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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0일 고려대학교 국제관 321 강의실. 한 학생이 김 전 대통령에게 "도대체 자신의 존재론적 의의는 무엇인가"라는 가시돋힌 질문을 던지자 김 전 대통령은 여유있게 이렇게 답했다.

"나는 식물인간이 아니다. 나마저 침묵하면 국민과 역사에 대한 큰 죄악을 진다고 생각한다. 나는 살아있는 인간이고 살아있는 동안 말할 수 있다. 이것은 옳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지난 10월 13일에 이어 'YS-고대생'의 날카로운 논리 대결로 관심을 모았던 20일 YS고대 강연은 'YS의 판정승'으로 끝났다. 대학생들은 나름대로 비판적인 질문을 던졌으나 김 전 대통령은 이를 노련한 화술과 특유의 재치로 잘 받아넘기면서, 한편으로는 '교묘하게' 현정부 특히 김대중 대통령을 공격했다.

1시간 30분 동안 진행된 강의에서 김 전 대통령은 56명의 학생들에게 △청와대 안가철거 △정치자금을 일체 받지 않기로 한 것 △군 하나회 청산 △금융실명제 실시 △94년 정상회담의 성사 △대북 식량지원 비화 △역사바로세우기 △김현철 구속 △금융위기 △대통령선거 공정관리 △DJ 부정축재 비자금 수사 중단 △정치자금법 개정 △지방자치실시 △한자부활 △황장엽 망명 등 15가지가 자신의 치적이라고 말했다.

관심을 모았던 질의-응답시간. 김 전 대통령은 강의 때와는 달리 본격적으로 김대중 대통령에 대해 포문을 열기 시작했다. 김 전 대통령은 학생들의 질문에 대한 답변을 하면서 "김대중은 입만 열면 거짓말", "현정부의 인사정책은 전라도 싹쓸이", "김대중 때문에 IMF가 왔다", "김대중의 레임덕은 이미 왔다", "삼성차를 대우에 준 것은 김대중의 잘못", "가장 준비 안된 대통령은 김대중" 등 현 정부와 김대중 대통령에 대한 비난을 곁들였다.

학생들은 '이러이러한 부분은 잘못한 것 아닌가'라고 질문했지만 김 전 대통령은 '그것은 잘한 것이고 잘못하는 것은 김대중이다'라고 답했다. 학생들은 '93년부터 97년까지 재임기간'이라는 강의취지에 묶여 있었고 김 전 대통령은 능숙하게 그 경계선을 넘나들었다. 그러나 예고됐던 '교수-학생 집단 퇴장'은 일어나지 않았다.

ⓒ 오마이뉴스 이병한
이날 강의에 참석했던 한 학생은 "강의를 주최한 교수님은 재임기간의 업적에 대한 평가와 비판을 하라고 말했는데 김 전 대통령은 정작에 자신에 대한 평가가 아니라 현 정권에 대한 비판을 하러 온 것 같다"고 말했다. 김 전 대통령에게 '존재론적 의의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던진 윤여일(사회학과 3) 씨는 "김 전 대통령은 자신에게 온 질문을 거의 이해 못하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강의를 주관했던 함성득 교수(행정학과)는 "이념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수업권을 존중해 준 총학생회에 감사한다"며, "아슬아슬한 순간도 많았지만 수업을 무사히 마쳐 다행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함 교수는 "제일 밥맛없는 대통령이라고 하는 등 학생들도 충분히 비판적인 시각을 개진했다"고 평가했다.

다음은 우리나라 최초의 전직 대통령 대학 강의에서 오간 질문과 답변이다.

- 김 전 대통령은 취임 초기 90%가 넘는 높은 지지율이었지만 퇴임 때는 형편없었다. 이것은 여러 가지 잘못된 정책실시 때문이라고 생각되는데…. 또한 현재의 5년 단임제 대통령 임기보다는 4년 중임제가 좋다고 생각하지는 않는가.

"나는 국민의 여론을 읽고 있었다. 처음에 90%가 훨씬 넘는 지지여론은 잘못됐다고 생각했다. 나는 내가 만능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도 수많은 이야기를 듣는다. 내가 청와대 들어갈 때 모든 서민들의 전화번호를 가지고 갔고 수많은 어려운 사람과 수시로 전화했다. 아쉬운 점도 있었지만 최선을 다했다.

대통령 임기 문제는 나는 기본적으로 중임제는 안된다고 본다. 우리나라 국민정서는 4년, 4년, 8년을 하면 독재로 간다. 박정희가 18년 아닌가. 길면 독재로 간다. 지금의 헌법을 만드는데 내가 관여했다. 나는 5년 하는 것이 대단히 좋다고 생각한다. 또 대통령 중심제가 우리나라에서는 옳다고 본다. 내각책임제를 하자는 사람이 있는데, 나는 내각책임제를 실험해본 사람이다. 6개월만에 박정희가 쿠데타 했다. 내각제는 힘이 없어서 안된다."

- 재임시절 인사의 보안에 많은 신경을 썼던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러다보니 언론과 각계의 검증과정을 거칠 수가 없었다. 또한 현직에 있는 사람도 언제 자기가 잘릴지 모르니 직언을 할 수 없었다고 본다. 아까 강의할 때 누구도 IMF가 올 거라고 말한 사람이 없었다고 했는데 그것도 주위의 문제가 아니라 직언을 할 수 없는 인사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가. 많은 사람들이 인의 장막이 쳐져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 생각하기에 재임시의 인사정책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내가 모든 것을 잘했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때 인사정책… 이것은 옳았다고 본다. 우리나라에서 누구를 어디에 임명한다 하면 그냥 언론에서 반대하는 사람을 기사로 쓴다. 도저히 그 사람을 살아남기가 어렵게 만든다.

윤관 대법원장 지명 때도 누구도 예상한 사람이 없었다. 언론에도 딴사람이 될 것이라고 보도됐다. 윤관 대법원장을 시키면 두 사람이 옷을 벗어야 했지만 나는 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옷 벗는 사람은 모두 경상도 사람이었다. 또한 나는 전라도 출신 두 사람이나 국무총리를 시켰다. 나는 전라도 사람 시켜도 좋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인사정책은 이게 뭔가. 전라도 싹쓸이 아닌가. 이것은 김대중이 불행하게 되는 것이다."

- 노동법과 한국은행법을 처리하지 못해 금융위기가 왔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당시 노동법을 처리했다면 금융위기가 안 왔겠는가. 오히려 김현철 씨가 관여한 한보비리가 IMF를 불러오는데 큰 원인이 된 것이 아닌가.

"그런데 현철이를 그렇게 과대평가하지 말라. 현철이는 그런 막대한 힘이 없다. IMF가 오게 된 것을 노동법, 한국은행법을 처리하지 못한 것과 결정적으로 기아사태 때문이다. 그때 내가 매번 보고를 받았다. 그만큼 경제를 챙겼다.

그때 김대중 씨가 기아 데모하는 데 가서 국민기업이니 꼭 살리겠다는 등의 발언을 하지 않았으면 달러는 빠져나가지 않았다. 또한 대통령선거를 하고 다니면서 김대중 씨는 '내가 대통령이 되면 재협상을 하겠다'고 말했다. 세계에 이런 무식한 발언이 어디 있는가. 국제사회에서는 전임자를 쫓아가는 거다. 오죽하면 깡드쉬가 각서를 받아달라고 했겠는가. 그래서 내가 김대중, 이회창, 이인제 이 세 명에게 각서를 받아다가 한 부는 내가 가지고 나머지는 줬다. 그동안 어땠는가. 이자만 올라가지 않았나."

ⓒ 오마이뉴스 이병한
- 재임시절 박태준 씨나 정주영 씨에게 정치적 보복을 한 것이 아니었는가.

"내가 보복을 하려고 했다면 그들을 구속했다. 그때는 여러가지 사안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웃기는 이야기지만 박태준이라는 사람은 내가 대통령 후보가 되자 탈당해 광양으로 내려갔다. 그때 내가 광양으로 가서 점심까지 같이하며 하루 온종일 설득했다. 이렇게 탈당하면 되겠냐고 말이다.

정주영 씨는 말도 안된다. 사실 자기 기업을 망해 먹은 것 아닌가. 수천억의 선거자금을 회사에서 빼가지고. 그게 다 봉급 아닌가. 그러나 모든 것을 풀어줬다. 그 사람을 불러서 당신은 처벌받아야 하지만 경제를 염려해서 풀어준다고 했다.

용기없는 자는 대통령이 안된다. 용기가 제일 중요하고 신의가 제일 중요하다. 이 두 가지가 제일 중요하다. 용기와 신의."

- 겉으로 아니라고 하지만 나는 이 자리가 정치적인 자리라고 생각한다. 여기에 모인 모든 사람이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어느 강의가 이렇게 카메라와 기자들이 많은 상태에서 진행하겠는가. 도대체 김 전 대통령의 존재론적 자기 의미는 어떤 것인가. (교수가 강의 계획과 어긋난다며 잠시 저지) 허심탄회하게 말해달라.

"학생이 여러가지 질문해줘서 고맙다. 내가 그래야 얘기할 기회가 있지 않은가. 나는 그렇다. 나는 식물인간이 아니다. 나마저 침묵한다면 국민과 역사에 대한 큰 죄악을 진다고 생각한다. 나는 살아있는 인간이다. 살아있는 동안 말할 수 있다. 남이 안한 말을 할 수 있다. 이것은 옳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 어느 대통령이나 레임덕이 있다. 김 전 대통령은 언제가 레임덕이었는가. 또한 김현철 씨 문제는 단순히 인륜차원에서 말릴 수 없었다는 것은 너무 무책임하고 말도 안된다.

"맞는 말이다. 아주 잘못됐다. 나도 오죽했으면 2번이나 미국에 보냈겠는가. 지금도 그렇다고 본다. 그런데 대통령의 아들에게는 많은 사람들이 붙는다. 이것은 김대중 씨 아들도 마찬가지다. 따라다니는 사람이 많다.

레임덕은… 집권후반기에는 반드시 온다. 지금 김대중 씨는 2년 반이 남았는데 실제 자기 권한이 끝났다. 그 증거가 의약분업 분쟁이다. 일본이 한 일을 봐라. 지금 추진하는 의약분업은 일본이 하려다 실패한 것이다. 일본을 모두 따라갈 필요는 없지만 배울 것을 배워야 한다. 지금 같이 의약분쟁이 생기는 것은 김대중 씨가 레임덕이 왔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 정경유착 철폐가 업적이라고 말했는데, 삼성의 자동차 진출은 정책적 실패이고 정치적인 결정이 아닌가.

"나는 지금도 후회하지 않는다. 당시 우리나라 1위 기업이 삼성이다. 삼성이 부산공장을 가지고 있다고 하면 아마 대단한 자동차 공장이 될 것이다. 절대 내가 부산 쪽이어서 하지는 않았다.

이번에 삼성을 대우에 준 것도 김대중이 잘못 한 거다. 망하는 회사에 왜 멀쩡한 회사를 주나. 만일 삼성을 그대로 뒀다면 부산의 경기가 지금 같지 않을 것이다. 부산은 지금 쑥대밭이다. 내가 자동차를 삼성에 준 것은 아주 잘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 대통령은 준비된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자신은 얼마나 준비된 대통령이었다고 생각하는가.

"나는 고등학교를 다닐 때부터 대통령을 하겠다고 생각했다. 내 하숙방에 '미래의 대통령 김영삼' 이렇게 써놨다. 그때부터 늘 대통령에 대한 꿈을 꿨다. 꿈이 있지 않으면 안된다. 그때부터 대통령 준비를 했다. 서울대를 다닐 때도 철학과였지만 대통령 하겠다는 생각에 정치학 강의를 더 많이 들었다. 나는 가장 준비 안된 대통령은 바로 김대중 대통령이라고 본다. 준비됐다는 말은 순 거짓말이다."

- 북한문제와 김일성에 대한 이야기를 인상깊게 들었다. 94년 당시 남북 정상회담 발표가 있다가도 '서울 불바다' 발언으로 사재기가 일었다. 또한 95년에는 쌀지원 문제로 여러 가지 논란과 혼선이 있었다. 그에 비해 현 김대중 정권은 대북정책에 일관성이 있다는 평을 받고 있다. 김 전 대통령의 대북관과 통일관은 무엇인가.

"시대가 변하고 있는데 혼자 변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북한을 무시하던 클린턴도 지금 이북에 간다지 않은가. 이렇게 시간에 따라 변하는 것이다. 나는 그것이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이북하고는 잘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지금처럼 퍼주는 것은 안된다. 식량을 약간 주는 것은 괜찮다고 본다, 약간. 그런데 지금은 식량이 아니라 달라를 주고 있지 않은가. 우리 어머니가 간첩에 의해 총에 맞아 돌아가셨다. 그래도 나는 그것 때문에 감정을 가지고 있거나 정책수행을 하지는 않는다. 물론 공산당은 믿지 못한다는 생각은 있다."

- 한 인터넷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역대 대통령중에 제일 밥맛없는 대통령'에 김영삼 전 대통령이 뽑혔다. 국민들은 지금 노태우나 전두환보다 김 전 대통령을 더 미워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결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임기중 실정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가.

"아, 좋아. 무슨 질문이라도 받죠. 그렇다. 나에 대한 반대 의견도 당연히 있어야지. 내가 독재자가 아닌데. 그게 멋이고 세상이다. 하지만 영원한 YS맨도 있다. 그것을 왜 모르나. 학생을 좋아하는 여학생도 있지만 매우 싫어하는 여학생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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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선임기자. 정신차리고 보니 기자 생활 20년이 훌쩍 넘었다. 언제쯤 세상이 좀 수월해질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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