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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수들의 한결같은 포즈
ⓒ 배을선

2001년 1월 1일, 1·2 호선 시청역과 2호선 을지로입구역을 잇는 지하보도에는 꽤 많은 일본인 관광객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 중, 젊은 일본 관광객 몇 명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사진을 찍었다. 그들은 지하보도의 벽면 광고사진의 남자들과 똑같은 포즈로 두 손을 천장 쪽으로 살짝 들었다. 한 광고 앞에서 돌아가며 사진을 찍던 중, 한 일본인이 다른 광고의 남자가 더 마음에 든다며 위치를 바꿨다. 찰칵! 사진을 다 찍은 일본인 관광객들은 알아들을 수 없는 그들만의 언어로 무어라 중얼대며 웃음을 짓고 사라졌다.

한국에서의 긴긴 노동을 끝내고 고국인 인도로 돌아가는 인디아 청년 4명은 1월 3일 서울 나들이를 위해 모인 약속장소에서 그만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들은 몇 개의 광고를 둘러보더니, 한 광고 앞에서 돌아가며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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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지로 지하보도에서 한 군수의 포즈를 흉내내며 사진을 찍고 있는 인도 청년들
ⓒ 배을선

그들에게 다가가 왜 이 광고 앞에서 사진을 찍느냐고 물었다. 그들은 서투른 한국말로 이야기했다.
"한국의 정치하는 사람들, 선거에 나온 사진인 것 같아서 기념으로 찍었어요."
기자는 다시 한번 물었다.
"그런데 왜 웃었어요?"
"너무 똑같은 포즈로 찍은 모습이 웃겨서요..."

영하의 서울. 시청에서 을지로, 혹은 을지로에서 시청으로 움직이는 행인들에게 을지로 지하보도는 세찬 겨울 바람을 피할 수 있는 따뜻하고 넉넉한 공간이다. 이 곳은 또한, 주변에 서울시청과 덕수궁, 호텔, 백화점 등이 있고 일반시민들과 외국인들의 통행이 빈번하다.

그래서인지 지하보도 안에는 다양한 상점들이 들어서 있으며, 벽에는 여러 종류의 광고가 붙어 있어 지하보도를 지나가는 행인들의 시선을 끈다. 그런데 그 광고들이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어딘가 모르게 '특별하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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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을선

지하철 1·2호선이 만나는 시청역과 2호선인 을지로입구역을 가로지르는 이 지하보도는 일명 '특화구역'으로, 수십 개의 '특정한' 광고만이 걸려 있다.

서울시 시설관리공단으로부터 이 구역 지하보도의 광고사업권을 따내고, 광고 제작과 관리까지 맡고 있는 광고대행업체 (주)비주얼라인의 담당자는 "이 구역은 서울시청과 관공서, 정부청사 등이 가깝게 모여 있는 지리적인 여건과 공무원들이 자주 드나드는 길목으로서, 지역자치단체를 선전하는 광고들로 특성화 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는 서울의 중심지인 을지로 지하보도를 한국의 여러 지역들을 소개하고 선전하는 '광고 특화구역'으로 만듦으로 해서 광고효과를 극대화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어떤 지역에서 어떤 행사가 진행되고 있는지, 어떤 지역이 어떤 특산품으로 유명한지, 어떤 지역의 관광상품이 무엇인지를 한눈에 꿰어볼 수 있는 '특화구역'을 만들려고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과연 그렇게 되었는가?

일본관광객들과 인디아청년들의 관심을 끈 것은 그 지역의 특정한 그 '무엇'이 아니라, 그저 똑같은 포즈와 어색한 웃음으로 광고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지역 군수와 시장의 모습이었다. 관광객들에게 지하보도의 광고는 친절한 관광안내꾼이 되지 못하고 있었다.

지역군수들이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이 똑같은 몸짓에 똑같은 표정을 지으며 등장하는 이들 수십 개의 지자체 광고는 이곳을 지나는 외국인들에게 웃음거리를 제공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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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을선

지하보도의 광고가 외국인들을 배제하고 내국인들만을 위한 것이라고 해도 시민들의 반응은 차갑다. 중랑구에 산다고만 밝힌 한 시민은, 지하보도의 광고가 단지 군수들과 지역 자치장들의 얼굴과 이름을 알리기 위해 걸려 있는 것 같다며, 지역특산물이 그들의 허울 좋은 정치광고에 이용 당하고 있다고 말했다.

몇몇 광고들을 자세히 보면, 지역의 특산물 및 관광지나 상품의 안내는 눈에 들어오지 않는 뒤쪽에 깔려 있고, 군수들과 자치단체장들의 사진은 중앙에 위치한다. 그리고 그들 옆에는 선명한 글씨로 '00시 시장 000', 혹은 '00군수 000'라고 적혀 있을 뿐 아니라, 그들의 싸인까지 인쇄된 광고도 있다.

(주)비주얼라인의 담당자는 이들 광고를 제작할 당시, 한 두 명의 자치단체장들이 광고에 등장하자, 다른 자치단체장들도 서로 자기 얼굴과 이름을 넣는 광고를 만들어 달라면서, 이런 식의 광고가 대유행이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요즘에는 너무 정치적인 것 아니냐는 주변 사람들의 반응에 군수들의 얼굴과 이름을 뺀 광고를 제작 중이라고 한다.

그럼, 광고의 시안은 누가 결정하는 것일까? 광고에 대한 전반적인 사항은 자치단체와 시의회에서 자체적으로 기획, 시안을 빼거나 넣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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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을선

지하보도의 '광고특화구역'. 각 지역의 축제행사, 계절별, 이슈별 소식을 일반 시민들이 쉽게 접할 수 있어 꼭 필요한 것임에는 분명하지만, '지역홍보'라는 순수한 이미지를 느낄 수 없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지자체 군수들의 얼굴대신 영어나, 일본어로 그 지역을 소개하는 조그만 문구를 곁들인다면 우리나라를 여행하는 관광객들에게도 팔도의 여러 지역을 홍보할 수 있는 훌륭한 광고가 되지 않을까? 군수들 스스로 웃음거리가 되어 관광객들이 찍는 기념사진의 삐에로로 등장하는 것보다는 훨씬 효과적일 것 같다.

232개의 지방자치단체가 그 지역의 홍보와 발전을 위해, 그리고 지역주민들 삶의 향상을 위해 순수한 목적의 광고를 만드는 것이 '2001년, 한국방문의 해'에 지하보도 '광고특화구역'의 대유행이 되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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