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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가 망조가 들었지. 어디에 치마를 내걸어"
행사저지 측은 행사장에 내걸은 치마를 뜯어냈다.
ⓒ 오마이뉴스 이종호
8명의 페미니스트 미술인들이 '가부장적 왕실문화의 상징' 종묘를 여성의 '자궁'으로 재구성하려했던 '아방궁(아름답고 방자한 자궁) 종묘점거 프로젝트'가 전주이씨 종친회에 의해 '점거' 당했다.

9월 29일 서울 종묘시민공원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종묘점거 프로젝트' 전시회가 '전주이씨 종친회' 등의 실력저지로 열리지 못했다.

▲뜯겨나간 치마를 다시 잇는 작가들
ⓒ 오마이뉴스 이종호
'종묘점거 프로젝트'는 '페미니스트 아티스트그룹 입김'(정정엽 외 7명, 이하 입김)이 문화관광부의 후원을 받아 9월 29일부터 10월 1일까지 오전 11시부터 오후 7시까지 열릴 계획이었다.

입김 측 30여명은 9월 29일 오전 9시부터 종묘공원에 나와 행사를 위해 설치미술과 작품을 전시하기 시작했으나 오전 10시께부터 전주이씨종친회, 정통가족제도 수호 범국민 연합 등 회원 100여명이 몰려와 행사를 방해하기 시작했다.

"너 예술이 한자가 뭔 줄 알아"
작가가 우물쭈물하자 행사저지 쪽은 "한자로 예술이 뭔지도 모르는 것들이 예술을 어떻게 하느냐"고 타박했다. 그래서 서양 사람들은 藝術을 하지 않고 ART를 하나보다.ⓒ 오마이뉴스 이종호


이들은 "전통문화를 말살하려는 아방궁 점거 프로젝트 행사를 즉각 중지하라", "신성한 종묘 앞에 여성해방 특구를 설정하려는 음모를 즉각 중지하라", "진정 예술을 사랑하는 예술인이라면 예술 전용 무대로 옮겨 공연하라"고 요구했다.

이 과정에서 신체적인 손상은 없었으나 설치물과 작품이 많이 훼손됐고, 나이가 많았던 전주이씨 종친회 회원들이 젊은 여성 작가들에게 심한 욕설을 퍼부었다.

오후 3시 20분. 결국 입김 측은 작품을 제대로 설치해보지도 못한 채 종묘공원을 빠져나와야 했다. 철수하기 직전 입김 화가 정정엽 씨는 성명서를 통해 "시대착오적인 전주이씨 종친회"를 규탄했다.

"예술이란 현실을 뒤집어보고, 질문하고, 사유하는 행위라고 믿는다. '종교점거'라는 예술적 상상력을 용인하지 못하는 전주이씨 종친회의 고답적이고 시대착오적인 발상은 창작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무력행사이며, 전 예술인의 창작에 대한 명백한 월권과 탄압이다."

▲행사저지 쪽이 "부끄럽게 어떻게 '이런 것'을 전시하느냐"며 들어보이고 있다. '이런 것'을 들어올리는 이들의 표정에 부끄러운 기색이 없다.
ⓒ 오마이뉴스 이종호


마지막으로 정씨는 조용하지만 또박또박하게 말했다.

"우리 8인의 여성 미술가들은 지금 중무장한 군대 앞에 맨 몸으로 대적하고 있는 느낌이다. 우리는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있으며 도움이 필요하다. 우리에게 힘을 실어줄 사람은 다수의 대중뿐이다."


전주이씨 종친회 대표 인터뷰

▲ 전주이씨 종친회 대표
ⓒ 오마이뉴스 이종호
- 오늘 어디서 몇 명이나 왔는가.

"한 250명 정도 왔다. 전주이씨대동종약원 임원과 성균관 유도회 총본부 임원들, 전국씨족연합회 임원 등이었다."

- 행사를 반대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우선 종묘라고 하는 신성한 곳을 '점거'하겠다느니 '습격'하겠다고 쓴 문구를 보고 가슴이 섬뜩했다. 종묘는 배례와 회의를 하는 신성한 곳이다. 이곳을 어떻게 '점거', '습격' 할 수 있는가.

또한 표현이 그렇다고 하더라도 내용이 교육적이라면 모르겠다. 그런데 자궁, 아방궁, 남자의 성기, 여자의 질, 이런 것들을 가져와서 표현하고 체험하게 한다는 것은 이해할 수가 없다. 더구나 이곳은 세계문화유산의 하나인 종묘공원이 아닌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 문구 표현뿐 아니라 내용도 반대한다는 것인가.

"그렇다."

- 예술, 표현의 자유는 인정해야 하지 않은지.

"신성한 종묘 앞에 여성해방 특구를 설정하려는 음모를 즉각 중지하라"
정통가족제도 수호 범국민 연합의 성명발표 장면. 이들의 행동은 가장의 위기를 가장 처절하게 느끼는 사람들의 몸부림같다.ⓒ 오마이뉴스 이종호
"이런 것이 예술인가."

그는 가방에서 사진 하나를 꺼내 보여줬다. 전시작품 중 하나를 사진으로 찍어놓은 것이었다. 그 작품은 제미란(아트디렉터) 씨의 작품으로 앵그르의 「터키탕」에서 얼굴을 남자로 바꿔놓은 일종의 '명화 패러디'였다. 제미란 씨는 "힘만을 앞세우는 남자의 마초근성을 상징하기 위해 만든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작품 안에는 전두환·김영삼 전 대통령, 소설가 이문열, 영화배우 김보성 등의 얼굴이 있었다.

"(한 얼굴을 가리키며) 이게 누군가. 김영삼 전 대통령 아닌가. (그 아래를 가리키며) 이건 또 뭔가. 남자의 성기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가. 말이 안된다. 자기가 표현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예술이라면서 이곳에서 이렇게 하는 것이 우리는 매우 불편하고 피해가 온다. 예술이라는 것은 그 사람들 생각이고 우리는 퇴폐라고 생각한다."

집에서 하던 대로?
행사 저지 쪽의 한 참가자가 "여자들이 그만하라면 그만하지. 말이 많다"며 손을 올리고 있다.ⓒ 오마이뉴스 이종호
- 입김 측은 무력을 행사했다고 하는데.

"우리는 무력을 행사한 적이 없다. 많은 사람이 모여 입장을 발표했을 뿐이다. 이곳에서 행사는 할 수 있지만 작품을 설치하는 것은 관할 구청의 승인을 받아야 한단다. 구청에 물어보니 승인해준 적이 없다고 했다."



다음은 행사전 올라온 예고 기사.

오늘 종묘에선 특별한 싸움이 있다
- 여성해방주의자와 가부장주의자의 한판 승부


송성일 기자 hwaya1@chollian.net


페미니스트 아티스트 그룹 ‘입김’은 서울 종로의 종묘앞 공원에서 9월 29일부터 10월 1일까지 3일간 ‘종묘 점거 프로젝트’를 실행한다. 그들은 종묘를 ‘유교적 가부장제의 상징’으로 보고 그 엄숙주의와 남성중심주의를 여성들의 한판 미술축제로 씻어내고 종묘앞 공원을 ‘아름답고 방자한 자궁’이라는 의미의 ‘아방궁’으로 탈바꿈시킨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기획은 막판에 전주이씨종친회에 의해 무산될 위기에 처해졌다. 전주이씨종친회는 이들 여성아티스트들의 기획에 대해 ‘이 무슨 해괴망칙한 일이냐’며, ‘종묘의 위엄을 지키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겠다’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그 뒤, ‘입김’의 회원인 제미란 씨(37, 화가)에 따르면 행사일이 다가오면서 입김회원들에게 정체불명의 사람들로부터 전화가 걸려오고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욕설과 협박이 계속되고 있다고 한다. ‘입김’회원들은 종친회측과의 대화를 위해 29일 자리를 가졌으나 종친회 측은 '대화는 무슨 대화냐’며 미술행사의 철회나 장소변경을 일방적으로 요구했다.

평범한 주부인 8명의 여성 미술가들로 구성된 ’입김’에 따르면, 종묘점거 프로젝트의 기본 취지는 고급미술과 저급미술의 이분법과, 창조자와 관객의 일방적 소통방식을 허물고, 미술관이 아닌 시민공원(종묘공원)에서 대중과 함께 하는 미술축제를 벌인다는 것이며, 이를 통해 전통유교문화 속에서 대를 잇기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았던 여성의 몸에 새로운 시선을 부여하는 것이라고 한다.

특히 이번 행사는 문화관광부의 지원하에 합법적 절차로 진행되었고, 행사장소인 종묘공원은 서울 시민이면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시민 공간으로 명시되어 있기 때문에 행사가 이씨종친회에 의해 폭력적으로 무산될 경우 적지 않은 문제를 야기할 것으로 보인다.

‘입김’에 따르면 “예술이란 현실을 뒤집어보고, 질문하고, 사유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종묘점거’라는 예술적 상상력은 충분히 용인되어야 하며 전주이씨종친회측의 주장은 창작과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고 특히 주체의식을 지니고 살아가려는 여성들에게 가해지는 집단적 조직적 폭력이다”고 하면서 어떤 폭력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행사를 강행하겠다고 한다.

이 행사는 29일 11시에 시작할 예정이고 이씨 종친회측은 행사저지를 위해 이날 10시까지 종묘 공원에 집결할 예정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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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선임기자. 정신차리고 보니 기자 생활 20년이 훌쩍 넘었다. 언제쯤 세상이 좀 수월해질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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