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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아들, 아버지의 친구, 아들의 친구. 이들이 모여 만든 것은 친목회가 아니다. 5천여 명의 학생들이 다니는 덕성여자대학교의 이사진 구성원이 바로 그들이다.

이사진은 지난 98년부터 99년까지 과를 계속 신설하면서 교수는 단 한 명도 충원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이사진은 또 등록금을 지속적으로 올렸다. 하지만 의상학과 학생들은 재봉틀이 부족해 수업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다고 하소연한다. 소위 '족벌체제'로 구성된 이들 이사진은 덕성여자대학교를 어디로 끌고 가고 있는 것일까.

'현 이사진 퇴진! 교육의 질 보장!'
대학 교정은 이사진을 규탄하는 현란한 스프레이 글씨와 대자보로 어지럽다. 지난 11월 1일부터 8일까지 덕성여자대학교 총학생회가 총장실 점거 농성을 벌인 흔적이다. 학생들과 이사진의 싸움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학생들이 수업과 복지, 등록금 인상과 관련해 수없이 학교에 문제를 제기했으나, 해결되지 않았다. 이는 학교의 제반사항을 결정하는 이사회가 제대로 열리지 않기 때문이다. 유명무실한 이사진은 즉각 퇴진해야 한다." 덕성여대 이정민 부총학생회장(통계학과 96)의 주장이다.

현 덕성여대 이사진은 모두 5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박원택 이사, 박 토마스 상진 상임 이사, 인요한 이사, 김기주 이사장 직무대리, 박인제 이사. 이들 중 박원택 이사는 박원국 전 이사장의 동생이며 지난 5월부터 하와이에서 병으로 누워 있다. 박 이사는 그 전부터 이틀에 한번씩 투석을 받는 등 건강상태가 극도로 좋지 않았다. 박 토마스 상진 상임이사는 박원택 이사의 아들이다. 인요한(린튼 존) 이사는 박상진 이사의 친구이며 미국인이다. 김기주 이사장 직무대리는 박원택 상임이사의 친구.

인요한 이사와 김기주 직무대리는 전직 교수지만 박원택 이사와 박상진 상임이사의 경력은 대학의 이사진을 맡기에는 적절하지 않다. 박원택 교수는 예전에 재단 소속 덕성여자중고등학교의 교장을 맡기는 했으나 실제 교사나 교수 경력은 없다. 박상진 상임이사의 전직은 회사원이다. 박인제 이사는 전직 변호사로 이사진이 된 지 이제 한 달 남짓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이사회가 제대로 열리지 못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이정민 부학생회장의 설명이다.

교육부는 지난 97년 덕성여대가 사학의 민주화를 주장하던 한상권 교수(사학과)를 재임용에서 탈락시킨 것을 계기로 학생, 교수들의 반발이 거세지자 당시 이사장 박원국 씨를 해임시키고 이문영 씨를 이사장으로 선임했다. 또 함세웅 신부와 방정배 교수를 공익 이사로 파견해 덕성 여대 사태는 어느 정도 진정되는 듯 보였다. 그러나 이들은 기존 재단 측 이사들과 교수들과의 마찰을 견디지 못하고 지난 5월 모두 사퇴하고 말았다. 이사회는 다시 3년 전처럼 박 씨 일가 체제로 개편됐다.

박원국 씨의 요구로 98년 3월 부임한 이강혁 총장 역시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 총장은 취임 후 2년동안 한 차례도 신임 교수를 충원하지 않았으며 교수회의도 열지 않았다. 또 박 전 이사장과 친분이 있는 교수들을 부총장과 다른 학교에는 있지도 않은 종합개혁발전처장으로 새로 임명하고 이들을 위해 직원과 기사를 따로 고용했으며 총장 판공비를 초과 지출하는 등 총1억여 원의 예산을 낭비했다. 그 결과 이 총장은 세 차례에 걸쳐 학생·교수들로부터 불신임 서명운동의 대상이 됐으며 두 차례에 걸쳐 국정감사장에 증인으로 불려나가기도 했다.

총학생회의 가장 시급한 요구는 '전공 교수 충원'이다. 덕성여대의 '교수 1인당 학생 수'가 덕성여대와 비슷한 규모인 동덕여대의 학생 수보다 현저히 높다는 것이 홍서정 인문대 학생회장(국문학과 97)의 설명이다. 실제로 동덕여대 국문과에는 교수가 4명 있는데 덕성여대 국문과에는 현재 교수가 2명밖에 없다. 지난 학기 사회학과는 교수가 한 명도 없었다. 학생들의 거센 요구로 올해 16명의 전공교수가 충원됐으나 턱없이 부족하다고 홍서정 인문대 학생회장은 주장한다.

덕성여대 한 학생은 "정원이 100명이 넘는 과나 학부도 교수가 부족해 분반을 하지 못하고 있다"며, "집중을 요하는 전공강의를 100여명이 한자리에서 듣는 것은 고역스러운 일"이라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그리고 교수가 145명이 있다고 하지만 이들 중 27명은 전공 과목 교수가 아니다. 이들은 독서 토론 등의 교양 수업만을 맡고 있다. 따라서 '전공교수 1인당 학생수'로 따지자면 교무처가 제시한 것보다 훨씬 더 높아진다.

그러나 학교측은 학생 대 교수의 비율이 35 : 1 수준으로 인근 대학과 별 차이가 없으며 교수 충원도 차근차근 이행할 것이라고 반박했다. 덕성여대 이광수 교무처장은 "재정이 부족하기 때문에 학생들의 요구처럼 교수를 갑자기 충원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고 답했다.

전공 과목 교수가 아닌 '교양 수업 교수'들은 원래 교수 연수자로 소위 '동문 교수'로 불리고 있다. 국내 대학에 교수로 임용되지 않은 덕성 여대 출신자들을 3년 동안 모교에서 근무하도록 한 것이다.

학교측의 '동문교수'에 대한 혜택은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지난 6월 24일 긴급 이사회가 하와이에서 열렸다. 박원택 이사장이 하와이에서 요양한다는 게 그 이유였다. 덕성여대 교수와 학생들은 이사회가 열린 것조차 몰랐다.

이날 이사진 4명은 '동문 교수'들을 모두 전임 교수화 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동문 교수'에 대한 검증이 따로 이루어진 것도 아니었다. 이에 기존 전임교수들은 '불공정 임용'이라며 반발했다.

전임 교수들이 반발하는 것은 이같은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전임교수로 구성된 덕성여대 교수 협의회는(회장 독문과 신상전 교수, 이하 교협) 현재 행정관 뒤에서 천막 농성을 벌이고 있다. 그 이유는 덕성여대가 지난 9월 중순 경 교협 소속 교수 6명(독문과 선상전, 사학과 한상권, 영문과 김문규, 교직 성낙돈, 심리학과 오영희, 아동가족학과 이 옥)을 명예훼손으로 고소, 고발했기 때문이다. 이사진은 이들 교수 6명이 "덕성 여대 재단은 친일파이고 학교 주인은 박씨가 아니다"라는 말로 재단의 명예를 크게 실추시켰다고 주장했다.

이들 교수 6명은 이문영 회장의 사퇴와 재단의 파행적 인사 행정에 반발, 재단 측에 강력히 항의해 왔다고 교협 소속 권순원 교수(사회대학 경제학과)는 밝혔다. 권교수는 또 "교수들이 기소돼면 학교는 교수들을 해임해도 전혀 법적 하자가 없다"며 "이는 명백한 교수탄압"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결국 교수가 기소만 돼도 직위해제할 수 있다는 사립학교법의 독소조항을 악용해 비판 세력을 제거하려는 음모라는 것이다.

또 덕성 여대가 교수들을 고발하며 제출한 자료에는 덕성여대가 그동안 교수들을 감시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불러 일으킬 만한 내용이 포함돼 있다.

지난 10월 10일 덕성여대 설립자인 차미리사 여사를 기리는 행사에 '참여한' 교수들에게 학교측은 경고장을 보낸 적이 있었는데 행사에 참여한 교수들의 발언 내용을 일일이 어떻게 파악했느냐는 의문이 제기된 것. 권 교수는 또 97년 덕성여대 부임 당시 박원국 전 이사장에게 "식사는 혼자 하시오. 하루 일과 보고서를 작성하시오" 등의 지시를 받았다고 밝혔다.

지난 11월 3일 덕성여대는 '분규대학'으로 지목되어 국정감사를 받았다. 감사에서 국회의원들은 박원택 이사장의 사퇴를 권고하고, 이강혁 총장의 재신임 불가를 강력히 촉구했다. 또 동문 교수 물의에 대한 책임을 물었으며, 교육부에 관선 이사진을 꾸릴 것을 촉구했다. 그러나 덕성여대는 현 이사진에 대해 아직 별다른 조치를 취하고 않고 있으며, 교협 소속 교수 6명에 대한 고소도 취하하지 않았다.

교수들의 천막농성은 지금도 진행되고 있다. 총학생회는 국정 감사로 학교 재단문제가 공론화되었다고 보고 일단 점거 농성을 마쳤지만, 지난 11일 김기주 이사장 직무대리를 항의 방문하는 등 이사진 완전 퇴진을 위한 투쟁을 계속하고 있다.

덕성여대 학생들도 교수들도 더 이상 자신들의 대학이 여론의 도마 위에 오르는 것을 원치 않는다. 학생들과 교수들은 자신의 손으로 덕성여대 사태를 해결하고자 한다. 10년 동안 따라다닌 '분규대학'이라는 오명을 이제는 벗어버려야 한다는 덕성인들의 의지가 새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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