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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정권에서 한국정신문화원장<1998.12.26-2000.12.22>을 지낸 서울대 사회학과 한상진 교수가 오마이뉴스의 10297번째 뉴스게릴라로 가입, 조선일보 김대중 칼럼을 정면 비판한 글을 '데뷔작'으로 선보였다....편집자주)


김대중 대통령의 방미 이후 그의 실패를 비판한 칼럼의 결정판은 3월 17일자 조선일보에 실린 김대중 주필의 칼럼, "대북 원맨쇼에 걸린 제동"이 아닌가 한다. 이 글을 읽고 나는 솔직히 충격을 받았다. 언론권력의 무모함과 오만함을 넘어 조선일보가 미국을 국내정치에 끌어들여 용미당쟁(用美黨爭)을 선도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조선일보 주필이 이런 혼탁한 글을 발표하는 것은 이 시대의 비극이자 우리 모두의 부끄러움이 아닐 수 없다. 우리의 청론(淸論)문화 전통에서 멀리 벗어나 버린 이 글의 해악이 실로 걱정스럽다. 이에 지식인의 한 사람으로써 참을 수 없어 이 글을 쓰는 바이다.

나는 외교 전문가가 아니지만 김대중 대통령의 미국 방문이 과연 실패로 끝난 것인지는 좀더 시간을 두고 지켜볼 문제가 아닌가 한다. 역사는 작용과 반작용을 따라 움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느 경우이건 부시 행정부는 그들이 선택한 미국의 국가이익을 중심으로 행동할 것이다. 이것은 자연스러운 일로써, 그렇다면 우리가 지켜가야 할 국가이익 또는 민족이익은 무엇인가의 질문이 제기된다.

그런데 정작 이런 질문은 던지지 아니하고 어떤 세력이 미국을 끌어들여 이른바 '남남 갈등'의 새로운 도화선 또는 기폭제로 활용하려 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이런 근시안적 게임은 자칫하면 한미(韓美)간의 국민적인 불신과 오해를 자초할 위험 마저 적지 않다.

그런데도 조선일보는 어떤 영문인지 김대중 주필의 칼럼을 통하여 이런 위험한 게임을 시도하고 있다. "미국의 새 지도부는 한국의 남남(南南)갈등 사이를 비집고 들어 김대통령의 대북 러시에 브레이크를" 걸었다는 것이다.

미국 측 반응의 "가장 심각하고 근본적인 원인"은 미국이 아니라 바로 우리 국내 사정에 있다는 것이다. "부시는 한국 헌법상 단임인 김 대통령이 1년 남짓 임기를 남기고 있다는 것을 의식했을 것"이고 "한국 내의 이런 갈등과 우려와 불안"을 십분 고려하여 "대북정책을 한국의 다음 정권과 조율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으로 보았다는 해석이다.

그런 이유로 부시는 김대통령의 대북 정책을 '봉쇄'했고 '냉동'시켰다는 주장이다. 과연 부시 대통령은 이번 회담에서 김대중 대통령을 제치고 그의 대북 정책을 비판해온 보수 여론과 야당의 손을 들어준 것일까? 조선일보는 이런 억측을 기정사실화하고 예민한 쟁점에 불을 붙이고 있다.

나는 여기서 사대주의 논쟁을 재연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대신 이런 주장의 사실적인 근거, 즉 타당성을 묻고 싶다. 생각해 보면 위엄을 갖춘 조선일보 간판 칼럼에 주필이라는 사람이 허무맹랑한 억측을 쓰지는 않았을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자칫하면 부시 대통령까지도 심각한 난관에 몰아 넣을 수 있는 이런 주장의 근거가 어디 있는지, 나의 상식과 경험으로는 유추하기 힘들다. 과연 김주필은 자신의 글에 담긴 독소와 해독을 충분히 이해하고 글을 썼는가?

그러나 그의 주장이 만에 하나 사실이라면, 다시 말해 부시 대통령이 2년여 임기를 남겨놓은 김대중 대통령을 제치고 차기정권을 겨냥하여 현재의 대북 포용정책을 봉쇄하려 했다면, 한미 관계는 파란과 시련을 면치 못할 것이다.

불행한 기억이지만 과거 한 때는 우리 젊은 세대 사이에 반미(反美) 감정이 거셌던 적이 있었다. 인권과 민주주의를 억압한 군사독재 체제를 미국 정부가 지지했기 때문이다. 그 뒤 미국은 유연한 입장에서 민주화 운동에 관심을 보였으며 이에 따라 미국의 이미지가 개선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날 다시 미묘한 시기로 접어들고 있다. 민주화의 연장선상에서 우리 국민은 이제 외세에 의한 민족분단과 냉전체제 대신 한반도에 화해와 협력 그리고 평화의 기틀을 세우는 작업에 눈을 뜨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만일 미국 정부가 우리의 국내 정치에 개입하여 대북 강경 노선을 주문하는 보수 세력과 손을 잡는 모습을 보인다면 결과는 곧 과거 악몽의 재현이 되지 않을까 두렵다.

문제는 이처럼 한미(韓美)간의 불신과 오해를 부추길 수 있는 주장이 조선일보 같은 거대 신문에서 주필의 이름으로 나오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언론권력의 숨은 의도와 계산이 있다. 이들은 김대중 대통령의 상표라 할 수 있는 대북 포용정책을 흔들어 놓고야 말겠다는 욕망에 사로잡혀 있는 것처럼 보인다. 미국을 끌어들여서라도 국내 대북 담론의 패권을 잡아보겠다는 것이다. 과거의 정권은 언론이 흔들자 정책의 기조를 바꾸었다. 이들은 이것을 잘 기억하고 있을 것이며 어쩌면 유사한 목표로 언론권력을 행사하고 싶어하는지도 모른다.

만일 미국이 국내 정치에 개입하여 대북 강경 세력과 손을 잡았다는 주장이 우리 사회 일각에 영향을 미쳐 미국에 대한 불신과 의혹을 키우고, 민족주의 토양 위에서 이것이 반미(反美) 운동으로 이어진다면, 그리고 여기에 북한이 편승한다면 상황은 어떻게 될까? 실로 복잡하게 꼬일 것이다.

조선일보는 결과적으로 이런 함정과 덫을 파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실제로 이런 일이 생긴다면 조선일보는 과연 조금이라도 책임을 느낄 것인가? 나는 회의적이다. 이런 의식이 있다면 이런 음험한 글은 쓰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나는 조선일보의 계산된 주장에 관하여 뜻 있는 시민들에게 다음과 같은 점을 고려할 것을 제안하고 싶다.

첫째는 미국 정부가 국내 갈등을 비집고 들어와 차기 정권을 겨냥하여 현정부의 대북정책을 봉쇄했다는 주장의 근거를 조선일보가 밝히도록 요구하는 것이다. 이 주장은 예민하고 폭발적인 것이기 때문에 전화나 항의서한으로 그 근거를 묻는 것은 민주 시민의 당연한 권리다.

둘째로 주한 미대사관이나 미국무성 또는 백악관에 편지를 써서 부시 대통령이 과연 이런 의도로 김대중 대통령과의 회담에서 그의 대북정책에 쐐기를 박은 것인지를 물을 필요가 있다. 한미(韓美) 양국민간의 우호와 협력을 위해, 또한 불필요한 오해와 갈등을 미리 막기 위해서라도 미국 정부는 막강한 영향력을 자랑하는 조선일보 주필의 주장에 대하여 명확한 입장을 밝히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셋째로 이 글을 가운데 놓고 언론 권력의 메커니즘과 언론 개혁에 관하여 집중적인 토론을 벌였으면 한다. 짧은 글이지만 그 안에는 사대주의 전통과 함께 정보의 왜곡, 언론인의 권력욕망, 시민사회의 파수꾼 역할보다 권력투쟁의 수단으로 변모한 언론매체의 특징이 잘 드러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놓쳐서는 안될 점은 현실의 복잡성을 단순하고 감정적인 하나의 잣대, 즉 DJ 지지냐 반대냐로 응축시키는 이미지 보급에 조선일보가 적극 나서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 언론권력의 은밀한 계산이 있다고 생각한다.

언제부턴가 DJ라는 상징은 화합이 불가능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지지자는 매사를 환영하고 반대자는 매사를 거부하는 것으로 비쳐졌다. 이런 현상이 우리 사회에 있는 것은 사실이나 DJ가 잘하면 잘할수록 반대자의 감정은 더욱 상한다는 지적이고 보면 여기에는 우려할 만한 맹목성이 있는 것도 같다.

문제의 칼럼도 정확히 이 기조 위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오늘날 국민이 불안하고 걱정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대북문제에 관한 DJ의 '원맨쇼'"에 있다는 진단이다. DJ라는 상징에 원맨쇼라는 딱지를 덧붙여 활용하고 있다.

나는 김대중 대통령의 대북 정책에도 여러 가지 문제가 있다는 주장에 동의한다. 모든 정책은 비판을 통해 수정보완의 길을 밟기 마련이다. 다만 내가 여기서 문제삼고자 하는 것은 미국을 끌어드려 DJ 지지냐 반대냐의 이분법으로 남북문제에 접근하는 것은 전혀 생산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DJ를 지지하건 반대하건, 여당이건 야당이건, 좌파건 우파건 서로 주장할 것이 있고 경쟁할 것이 있지만, 고질적인 당쟁의 관점에서 민족문제에 접근하는 것은 죄악이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당파가 아니라 국민의 생존과 평화를 기본으로 삼는 마음이며 민족의 화해와 협력은 결코 당쟁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조선일보가 민족의 양심을 대변해 온 정론지라고 한다면 그 주필은 마땅히 한미 정상회담에서 드러난 미국 측의 견해를 경청하면서 또한 우리 민족이 추구해야 할 국가이익이 무엇인가를 진지하게 물었어야 했고 그랬으면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는 미국을 국내정치에 끌어드려 용미당쟁(用美黨爭)을 선도하는 모습을 보였을 뿐 민족적 고뇌의 흔적이라고는 아무 것도 보여주지 않았다. 그러면서 우리 민족의 장래는 어차피 미국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숙명론으로 칼럼을 마치는 것을 보고 억장이 무너지는 비애를 아니 느낄 수 없다.

덧붙이는 글 | (조선일보 3월 17일자 '김대중칼럼' 전문)

대북 원맨쇼에 걸린 제동 

김대중 대통령이 부시 미 행정부와 대북한정책 조율에 실패한 데 대해 여러 원인과 상황이 지적될 수 있다. 미국지도부의 대북 회의론이나 한국 고위층들의 설명부족, 또는 여건의 미성숙 등이 한·미간의 견해대립으로 비쳐질 수도 있었을 것이고 미국 신행정부의 보수적 시각이 본질적 장애요인이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보기에 그 실패의 가장 심각하고 근본적인 원인은 김 대통령의 대북접근방식이 한국 국민의 전폭적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기본적으로 보수성향이 강한 미국의 새 지도부는 한국의 남남갈등 사이를 비집고 들어 김 대통령의 대북 러시에 브레이크를 걸 수 있었던 것이다. 만일 김 대통령의 대북정책이 그 실제와 속도에서 대다수 한국사람들의 동의를 등에 업고 있었다면 미국은 전통적인 한·미 관계를 고려해서라도, 또 한국 국민의 기대와 보람을 존중한다는 측면에서도 김 대통령의 ‘보따리’를 그렇게 봉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실 남북의 화해와 대화를 열망하고 한반도의 안정과 평화를 바라는 대다수 한국 사람들은 그 방향의 선두에 선 김 대통령의 노력을 수긍하면서도 점차 독선적으로 변해가는 그의 대북스타일에 실망하곤 했다. 김 대통령은 애당초 남북통일에 하나의 초석을 놓는다는 심경으로 북의 문을 두드렸겠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의 자세는 대북일변도로 변해 이제는 남북문제의 챔피언이 되겠다는 폐쇄적 소명감에 사로잡혀 있는 것으로 보인다. 

국정원을 ‘대북창구’로 삼고 북한을 자극할 수 있는 모든 요인과 요소를 차단하며 그의 대북정책에 대한 어떤 대내적 비판도 허용되지 않는 분위기에서 그는 지금 경제도, 한·미관계도, 국내정치도 대북의 관점에서 운용하고 있는 느낌이다. 대다수 경제인들이 ‘현대’를 걱정하고 그것이 우리 경제에 미칠 파장에 전전긍긍하고 있는 마당에 이 정권은 그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현대살리기에 여념이 없다. 

우리 국민은 김 대통령이 대북정책을 수립하고 그 전략을 논의하는 데 어떤 보좌를 받으며 어떤 참모기능에 의존하는지를 전혀 알지 못한다. 국회의 여과장치도 없다. 대북문제에 관한 한 모두가 ‘졸병’이고 ‘장수’는 김 대통령 한 사람인 형국이다. 많은 국민이 김 대통령의 ‘대북’ 당위성을 긍정하면서도 무엇인가 미심쩍해 하고 불안해 하고 걱정하는 것은 바로 대북문제에 관한 DJ의 ‘원맨쇼’ 때문인 것이다. 

전임 정권과 다른 접근방식을 모색하는 부시 행정부가 한국 내의 이런 갈등과 우려와 불안을 놓칠 리가 없다. 게다가 8년 집권을 목표로 하고 있는 부시는 한국 헌법상 단임인 김대통령이 1년 남짓 임기를 남기고 있다는 것을 의식했을 것이다. 시간의 이점을 가진 부시로서는 어쩌면 대북정책을 한국의 다음 정권과 조율하는 것이 보다 적합하다고 보았음직 하다. 그런 전략에서라면 한국 내의 갈등과 견해차를 파고 들어 김 대통령의 대북정책 진행을 냉동하는 방향으로 나갈 수 있는 것이다. 

김 대통령은 여기서 자신이 연 남북화해시대의 문이 닫히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또 한국의 안전과 평화를 책임진 대통령의 책무를 다하기 위해서 남은 임기 동안 해야할 일이 무엇이며 대북정책 스타일을 어떻게 조정할 것인지, 그리고 어떻게 하는 것이 내부의 갈등을 줄이는 것인지를 재검토해야한다. 어떤 사람들은 남북의 자주적 해결, 자존심, 미국의 오만들을 거론하며 불쾌감을 표시하는데 김 대통령으로서 그런 것들을 괘념했더라면 애당초 미국에 갈 이유도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우리가 배알 없어서 이러는 것도 아니다. 지금 우리는 경제도, 남북도, 안전도, 평화도 특히 미국에 결정적으로 달려있다. 나라의 장래가 걸린 문제는 ‘머리’로 하는 것이지 ‘가슴’으로 하는 것은 아니라는 평범한 수사조차 번거로운 것이 미국에 관한한 우리의 숙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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