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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가 18일 조선일보 김대중 주필의 칼럼을 비판한 글을 보내온 데 이어 재미언론인 김민웅 씨가 김주필의 절필을 주장하는 글을 보내왔습니다.....편집자주)



조선일보 김대중 주필의 <대북 원맨쇼에 걸린 제동>이라는 칼럼이 주장하는 요점은 매우 분명하다. 한-미 정상회담의 결과를 실패로 규정하면서, 김대중 대통령의 대북 정책이 국민적 동의와 지지 기반이 빈약한 가운데 독선적 원맨쇼로 진행되는 바람에, 미국이 내부적 갈등을 비집고 들어올 틈을 주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로써 미국의 제동을 자초한 것이 그 실패의 원인이라는 진단이다.

따라서, 부시 미 행정부와의 대북 정책 조율이 어긋난 책임은 어디까지나 김대중 정부가 내부적인 합의 조성에 성공하지 못한 것에 있다는 것이다. 내부적인 합의가 단단했더라면 김대중 정부의 대북 정책 방향에 대한 미국의 <냉동(冷凍)>이 여의치 못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조선일보 주필의 사대주의를 말한다 1]
계산된 용미당쟁(用美黨爭)의 해악 - 한상진 교수


또한 대북 정책을 두고 이토록 내부적인 갈등과 우려 그리고 불안이 존재하고 있는 상황에서, 1년 남짓 임기가 남은 정권을 상대로 8년 집권을 목표로 하고 있는 미국의 부시정권이 무슨 장기적 구상으로 대북 정책을 조율할 의사가 있을 수 있겠는가라는 것이다. 미국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발상과 선택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김대중 대통령은 향후 자신이 연 남북화해시대의 문이 닫히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또 한국의 안전과 평화를 책임진 대통령의 책무를 다하기 위해서 남은 임기 동안 해야할 일이 무엇이며 대북 정책 스타일을 어떻게 조정할 것인지, 그리고 어떻게 하는 것이 내부의 갈등을 줄이는 것인지를 재검토해야 한다"고 권고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고려에서 우리가 근본적으로 각성해야 할 바는 지금 우리의 경제도, 남북도, 안전도, 평화도 특히 미국에 결정적으로 달려 있기에 <미국은 우리에게 숙명>이라는 점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민족적 감정으로 반응할 일도 아니며, 배알이 없어서 그런 것도 아니니, 우리와 미국과의 관계라는 것이 가지고 있는 현실적 엄연함을 고려하여 나라의 장래를 머리로 냉철히 사고해야 우리에게 살 길이 열린다는 것이다.

중첩의 부담이 있지만, 다시 정리해 보자면 다음과 같은 주장이 된다.

"한-미 정상회담은 대북 정책 조율에 실패했다. 이 모든 책임은 김대중 대통령의 원맨쇼적 발상과 정책에 있는데, 미국으로서는 그걸 그대로 받아주기 어렵다고 판단, 제동을 건 것이고 도리어 다음 정권과의 조율이 보다 낫다고 여겼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러한 상황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답은 간단하다. 내부적 갈등을 해소하고 합의를 새롭게 조성하는 일이다. 그러나, 여기에 관건이 하나 있다. 우리의 처지는 미국에게 결정적으로 달려 있다. 그러니 이것을 고려하지 않는 합의란 결국 또 다시 제동이 걸릴 것이 뻔하지 않는가? 민족적 자주성 운운하면서 불쾌해 하지 말고, 부디 냉철한 머리로 한-미 관계의 현실을 꿰뚫어 보고 나라의 장래를 도모할 일이다."

자, 그렇다면 이제 김대중 주필의 논지를 하나씩 따져보기로 하자.

우선 첫째, 한-미 정상회담은 실패했는가? 그렇다. 김대중 대통령의 방미성과는 한마디로 참담한 것이었다. 한반도의 평화시스템 구축을 위한 미국의 정책적 지원과 협조를 구체적으로 이끌어내는 데 성공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한-미 공조 이상 무"라고 주장하는 김대중 정부의 한미정상회담 성과의 낯뜨거운 선전과 홍보는 "미국의 요구에 굴복"이라는 자기 고백이 되고 만다는 사실을 김대중 대통령과 그의 정부는 심각하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

이쪽의 주장은 진지하게 경청하지 않은 오만하기 짝이 없는 상대를 만나, 줏대 있게 평소의 소신을 내세우지도 못하고 거의 일방적인 압박만을 받고 돌아온 회담을 성공이라느니 또는 공조 확인이라느니 하는 논리로 포장하는 것은 국민을 속이는 일이 된다. 그리고 그러한 자세는 진정한 내부적 합의를 형성하는 기본원칙을 바로세우지 못하는 원인이 되고 마는 것이다.

김대중 주필이 보는 실패는 그러나 이러한 점에 있지 않다. 그는 미국의 입장에 미리 맞추어 조율하지 못한 김대중 정부의 외교적 실패를 거론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시각은 글의 후반부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자신을 미국 부시정권의 대변인쯤으로 착각하고 있는 모양이다.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기를 바란다는 투이다. 조선일보가 언제부터 부시정권의 기관지가 되었는가?

둘째, 실패의 근본적인 원인은 내부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지 못한 김대중 대통령의 대북 원맨쇼에 있는가? 결코 아니다. 실패의 근본적인 책임은 미국의 군사주의적 대한반도 정책에 있다. 부시 정권은 애초부터 클린턴 정부 이래 진행되어온 한반도 긴장완화 정책을 지지할 의사를 갖고 있지 않았으며, 이것을 김대중 정부에게 명확하게 인식시키기 위한 것에 이번 한-미 정상회담을 대하는 소기의 목적이 있는 것이었다.

결국, 애초부터 우리가 원하는 방식과 방향의 조율이 성공할 수 없는 회담이었다. 그런 점에서, 미국으로서는 일정한 성공을 거둔 회담이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로서는 실패의 내용이 무엇인가가 중요한데, 그것은 바로 이렇게 우리의 민족적 이해를 관철하는 국제환경의 조성이 쉽지 않았다는 점이다. 따라서 김대중 주필은 이 실패의 내용을 가지고 미국의 대한반도 정책을 집중적으로 문제삼았어야 한다. 이번 회담의 결과를 통해 우리가 절실하게 깨우쳐야 하는 바는,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이루어내는 일에 미국의 부시정권이 막대한 장애로 등장했다는 사실이다.

김대중 주필 자신이 언급하기를, "한국 국민의 기대와 보람을 존중한다는 측면에서도 김 대통령의 보따리를 그렇게 봉쇄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했듯이 부시정권의 봉쇄정책이 가지고 있는 면모를 보다 신랄하게 따지고 들었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못한다면, 그가 말하는 내부의 합의가 무엇을 지향해야 하는지도 불분명해진다는 사실을 김대중 주필은 인식해야 할 것이다.

우리에게 요구되는 내부의 합의란 다른 것이 아니다. 미국의 군사주의적 대한반도 정책과 그 간섭에 결연히 반대하고, 민족적 협력을 문제해결의 근간으로 삼는 것이다. 그는 책임의 소재를 엉뚱한 곳에서 찾고 있다. 미국의 대북 정책이 지니고 있는 근본문제는 철저하게 피해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그가 반민족적 사대숙명론자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스스로 설명해 주고 있다.

셋째, 김대중 대통령의 대북 정책은 원맨쇼인가? 혼자서 잘 났다고 설치다가 꼴 우습게 되었다는 것이다. 과연 그런가? 아니다. 김대중 대통령이 집권한 이래 민족사적으로 가장 긍정적으로 인식되어야 할 일이 바로 그의 대북 정책이다. 이것은 그의 노벨 평화상 수상으로도 세계적 평가가 완료된 바 있다.

그의 대북 정책은 이제껏 분단의 역사에서 줄기차게 이어져 온 민족사적 요구에 대한 국가지도자의 치열한 응답이다. 그 자신의 정치적 운명에 나라의 미래를 걸고 있는 것은 따라서 높이 평가해야 할 바이다. 김대중 주필은 이러한 면모를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어서인지 "사실 남북의 화해와 대화를 열망하고 한반도의 안정과 평화를 바라는 대다수의 한국사람들은 그 방향의 선두에 선 김 대통령의 노력을 수긍하면서도 점차 독선적으로 변해 가는 그의 대북 스타일"이라고 그 스타일상의 문제를 거론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자세를 <남북 문제의 챔피온이 되겠다는 폐쇄적 소명감>이라고 지탄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의 형편에서, 남북 문제의 해결은 지도자의 의지력 강한 결단이 아니고서는 돌파구가 열리지 않는다. 이것은 지난 해 남북 정상회담에서 그 실체가 확연히 경험된 바이다. 그것은 원맨쇼가 아니라, 지도자로서 당연히 감당해야 할,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으며 피할 수 없는 책무이다.

사실, 김대중 대통령이 남북 문제 해결에 대한 민주적 공론의 수렴을 도외시하고 사태를 진행시켰다면 모르겠거니와, 그의 스타일은 미국의 간섭과 냉전수구세력의 도전을 의식하여 너무도 주저하고 머뭇거리는 경우가 오히려 많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남북관계에 대한 독선적 논리와 폐쇄적 사명감에 불탄 존재는 도리어 조선일보이며, 김대중 주필 자신이다. 냉전논리로 평화통일정책을 단죄하는 일에 앞장서 온 그간의 조선일보의 논조와 김 주필의 글은 바로 그 명백한 증거이다.

우리 민족의 대다수가 새로운 민족화해의 시대가 조속히 꽃피기를 열망하고 있는 때에, 혼자서 냉전체제 수호의 폐쇄적 소명감에 불타 원맨쇼를 하고 있는 것은 기실 김대중 주필 자신이 아닌가?

넷째, 그렇다면 김대중 대통령의 대북 정책은 내부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가? 아니다. 왜 그런가? 바로 조선일보와 김대중 주필 같은 언론이 김대중 정부의 평화통일 정책을 끊임없이 왜곡하고 흠집을 내며 분단극복의 민족적 열정을 냉동시켜 왔기 때문이다.

이들이 바로 우리 내부의 합의를 훼손하고 동족을 적으로 몰아 민족 내부의 적대감을 부추기고 온당한 정책의 추진을 가로막는 어둠의 세력이다. "저기 적이 있다"고 외치는 바로 그 자가 적인 것이다.

조선일보가 오늘날 안티 조선 운동의 목표물이 되고 있는 까닭은 어디에 있는가? 그 답은 분명하다. 민족 내부의 적대적 분열을 조장하고, 민족적 화해와 협력의 길을 사사건건 훼방을 놓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민족이 서로 과거를 용서하고, 하나의 마음이 되어 통일의 물꼬를 트자는 이 절박한 민족사적 요구를 외면하고 걸핏하면 힘으로 눌러야 한다느니, 자꾸 주기만 하면 오만해진다드니, 자칫 우리가 거덜나게 생겼다느니, 온갖 못된 소리만 늘어놓고 험담을 하니 마음 약하고 실정 모르는 사람들은 중심 잡기 어렵게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바로 자신들이 평화통일정책에 대한 합의조성을 기를 쓰고 가로막고 있으면서, 김대중 정부의 합의조성 능력을 탓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적반하장(賊反荷杖)이다.

그렇다면, 김대중 주필이 원하는 합의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조선일보의 극우적 군사주의 논리에 따르면 합의가 이루어졌다고 할 판인가? 좋은 일에 어깃장을 놓겠다고 작심하고 있는 자가 상대가 자신의 어깃장에 굴복하지 않는다고 해서, 합의 빈곤 운운하는 것은 정말이지 가소롭기 짝이 없다.

다섯째, 나라의 장래가 걸린 문제는 머리로 하는 것이지 가슴으로 하는 것은 아닌가? 바로 이 논리가 평화와 통일에 대한 민족적 열정을 차갑게 만든 것이라는 점에서, 가장 분노스러운 주장이 아닐 수 없다.

지난해 6.15 남북 정상회담 이후 새롭게 뜨거워진 민족적 열정에 대하여 당황한 냉전 수구 세력들은 바로 이 말을 하면서, <차가운 머리론>을 내세웠다. 과연 이 말이 옳은가? 천만의 말씀이다. 무슨 일이든, 신이 나고 열이 나야 끝까지 추진력을 발휘할 수 있는 법이다.

열정이 식으면, 일은 지지부진해지게 마련이다. 가슴이 없는 인간은 인간의 아픔을 알지 못한다. 그리고 그 아픔을 껴안고 새로운 시대를 마련하려는 정열이 존재하지 않는다. 머리는 이 가슴이 느끼는 고난과 열망을 풀어 나가는 일에 쓰일 때 비로소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는 것이다.

나라의 장래 또한 그렇다. 결국 사람이 제대로 살고자 하는 것인데, 그 나라의 백성들이 겪고 있는 고통을 깊이 절감하고 그 고통을 넘어서는 꿈을 향한 불타는 가슴이 없는 자가 이끄는 나라는 편협한 이기주의적 계산에 찌든 자들만 살 판이 나는 세상이다.

백성들이 치르고 있는 고통에 대하여 아파하면서, 새로운 미래에 대한 꿈으로 뜨거워진 가슴에 인도되지 않는 머리는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의 가슴에 결국 상처를 내고 만다.

김대중 주필이 이제껏 해온 글쓰기가 바로 이 분단의 역사에서 고난받은 이들의 가슴에 피멍이 들게 한 것이었다는 사실, 이것이 그가 더 이상 글쓰기를 중단하고 물러나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이다. 해서, <절필(絶筆)>이야말로 지금 그에게 가장 가치 있는 선택인 것이다. 그의 글은 어느새, <역사의 흉기>로 변해 버렸기 때문이다.

가슴이 없는 자의 머리는 머리로서의 가치도 없거니와, 그 머리가 움직이는 곳마다 인간의 마음에 상처를 낸다는 사실을 그가 깊이 깨우치기 바란다. 그때 그것은 머리가 아니라, 폭력이 되는 것이다. 조선일보를 이끌고 있는 세력들을 가르켜 <조(직)폭(력배)>이라고 하는 말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마지막으로, 우리의 운명은 모두 미국에게 결정적으로 달려 있는가?

아니다. 우리가 마음먹기에 따라 미국의 대한반도 정책은 도리어 결정적으로 영향을 받게 되어 있다. 우리 모두가 미국의 내정간섭을 전민족적으로 강력하게 반대하고 나설 때, 미국의 정책은 힘을 잃어가게 된다. 우리 모두가 민족 문제는 남과 북이 알아서 한다고 명확하게 선을 그을 때, 미국은 자신의 대북 정책을 수정할 수밖에 없다.

우리 모두가 이제는 통일을 위한 경제건설을 해야 할 때이라 더 이상 군사무기를 수입할 수 없다고 결단을 내릴 때, 미국의 군수산업은 휘청거릴 수밖에 없으며 동북아시아의 평화 시스템은 이루어져 갈 수 있다. 우리 모두가 미국의 미사일 계획에 끌려들어 갈 의향이 없다고 선언할 때, 미국의 NMD 정책은 동북아시아에서 중대한 변화를 겪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바로 이 변화의 힘을 김대중 주필은 미국을 대신하여 앞장서서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운명이 미국의 손에 달려 있으니 어쩌겠는가, 하고 외세의 앞잡이 같은 비굴한 소리나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식민지 사관의 재판이요 연속이다. 약소국의 처지에서, 미국의 비위를 거슬렸다가는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니, 알아서 기자는 것이다. 이런 언론인을 주필로 두고 있는 조선일보란 결국 반민족적 사대주의의 온상일 수밖에 없다.

조선일보의 존재가 그토록 문제가 되고, 김대중 주필의 글이 이렇게 공격의 대상이 되는 이유는 간단하다. 민족의 절실한 이익과는 배치되는 쪽으로 나라의 장래를 이끌고 가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글은 우리가 미국의 속국이나 또는 51번째 주가 되고자 간절히 바라는 자나 쓸 수 있는 글이라는 점에서, 역사의 엄중한 심판 대상이 되어야 할 것이다. 부디, 김대중 주필은 더 이상 개인사에 오점을 남기지 않으려거든 붓을 꺾고 산 좋고 물 좋은 곳을 찾아 낙향하여 먼저 인간공부와 수신(修身)에 이를 일이다. 그러면 적어도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는 주지 않을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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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웅 기자는 경희대 교수를 역임, 현재 조선학, 생태문명, 정치윤리, 세계문명사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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