 앉아 있어도 행복할 겁니다.

이곳에서 잔치가 많았답니다. 세조도 연산군도 그렇지만 도덕적으로 취약한 분들이 잔치를 많이 벌였다고 하더군요. 자기 합리화 때문일까요? 정자 가운데는 한 단이 높습니다. 임금님이 그곳에 앉았겠지요. 동서남북으로 계절을 예찬한 글들이 걸려 있습니다. 영조는 이곳에서 과거 급제한 사람들을 접견했다고 합니다.

환경전

원래 환경전은 임금님의 정침이지요. 이 곳에서 인조의 큰아들 소현세자가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검은 피가 9구멍에서 쏟아졌다니 독살되었다는 표현이 맞겠지요. 세자가 죽었는데 어의도 처벌받지 않고, 3년상도 아니고 1년상만 지냈다니 그렇게 추측할 수밖에 없지요.

아쉬운 것은 그의 죽음보다 그가 가져온 과학기술이 사장되었다는 겁니다. 150년 후 그 과학기술이 빛을 본 것은 수원 화성이랍니다. 10년의 공사를 34개월로 마쳤으니 말입니다. 만약 소현세자가 정권을 잡았다면 과학대국이 되지 않았을까요? 역사의 가정은 늘 이렇게 아쉬움만 남깁니다.

경춘전

환경전 옆에 동향을 하고 있는 건물이 경춘전입니다. 인현왕후, 혜경궁 홍씨가 돌아가신 곳이지요. 주로 왕실의 여인들의 한이 서린 곳입니다.

연산군 10년에 인수대비 즉 소혜왕후 한씨가 승하했습니다. 그녀는' 내훈'을 지어 왕실 여인의 법도를 이끌어나갔답니다. 연산군으로 인해 시름시름 앓다가 돌아가셨다고 하니 그 깐깐한 여인이 얼마나 분을 삭였겠습니까? '인현왕후전'의 주인공 인현왕후 민씨가 승하했고, 혜경궁 홍씨도 승하한 곳이기도 합니다.

여인네의 공간답게 이곳엔 왕자가 태어난 곳이기도 합니다. 태기가 있으면 이곳에 산실청이 설치되고 종을 답니다. 위급시 어의를 부르는 종이랍니다 왕자는 족제비 가죽 위에서 태어난다는데 이는 단합을 의미한다고 하네요. 아이가 탄생하면 산모도 아기도 사흘 후에나 목욕을 시킨다고 합니다. 왜 그런지 잘 모르겠어요. 옷도 새 옷을 입히는 것이 아니라 순산한 사람의 옷을 입혔다고 합니다. 순종은 고종의 옷을 입었다고 합니다.

무엇보다 태를 중요시 여겼답니다. 일반 백성은 태를 태웠지만, 깨끗한 날을 정해 물에 100번을 씻고 동전과 비단, 솜을 가득 담은 태항아리에 담고 6개월 이내에 좋은 길지를 찾았다고 합니다. 태는 후세를 이어주는 끈으로 여겼으니 그만큼 소중하게 생각했습니다.

▲ 통명전
ⓒ 이종원
통명전(보물 818호)

항상 느끼지만 궁궐에서 왕비가 머무는 곳의 이름은 참으로 직설적이고 대담하답니다. 경복궁은 교접하여 큰 자식을 얻으라는 '교태전(交泰殿)', 창덕궁은 크게 만들라는 의미의 '대조전(大造殿)'입니다. 창경궁은 '통명전(通明殿) '이지요. ' 밝음이 통하는 곳', 얼마나 멋진 말입니까. '明'자를 파자하면 해와 달이 통하는 곳이 아닐까요

이 건물은 7칸으로 창경궁에서 가장 크고 월대까지 갖추고 있어 격을 높여줍니다. 왕비전이 왕의 처소보다 크고 권위가 있다니 참 희한합니다. 월말 월초에 가족과 신하들의 하례를 받는 장소로 월대는 사용되었답니다.

무엇보다 이곳은 왕자를 만드는 곳입니다. 참 예전이나 지금이나 왕 노릇하기 힘들어요. 각 방마다 상궁들이 눈을 부라리며 지키고 있으니 인간적 본능을 애써 감추어야 했으니까요.

통명전 옆에는 연못이 있습니다. 주로 궁궐의 연못은 자연미가 그 주류를 이루는데 이곳만은 인공의 모습이 강조되었답니다. 연못엔 화분과 괴석이 있으며 인공적으로 물줄기를 이 곳으로 끌어들였답니다.

양화당

통명전 옆에는 양화당이 있습니다. 인조가 남한산성에 피난갔다고 통한의 한을 품고 청 태종에게 머리를 조아렸지요. 남한산성에서 돌아와 양화당에 머물면서 그 울분을 삭였다고 합니다.

그 밖의 유물

장군바위를 거쳐 올라가면 풍기대가 있고, 해시계도 보입니다. 성종태실비를 둘러보고 춘당지에서 맘껏 여유를 부렸습니다. 식물원도 둘러 보십시요. 우리나라 자생란이 전시되어 있답니다. 반대편으로 가면 '관천대'가 있습니다. 신라의 첨성대처럼 조선의 천문 관측대지요. 그곳을 넘어가면 종묘가 나옵니다. 창경궁 입장료로 종묘를 무료로 입장할 수 있습니다.

가족들과 고궁을 방문하여 역사의 주역이 되어 보는 것은 어떨는지요?

'우리 궁궐은 내가 지킨다'
궁궐지킴이 활동

▲ 창경궁 궁궐지킴이 최순정씨
궁궐 건축 양식뿐 아니라 그 건물에 살아 움직였던 왕실 사람들 이야기도 흥미를 돋구기에 충분했습니다. 바로 궁궐지킴이들의 친절한 설명 때문이었습니다.

궁궐지킴이는 서울의 주요 궁궐을 찾는 내외국인들을 대상으로 궁궐의 유래와 역사를 설명해주는 자원활동단체입니다. 그들이 있기에 궁궐은 단절된 역사가 아니라 살아있는 역사의 현장으로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 활동장소 : 경복궁, 창경궁, 덕수궁, 종묘

● 활동일시 : 매주 금요일 오전 10시, 오후 2시(경복궁은 오전 10시, 오후 1시, 2시, 3시)
매주 토요일 오전 10시, 오후 1시, 2시, 3시 (총 4회)

※ 단체예약은 인터넷 접수로 14일전에 하셔야 하며, 주중활동도 가능합니다.

● 사용언어 : 한국어, 영어, 일본어

● 문의전화 : 02-723-4206 한국의 재발견

홈페이지: http://www.palace.or.kr / 이종원

태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