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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석사 일주문. 소백산이 아니라 태백산 부석사다.
ⓒ 이종원
부석사….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설레이는 곳이다.

신경숙님의 소설 <부석사>를 읽은 적이 있다. 소설은 과연 돌이 붕 떠 있는지 그걸 확인하고자 실을 챙기고 무작정 서울은 벗어나면서 시작된다. 마음 속에 심한 상처를 받은 두 젊은이는 도피처로서 부석사를 삼은 것이다. 그러나 입구에도 가지 못하고 폭설에 가로막혀 마애불 근처를 헤매다가 소설은 끝을 맺는다. 제목은 <부석사>지만 부석사에 관한 내용은 하나도 없었다. 소설가의 눈을 빌려 부석사의 아름다움을 느끼고자 했던 나는 무척이나 실망했었다.

몇 년이 지난 후 다시 부석사를 찾아갔을 때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봐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눈으로는 극락을 확인하지 못하지만 분명 마음 속으로는 천상세계가 있다는 것을 믿는다. 그런 내면의 마음을 인간의 손을 빌려 천상세계를 구현한 것이 부석사다.

부석사의 창건

부석사는 신라가 삼국통일하던 문무왕 16년에 의상대사가 창건하여 화엄종의 종풍을 날린 곳이다. 통일신라시대의 가장 중요한 정치 이데올로기인 화엄종의 요체는 무엇인가? '하나가 전체이고, 전체가 다시 하나가 된다'라는 '원융사상'이다.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백성들을 하나로 묶는 이데올로기가 필요한 것이다. 어쩌면 이런 원융사상은 시대를 이끌 유일한 대안이며, 당시 국가경영에서 절실히 필요한 사상일게다.

그 출발점이 바로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이 절묘하게 나누어지는 이곳에 사상적 교두보를 확보하는 것이다. 그 만큼 이곳이 군사적, 전략적 요충지임을 말해준다.

태백산 부석사

일주문엔 '소백산 부석사'가 아니라 '태백산 부석사'란 현판을 달고 있다. 부석사를 보듬고 있는 산인 봉황산은 태백산 서쪽 100여리 떨어져 있으며, 태맥에서 이어진 맥이 봉황산에 닿고 있기 때문이다. 태백의 가지가 남서쪽으로 이어져 봉황산에서 꽃을 만발하고 있는 형국이다.

▲ 부석사 당간지주
ⓒ 이종원
부석사 당간지주

돌이끼가 세월을 말해준다. 천년의 세월을 한눈 파지 않고 거뜬히 견디어온 돌의 우직함이 그저 고맙다. 그 우직함에 세련미까지 갖추고 있다. 위로 갈수록 좁아지다가 끝을 반원으로 다듬었다. 머리에 동백기름을 바르고 다소곳이 앉아 있는 우리네 어머님의 모습같다.

구도를 찾아 산을 넘고 강을 건너 수백리 길을 거닐다가 깃발이 휘날리는 것을 보았을때 순례자들은 무슨 심정이었을까? 어쩌면 당간지주는 절의 간판이며 처음으로 만나게 되는 상징물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당간지주를 만나는 것을 좋아한다. 특히 폐사지에 우뚝 솟은 돌의 향연에 묘한 감흥이 일어난다. 비록 절은 없어졌을 망정 그 기개만은 살아 있기 때문이다.

▲ 부석사 석축. 은근한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다.
ⓒ 이종원
석축

부석사에서 표 내지 않고 은근한 아름다움을 선사하는 것이 바로 석축과 계단이다. 부석사는 터가 좁고 길기 때문에 평지를 만들기 위해 이렇게 석축을 쌓았다. 그것에 그치지 않고 극락에 이를 수 있는 마지막 세 방법인 '구품 만다라'를 구현한 것이다. 대석단 3개를 지나면 극락에 이르는 안양문을 지나게 된다. 하늘에서 보면 건물 배치도 빛날 '華'의 모습을 하고 있어 화엄종찰임을 말해준다.

▲ 범종루에서 바라본 무량수전과 안양루
ⓒ 이종원
범종루

이름은 범종루인데 막상 이곳엔 범종이 없다. 종은 종각에 자리잡고 있고 이곳엔 법고, 운판, 목어만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범종루에서 유심히 봐야 할 부분이 있다. 특이한 지붕모양이다. 정면은 팔작 지붕인데 뒤는 맛배지붕을 하고 있다. 정면은 아스라한 소백의 연봉들과 조화를 이루고, 후면은 팔작지붕의 무량수전과 같은 느낌을 이어간다. 만약 범종루 계단을 오르면서 처마가 있다면 산과 하늘 그리고 무량수전을 바라보는 시야를 방해했을 것이다.

이곳에서 안양루와 부석사를 바라보라.

삼층석탑 2기가 양편에 자리잡고 있다. 물론 사찰양식에 어긋나는 것을 볼 때 이곳에 원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인근 골짜기 절터에서 이곳에 옮겨온 것이란다.

▲ 안양루. 축선이 꺾여 있다.
ⓒ 이종원
안양루

부석사 가람 배치 중에서 가장 인상깊은 곳이 바로 이곳이다. 중심 축선이 일직선으로만 뻗어 오르다가 안양루를 앞에 두고 축선이 살짝 꺽인다. 만약 직선이었으면 얼마나 단조로울까? 이렇게 변화를 주어 꿈틀거리는 생명력을 심어준다. 딱딱한 작대기가 아니라 꿈틀거리는 뱀의 생명력이랄까?

또한 방향의 전환은 숨을 틔워 엄격한 대칭이나 계층이 주는 위압감을 줄이려는 의도가 담긴 것이란다. 그렇다. 완벽에서 벗어난 여유 그리고 자연스런 비대칭이 우리 문화의 구수한 맛이다.

▲ 안양루 계단에서 바라본 무량수전, 석등에 그려진 공양보살상, 공민왕이 썼다는 현판
ⓒ 이종원
마지막 관문, 안양문이다. 안양은 극락의 다른 이름이다. 이곳을 지나면 바로 극락세계가 나오는 것이다. 빨려 들어가듯 숨가쁘게 계단을 오른다. 석등이 나온다. 한가운데 가로막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른쪽으로 살짝 비켜 있다.

왼쪽 여백의 공간을 보며 속세의 때를 씻고 지난날 살아온 자신의 인생을 돌이켜 본다. 그리고 그 모든 해탈에서 벗어나 극락의 문으로 진입하게 되는 것이다. 안양문이 바로 극락문이며, 가톨릭의 천국의 문인 것이다. 성경에서는 베드로가 천국의 열쇠를 들고 있지만 부석사는 공양보살상이 천국에 들어온 것을 기뻐하고 있다.

극락(무량수전)에 진입하는 클라이막스가 바로 이 장면이다. 안양루 누각 밑 계단을 오르면서 극락의 모습을 살짝 보여준다.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이 석등 지붕돌이다. 그러나 석등은 살짝 비켜 있다. 절대자 예수님의 도래를 예언한 세례자 요한의 모습이랄까? 석등은 절대자 무량수전을 위해 자신의 미를 양보한다. 석공은 이렇게 무량수전에 극대화된 감동을 주기 위해 인위적으로 석등을 비켜 세운 것이다.

석등

탑도 없이 석등(국보 17호)만이 무량수전 앞마당을 홀로 밝히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석등이다. 세련되고 깔끔한 조형미가 철철 넘친다. 각 면에는 아름다운 보살상이 조각되어 있다. 살짝 고개를 돌리고 수줍은 듯한 미소가 탐승객의 가슴을 빼앗는다.

▲ 극락세계를 구현한 무량수전
ⓒ 이종원
부석사 무량수전

극락이며 천국이다.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 된 목조건물이면서도 미적인 감동을 지닌 곳.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 사무치는 고마움으로 이 아름다운 뜻을 몇 번이고 자문자답했다. 무량수전은 고려 중기 건축이지만 우리 민족이 보존해온 목조건물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오래된 건물임이 틀림없다. 기둥 높이와 굵기, 사뿐히 고개를 든 지붕추녀의 곡선과 그 기둥이주는 조화, 간결하면서도 역학적으로 기능에 충실한 주심포의 아름다움, 이것은 꼭 갖출 것만을 갖춘 필요미이며, 문창살 하나 문지방 하나에도 나타나 있는 비례의 상쾌함이 이를 데가 없다. 멀찍이서 바라봐도 가까이서 쓰다듬어 봐도 너그러운 자태이며 근시안적인 신경질이나 거드름이 없다."

- 최순우의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


아마 '배흘림 기둥'이란 말을 가장 많이 들었을 것이다. 이는 기둥의 아래쪽 1/3쯤이 가장 볼록하게 배가 불러 보이게 한 것을 말하는 것이고, '귀솟음기법'이 건물에 도입되었는데, 이는 건물 모서리 기둥을 중앙보다 좀 더 높인 것을 말한다.

이 두 가지는 사람들의 착시를 교정하고 시각적인 안정감을 줄려는 것이다. 처마선이 새의 날개처럼 하늘로 치솟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한국적 아름다운 곡선미가 아닐까? 고려의 건물을 오늘날까지 볼 수 있다는 것에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무량수전 현판은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안동에 머물 때 쓴 글씨란다.

벽에도 벽화가 없고 노란색으로 둘러져 있다. 천국에 무슨 외향적 치장이 필요하겠는가? 이런한 담백함이 더욱 순례자의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한참을 넋 나간 사람처럼 건물의 미에 빠져본다.

무량수전에 모신 불상은 진흙으로 만들어졌다. 높이가 2.78m로 거대한 불상이다. 그런데 부처가 가운데 앉아 계신 것이 아니라 서쪽에 앉아서 동쪽을 바라 보고 있어 여러 상상력을 자극한다.

▲ 바위가 떠 있다는 부석.
ⓒ 이종원
처음 절을 세울려고 했을때 이교도들이 반대를 했다. 선묘의 힘을 빌어 바위가 공중에 세 번 떠오른 것이다. 놀란 이교도들은 겁을 먹고 도주했다고 한다. 그 바위가 바로 부석이다. 옆에는 인근에서 옮긴 불상 세 분을 모시고 있다.

▲ 고려건물인 조사당
ⓒ 이종원
조사당

삼층석탑을 돌아 산길을 따라 오르면 조사당(국보 19호)에 이르게 된다. 그 절의 조사스님을 기리는 전각이다. 물론 창건주인 의상을 모신 곳이다. 내부에는 의상대사를 모신 조각물이 있으며 한편엔 선묘낭자가 애타게 의상대사를 바라보고 있다.

맞배지붕의 주심포건물이다. 작은 집이지만 단정하고 조용한 느낌을 갖는다. 우리나라에 고려시대 건물이 6개밖에 남지 않았는데 부석사에만 2개나 간직하고 있으니 이 곳에 절을 세운 의상대사에게 그저 감사함을 느낀다.

한 옆엔 낚시 그물처럼 잘게 엮어진 철조망으로 둘러져 있다. 그 안엔 나무가 한 그루 있는데. 다름 아닌 선비화(仙扉花)다. 의상대사가 지팡이를 꽂아 놓았는데 나무로 자란 것이다. 저 잎을 따다 다려먹으면 아들 낳는다는 낭설 때문에 이렇게 교도소 면회소 같은 곳에서 보관되어 있다. 21세기 무지와 욕심 때문에 이런 씁쓸한 모습을 봐야 한다.

부석사 3층 석탑

조사당을 보고 삼층석탑을 둘러본다. 불당앞에 놓였어야 할 탑이 한쪽에 있으니 의아스럽다. 서쪽에 자리잡고 있는 아미타불과 마주하는 자리가 동쪽 끝이기에 여기에 잡았다는 설과 그리고 무량수전 마당이 협소하여 탑이 놓일 자리가 없기에 이곳에 세웠다는 설이 있다. 지난번 경주에서 보았던 황복사지 탑과 규모나 형태가 비슷하다. 의상대사는 황복사지에서 수행했다고 하던데..무슨 연관이 있지 않을까?

소백의 연봉을 가장 아름답게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이 탑이 놓여 있는 자리다. 측면의 무량수전이 한 눈에 들어오고, 그리고 태백과 소백의 준령이 아스라이 펼처진다. 선경이라고 표현해도 과언은 아닐거다. 넓은 바다를 바라보는 느낌이 든다. 그렇다면 3층석탑은 바다를 비추는 등대겠지. 그 옆엔 화사석을 잃어버린 석등도 외롭게 소백을 바라보고 있다.

▲ 삼층석탑에서 바라본 소백의 연봉들과 동부도밭.
ⓒ 이종원
부도밭

범종루에서 동쪽으로 올라가면 작은 오솔길이 나온다. '출입금지' 란 푯말이 가로막았지만 살며시 들어갔다. 살짝 고개를 돌리고 있는 원융국사비의 거북 얼굴이 생동감 넘친다. 조금 더 가면 부도밭이 나온다. 푸른 사과밭이 드넓게 펼쳐진다. 이곳에서 바라본 시원한 눈 맛을 어찌 잊겠는가?

부석사를 떠나며

여러 번 봐도 싫증이 나지 않은 절이 몇 군데 있다. 부석사가 그렇다. 다음엔 해질녁에 와서 붉게 물든 노을을 바라보며 대종소리를 들어야겠다. 홀로 올라가서 마음껏 사무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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