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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떠나는 그대

전화를 자동 응답으로 돌려놓고
거실에는 자동 점등 장치를 켜놓고
가스를 잠갔나 두 번 확인하고
보일러는 18도 이하로 맞춰놓고
거실에 FM 음악 방송을 틀어놓고
현관문을 이중으로 잠근 다음
다시 한번 뒤돌아보며 집을
떠난 그대여
한번 떠나서 돌아오지 않는 하루 이틀 나흘......
세금을 내고 비워놓은 이 집이
얼마나 오랫동안 견딜 수 있을지
신문과 광고물이 금방 문앞에 쌓이고
검침원이 초인종을 누르다가 되돌아가고
옆집 개가 빈집을 향하여 짖어대고
우편함에 꽂힌 공납금 고지서가 누렇게 빛 바래
이 집이 비어 있음을 누가 모르겠는가
그래도 그대는 떠난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을 것처럼 집안 단속을 하고
문을 잠갔나 확인하고
손때 묻은 세간살이 가득 찬 정든
집을 등뒤로 남겨놓은 채
손가방만 하나 들고 결연히 떠나서
새 집을 찾는다 언젠가
그 집을 가득 채우고 다시
비어놓은 채 뒤돌아보며 집을
떠날 그대여
몇 번이고 망설이며 떠났다가
소리없이 돌아와 혼자서
다시 떠나는 그대여

김광규


▲ 땅끝마을 토말비 ⓒ 김남희
다시 배낭을 꾸려 집을 나선 지 이틀째.
나는 지금 전라남도 강진에 와 있다.

해마다 한 번씩 축복처럼 내게 주어지는 한 달간의 여름 휴가.
늘 비좁은 한반도가 숨막혀 기를 쓰고 밖으로 나돌기만 했는데, 올해는 땅끝 마을에서 통일전망대까지 걷기로 결심하고 서울을 떠난 게 지난 금요일 밤이다.

휴가를 신청할 때 뭘 할 거냐는 질문에 한반도 남쪽 끝에서 북쪽까지 걸을 거라고 대답했더니 웃음기 걷힌 진지한 얼굴로 "잘 아는 정신과 의사가 있는데 상담하러 안 가보겠느냐"고 묻던 상사 얼굴이 떠오른다.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왜 걷는 거냐고.

오랫동안 준비해온 먼 여행이 예상치 못했던 일을 겪으며 미뤄진 후, 내가 의기소침해 있었음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아무렇지 않은 듯, 그까짓 일쯤이야 라며, 자못 씩씩한 얼굴로 돌아다니고 있었지만 스스로에게 겁먹고 놀라있던 시간들이었다. 나를 상처 입힌 건 다름 아닌 나였음을 이제야 인정한다.

익숙했던 내 모습은 간 데 없고, 낯설고 두려운 얼굴만이 나를 바라보던 그때. 그 길지 않았으나, 몹시 길기도 했던 시간을 지나치는 동안 겨울에서 봄으로, 봄에서 다시 여름으로 계절이 흐르고 있었다. 언제 떠날 거냐는 가까운 이들의 질문에 "여름에는 가야겠지요" 라고 막연히 대답하며 나는 불안해하고 있었다.
그사이 '떠날 수 있을까?'에서 '떠나야만 하는 걸까?' '왜 떠나려고 하는 거지?'로 질문들은 바뀌어 가고 있었고.

어느 질문에도 대답하지 못한 채 그저 열심히 산엘 다녔다. 나를 위로해 주는 건 산과 산에서 만나는 이들이었다. 뒤늦게 만나는 우리 산하의 아름다움도 새삼스럽게 눈물겨웠고.

그래서였을까.
걷고 싶었다. 남의 땅을 떠돌기 전에, 꼭 한 번, 우리 땅 끝에서 끝까지, 내 발로 걷고 싶었다. 걷는 동안 내가 누구인지, 어떤 삶을 살고자 하는지, 내가 떠나고자 하는 길이 비겁한 도피는 아닌지 다시 스스로에게 물어보고 싶었다.

언제나 한 달간의 여행을 마칠 때면 스스로에 대한 믿음과 애정을 깊게 채워 돌아오던 내 모습도 그리웠다. 내가 잃어버린 용기와 자신감을 되찾아 씩씩한 얼굴로 웃으며 이 땅을 떠나고 싶었다.

아, 또 하나의 이유.
짧았던 여행의 끝마다, 어딘가로 이어진 길을 보며 아쉬움으로 발길을 머뭇거리던 기억들이 내게는 흉터처럼 남아 있다. 더 이상 갈 곳이 없을 때까지, 길의 끝까지 가고 싶었던 열망. 곧게 뻗은 아스팔트 길에서, 휜 등처럼 굽은 흙 길에서도, 나는 늘 길 위에 서면 목말랐고, 초조했다. 저 길의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설사 그 '세상의 끝'에서 내가 만나는 것이 "무수히 떠났으되, 결국은 돌아오게 된 집"이라 할지라도 끝까지 가고 싶었다.

아직도 철조망에 나뉘어진 한반도.
길의 끝이 선명한 상처로 남아 있는 곳이 아닌가.

그래서 걷는다.
뛸 수는 없으니까. 자전거의 속도조차 부담스럽기에, 그냥 걸어보는 거다. 내게 주어진 한 달의 시간으로는 백두대간의 산길을 걷는다는 것이 무리기에, 국도를 걸어 더 이상 갈 수 없는 곳까지 가는 거다.

할 수 있을까? 30일 동안 800km를 걷는 건 지금의 내 체력에 무리가 아닐까? 방안을 맴돌며 계산만 하기보다는, 가다가 돌아올지언정 일단 걸어보기로 하는 거다. 최선을 다했지만 그게 내 힘에 부치는 일임을 깨닫게 된다면, 그때 가서 후퇴해도 늦지는 않으니까. 화이팅 한 번 외치고 일단 걸어보는 거다. 그 무모한 행동의 결과로 지금 나는 강진 pc방에서 이 글을 쓴다. 꼭 한 달간 국도 위에 남겨질 내 땀과 눈물을 기억하기 위해.


▲ 모내기 준비에 이른 아침부터 바쁜 농부. 뒤로 안개에 잠긴 두륜산이 보인다.
ⓒ 김남희

2001년 6월 9일 토요일 맑다.
광주 고속버스터미널에 내리니 새벽 4시 50분. 운이 좋아 바로 해남행 버스로 갈아탈 수 있었다. 안전벨트를 저절로 찾게 만드는 뛰어난 운전 실력을 갖춘 기사 덕에 땅끝 마을에 도착하니 7시가 채 안됐다.

봄의 끝에 선 바다는 마지막 한가로움을 즐기려는 듯, 게으른 아낙처럼 늘어져 납작 엎드려 있다. 도선장 옆 '우리 식당'에 들어가 백반으로 아침을 먹고, 땅끝 이정표가 적힌 곳을 찾는다.

해남군 송지면 갈두리 사자봉 땅끝.
토말비 앞에 서서 무사귀환을 기원하고 나니 8시.
출발이다.

813번 국도를 따라 걷는다.
태양은 아직 구름 뒤에 남아 있고, 바닷가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서늘하다. 도로를 달리는 차도 보이지 않는다. 상쾌하다.

오늘은 첫날이라 '50분 걷고 10분 쉬고'가 우리의 계획이다.
계속 따라오는 푸른 바다 덕분에 길은 전혀 지루하지 않다. 격려차 도우미로 내려온 미영 언니, 빈대떡이 먹고 싶다, 쌈밥 먹고 싶지 않냐는 등 진군의욕을 꺾는 잇달은 발언으로 잠시 자격론 시비가 일다.

10시 40분. 북일면 도착.
여전히 오른 쪽으로는 바다가 힐끗힐끗 나타난다.
12시. 평암 지나 도로변에 '우리 상회'가 눈에 띄길래 들어가 라면을 끓여달라고 요청했다. 아침밥 먹은 곳은 '우리 식당' 점심밥 먹는 곳은 '우리 상회'라. 이러다 잠자는 곳은 '우리장'이 아닐지, 별 시덥잖은 생각도 해본다.

단조롭고 지루한 시골 마을에 나타난 낯선 처자들인지라, 단숨에 동네 어른들의 관심을 끌고 마는 우리 둘.

"어서 왔능교?"
"땅끝마을에서요."
"워디꺼정 가는데?"
"강원도까지 걸어서 가는데요."
"워메, 징한 것. 여그서 거그가 어디라고 걸어 간댜?"
"얼척없네. 얼척없어."
"내 맴이 다 짠하네."
"왜? 돈이 없소?"
"부잣집 딸들이니까 그럴겨. 가난한 집 여식들은 아녀."
"강진꺼정 경운기 태워줄텡기 타고들 가."
"안돼요. 반칙이에요."
"누가 시켰능가? 대핵교 교수가 시키던가?"
"아, 반칙 좀 하면 어떻고롬? 살다보면 반칙도 하는 거제."

다들 한 말씀 하시느라 정신이 없다.
그 사이 라면은 끓고, 인심 좋은 아주머닌 공기밥을 내오고, 김치도 갖다 주신다. 후다다닥... 마파람에 게눈 감추는 소리. 정신없이 국물까지 남김없이 들이마신다.

배가 부르고 나니 졸음이 밀려 온다.
좀 더 뻔뻔스러워져도 될 것 같아 주인아저씨께 대청마루에서 한 숨 자고 가도 되느냐고 여쭸더니 선선이 그러라신다. 바람 솔솔 부는 대청마루에 누워 1시간 반을 자고 나니 2시 반.

다시 걷기 시작해 북평면 남창에 도착하니 4시. 쇄노재를 넘어 북일면 가는 길은 고개를 넘는 숲길이다. 질주하는 차도 많지 않아 걷는 기분이 난다. 길가 풀숲에 빨갛게 익어 고개를 내민 산딸기가 보인다.
못 본 척 그냥 가면 섭섭하겠지. 몇 알 따서 입안에 넣으니 새콤달콤한 물이 찌-익 나온다. 아, 맛있다.
매사에 요모조모 분석하기 좋아하고, 궁금한 거 많은 미영 언니.
산딸기를 먹으면서도 한마디 한다.
"요즘 종로 같은 데서 파는 산딸기는 분명히 중국에서 수입한 걸 거야. 요즘 우리 나라 시골에 이런 거 딸 사람이 어디 있겠냐? 그치?"

6시 반. 드디어 오늘의 목적지인 신월에 도착.
꼬박 8시간 동안 32km를 걸었다. 첫날치고는 나쁘지 않은 성적이다.
길가의 기사식당에서 행군을 자축하며 삼겹살에 맥주 한 잔.

이제 잠자리만 구하면 오늘 하루 일이 끝이다.
첫날부터 여관 가기는 싫어서 식당 아저씨께 이 근처에 할머니 혼자 사시는 집이 없냐고 여쭸더니 몇 집을 가르쳐 주신다. 첫 번째 할머니는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장흥 사는 아들이 와서 오늘은 안 되겠다고 하시고, 두 번째 할머니 집엘 찾아 가니 몇 마디 물어보시더니 들어오라신다, 얏호.

씻고 오늘 입은 옷 다 빨아서 마당에 널고 나니 8시 반.
발바닥이 좀 아픈 것만 빼면 몸도 기분 좋을 정도로만 피곤하다.
거의 행복하다. 자, 내일도 화이팅!

2001년 6월 10일 일요일 흐림.
눈을 뜨니 6시다. 어젯밤 9시부터 잤으니 꼬박 9시간을 잔 셈인가.
피로해서인지 뒤척이지도 않고 푹 잤다. 해가 뜨거워지기 전에 많이 걷겠다는 욕심에 서둘러 집을 나선다. 할머님께 맛있는 거 사 드시라고 돈을 조금 드렸더니, 밥 먹고 가라고 붙잡으신다.
"찬 없어도 많이들 묵어" 하시는데 상을 흘끗 보니 정말 찬이라곤 열무김치와 김이 전부다. 그래도 고추장에 열무김치를 넣고 슥슥 비벼 먹으니 꿀맛이다. 할머니 기념사진을 한 장 찍고, 출발.

오늘은 더울 것 같다.
바람 한 점 불지 않는다. 왼편으로 보이는 두륜산은 허리쯤에 안개가 잠겨 잘 그린 동양화 한 폭이다. 저 바위 능선을 따라 가는 리찌등반을 하면 정말 재밌겠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확실히 어제보다는 발이 무겁다.
속도가 처지는 건 당연하다. 강진까지 9km를 남겨 놓은 도암에 도착하니 11시. 삼거리의 가게에 들어가 어제처럼 라면을 끓여 달라고 해 먹는데 역시나 할머니께서 공기 가득 밥을 퍼다 주신다. 전라도 돌산 갓김치라며 꺼내주신 김치, 이건 예술의 경지다. 별로 김치를 좋아하지 않는 나이지만, 무섭게 먹는다.
사람 좋아하고 술 좋아하는 미영언니, "여기까지 와서 예의상 전라도 막걸리는 먹어줘야겠지?" 중얼거리더니 막걸리 반 병을 반주로 비워낸다. 밥 먹고 난 후, 또 한숨 자고 가겠다고 허락을 얻어 마루방에 들어가 늘어지게 잤다.

도보여행하는 동안 11시반부터 2시반까지는 걷지 않기로 원칙을 정했다. 뫼르소처럼 뜨거운 햇볕 때문에 살인을 저지르는 일은 미연에 방지해야 하지 않을까. 자고 일어났더니 마당에 내다 넌 빨래가 뽀송뽀송하게 말랐다. 뽀송뽀송한 빨래를 개고 있자니 축 늘어졌던 몸까지 뽀송뽀송하게 말라가는 느낌이다.

집을 나서는데 가게 할머니가 가지 말고 여기서 살자고 하신다.
둘 있는 아들은 다 김해에 있고, 할아버지랑 두 분이서 사신다더니 외로우신가보다. "넘의 집 힘들게 다 키운 딸들을 욕심 내면 안 되겠쟈?"하며 웃으시는 모습이 쓸쓸해 보여 마음이 젖어 온다.

이제 813번 국도와는 안녕이다.
18번 지방도로를 타니 오른쪽으로는 만덕산이다.
발걸음이 자꾸 늦어진다.
언니도 힘이 드는지 말도 없이 뒤에 처져서 걷고 있다.
그래도 돌아보면 눈을 마주칠 누군가가 있어 외롭지 않다.
왼쪽 네 번째 발가락에 잡힌 물집이 자꾸 거슬린다.

5시. 드디어 강진에 도착.
오늘 걸은 거리는 22km.
오늘은 강진까지만 가기로 한다.

읍내에 들어와 어디서 묵을까 고민하고 있는데, 언니는 내가 내일부터는 혼자 여관에서 자야 할 테니까 연습도 할 겸 오늘은 여관에서 자자고 한다. 마침 남촌여인숙이라고 조그마한 기와집이 보인다. 가운데에 작은 마당이 딸린 ㄷ자 모양의 시골집이다. 숙박비는 단돈 10,000원.

깨끗한 방으로 달라고 했더니 구석방을 주신다. 밤에 술취한 남자들도 오고 하니까 구석방이 나을 거라면서. 씻고, 빨래 해서 널고 깨끗해진 몸으로 나와 중국집에서 깐풍기에 짜장면을 시켜 먹었다. 많이 걷는 탓인지 유난히 입맛이 좋아 평소보다 배는 먹고 있는 것 같다.

이제 내일부터는 혼자이다.
오늘 밤 지도를 보고, 예정대로 영암, 나주를 거쳐 광주를 관통할지, 아니면 장흥, 보성, 구례를 거쳐갈지 결정해야 한다.
혼자서도 잘해내리라 스스로를 격려해 본다.
김남희, 힘 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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