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 동북렬사기념관
ⓒ 박도
동북열사기념관

서 회장은 옛 하얼빈 일본 총영사관에서 그리 멀지 않는 동북열사기념관으로 안내했다. 이곳은 일제에 정면으로 맞서 싸우다가 장렬하게 순국한 항일열사를 모신 곳이었다.

일제는 우리나라를 합방한 후, 동북 삼성에도 침략하여 무수한 백성들을 살해하고 수많은 물자를 약탈해 갔다. 당시 동북의 군벌 정부는 부패무능하여 이를 방관하거나, 도망치거나, 아니면 굴욕적인 매국조약에 도장을 찍고는 일제에 빌붙어 살았다.

하지만 당시 동북의 인민들은 스스로 항일 전선을 만들었다. 그들은 영하 40도의 혹한에도 며칠씩 굶어가며 처절한 투쟁을 펼쳤다.

관련
기사
일본군 장교 박정희는 기념관 세우고 항일군 총참모장 허형식은 생가 헐려

일제 총칼에 죽어간 사람, 철창 속에서 고문으로 죽어간 사람 …. 해방 후, 중국 인민정부에서는 이들의 넋을 기리고자 동북열사기념관을 만들어 그 행적을 기록해 모시고 있다.

▲ 동북렬사기념관 로비에 있는 열사 모형
ⓒ 박도
‘가던 날이 장날’이라고 하더니 우리 일행이 동북열사기념관을 찾은 날은 하필이면 중국 중앙정부에서 기념관 보수 지원금이 나와서 대대적인 보수 공사를 하는 기간이었다.

어쩔 수 없이 1층 로비만 훑고 나왔다. 그곳 전시실에 모셔진 항일열사 영정을 자세히 뵙지 못해 유감이었다.

서 회장은 여기에 모셔진 열사 가운데 허형식 양림 리추악 리홍광 박진우 차순덕… 등 32분이 조선족 열사들로, 기념관에 모신 분 가운데 조선족이 삼분의 일이나 된다고 했다.

동행한 이항증 선생은
“허형식(許亨植) 열사는 박 선생 고향 분이지요”라고 했다.
“네?”

이 선생은 외가가 구미 임은동 허씨 집안이라서 그 마을 내력과 지리에 구미 태생인 나보다 더 밝았다. (이 선생 어머니 허은 여사는 석주 이상룡 선생 손부임)
“임은동은 박정희가 태어난 상모동과는 철둑 사이로 이웃 동네지요.”
“네?!”

이 선생은 의미 깊은 말씀을 했다. 임은동 상모동은 같은 금오산(金烏山) 자락으로 두 마을은 부르면 대답할 거리다. 이웃 마을에서 같은 시대에 태어났지만, 두 사람의 인생 역정- 항일(抗日)과 부일(附日)의 길-이 아주 다름을 일깨워 주는 얘기였다.

한 부모에서 태어난 형제도 서로 가는 길이 다른데, 하물며 같은 산 아래에서 태어났다고 똑같은 길을 걸을 수 있으랴.

그곳을 떠나오면서 곰곰 생각할수록 몹시 부끄러웠다. 남의 나라에서조차 기념관에 모시고, 거기다 고향 어른이라는데, 나는 그 이름을 전혀 들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 동북항일연군 제3로군 총참모장 겸 제군장 허형식 장군
ⓒ 박도
또 한편으로는 매우 반가웠다. 우리 속담에 “까마귀도 고향 까마귀가 반갑다”고 했다. 먼 이역에서 고향 어른을 만나다니. 그러면 그렇지, 충절의 고장 선산 구미가 현대사에도 그 명맥이 끊어졌으랴.

며칠 후 연길 서점에서 산 중국조선민족 발자취 총서4《결전》화보에서 허형식 장군의 모습을 대할 수 있었다. 아울러 현존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서 명맥이 끊어진 1930~40년대의 걸출한 독립전사들의 이름도 읽을 수 있었다.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에서는 김일성 안길 최현 김일 서철, 제2로군에서는 최용건 리학복, 제3로군에서는 허형식 김책이 그들이다.

같은 책 263쪽에서는 김우종씨가 쓴〈북만에서 유격전을 견지한 항일연군부대들〉편에서는 혀형식 장군의 최후도 읽을 수 있었다.

1940~41년 무렵 일제는 관동군을 76만으로 증가시켜 소련 진공을 준비하는 한편, 항일연군을 전멸시키기 위해 대부대를 동원하여 동북의 일대를 빗질하듯 싹싹 토벌했다.

이에 동북항일연군은 견딜 수 없어서 1940년 말부터 대부대를 러시아로 이동시켰다. 그래서 김일성 김책 최용건과 같은 지휘관들은 소련으로 넘어갔다.

하지만, 허형식 장군만은 단 한번도 소련으로 피신하지 않고 동북의 백성을 지키며 소부대 활동으로 끝까지 일제와 맞섰다.

"1942년 7월 말, 허형식은 경위원(경호원) 진운상을 데리고 파언, 목란, 등흥 등지에 소부대사업 검열을 나갔다.

장서린 소부대가 동흥현 두도하자, 이도하자, 삼도하자의 숯구이 노동자들 속에서 반일회원을 100여명이나 받아들였다는 보고를 듣고 그는 매우 기뻐하면서, 앞으로도 계속 비밀공작을 더 잘하라고 지시하고는 장서린이 파견한 왕조경과 함께 8월 2일 귀로에 올랐다.

바로 이때 일제 토벌대가 이 지역에 출동하여 산간지대를 수색하고 있었다.

허형식 일행은 청송령 기슭에서 밤을 보내고 8월 3일 아침, 경위원이 일제의 낌새를 모르고 밥을 지으려고 불을 지폈다. 계곡이 깊어 밥짓는 연기가 미처 흩어지지 않아 그만 토벌대에게 발각되고 말았다.

허형식은 두 전사와 함께 토벌대와 싸웠다. 하지만 세 사람으로 몇 배나 많은 토벌대의 포위를 뚫고 나가기는 어려웠다. 허형식은 다리에 관통상을 입어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그는 자기가 엄호할 테니 빨리 철퇴하라고 두 경위원에게 명령했으나 누구도 그의 곁을 떠나려 하지 않았다. 잠시 후, 진운상이 가슴에 총을 맞고 쓰러졌다.

허형식은 왕조경에게 문건 배낭을 넘겨주면서 더 지체하지 말고 빨리 퇴각하라고 엄하게 명령하였다. 왕조경은 할 수 없이 그의 곁을 떠났다.

허형식은 피를 흘리면서도 왕조경을 엄호하기 위해 큰 나무둥치에 기대어 적들을 계속 쏴 눕혔다. 그러나 적들의 기관총 사격에 허형식은 끝내 장렬히 쓰러졌다. 그때 그의 나이 33세였다."
- 김우종 <북만에서 유격전을 견지한 항일연군부대들〉


나는 그 마지막 장면에 감동되어 한동안 눈을 감았다. 마치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의 마지막 장면 로버트 조던을 연상케 했다.

▲ 저녁놀에 물든 금오산, 부처님이 누워있는 모습과 같다고 해서 ‘와불상(臥佛像)’이라고도 한다.
ⓒ 구미시
허형식은 1909년 구미 임은동에서 태어난 바, 항일 의병장 왕산(旺山) 허위(許蔿) 선생의 조카였다.

임은동 허씨 집안은 허위 선생을 비롯하여 범산(凡山) 허형, 방산(舫山) 허훈, 성산 허겸(許蒹) 등 의병 활동으로 쟁쟁한 항일 가문이었다.

1908년, 왕산 선생은 구한말 의병장으로 일본 통감부를 깨뜨리고자 의병 300명을 이끌고 서울 동대문 밖 30리까지 진출하여 일본군과 접전하였다. 하지만, 구식 무기로 신식 무기를 당해내지 못해 경기도 연천으로 물러났다.

이 전투가 국내 항일 의병전의 가장 치열한 싸움이자 마지막이었다. 그 후 역적 이완용이 연천으로 사람을 보내어 관찰사나 내무대신 벼슬로 왕산 선생을 회유했다.

이에 왕산 선생은 심부름 온 이를 크게 꾸짖어 물리치고 절치부심하며 후일을 기약했다. 하지만, 왕산 선생은 은거 생활 중 일본 헌병에게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 개설 후, 제1호로 교수형을 당했다.

이 옥사로 유족들은 고향에서 일본 순사와 밀정들의 등쌀에 견디다 못해, 1915년에 구미 임은동의 허씨 일족들은 만주로 야반도주하다시피 망명길에 올랐다. (현재 서울 동대문에서 청량리에 이르는 길을 ‘왕산로’라 한다.)

▲ 임은동 왕산 생가 터에서 필자. 항일 명문 집이 주춧돌마저 찾아볼 수 없도록 폐허가 되고, 뒷뜰 대나무만 몇 그루 남아 있었다. 필자가 관계기관에 이를 지적해도 마이동풍이다. 이 땅에는 아직 정의도 진리도 없다. 오직 천민자본주의만 있을 뿐이다. '선비의 고장' '충절의 고장'이란 말이 몹시 부끄럽다.
ⓒ 박도
중국에서 귀국 후 어느 날 이화대학 도서관에서 참고 도서를 찾던 중,<한국독립운동사 연구> 제7집에서 '許亨植 硏究(허형식 연구)'라는 독립기념관 연구사 장세윤씨의 논문이 눈에 번쩍 띄어 단숨에 읽고는 잦아진 허형식 장군에 대한 호기심이 다시 일었다.

수소문 끝에 현재 성균관대학 동아시아연구소 연구 교수로 재직 중인 장세윤 교수를 만났다. 내가 허형식 장군과 동향이라 하자 장 교수는 초면인데도 십 년 지기처럼 맞아주었다. 국내에 처음 허형식 연구를 발표한 장 교수가 허형식을 주목했던 점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항일연군 지도자들이 대부분 북한 출신인데 견주어 남한 출신이다.
둘째, 구한말 의병장 왕산 허위 선생의 당질이다.
셋째, 항일연군에서 정치 이론과 사상, 대원 교육과 전략전술 분야에서 핵심 역할을 했다.
넷째, 1940년대 초 최용권 김책 김일성 등과 거의 대등한 고위 간부로 활동했다.
다섯째, 1942년 8월 북만주에서 전사할 때까지 항쟁할 만큼 철저한 적극 무장 투쟁론자였다.

특히 장 교수가 허형식 장군을 높이 평가하는 점은 1940년대 초 무렵 다른 항일연군 지도자들이 일제의 극심한 토벌을 피해 소련으로 넘어갔으나, 허형식 장군은 단 한번도 국경을 넘나들지 않고 끝까지 만주의 백성들을 지키다가 토벌군에게 장렬히 전사했다는 사실로, 독립전사의 열정과 순수성에서는 그 누구보다 앞선 지도자라고 했다.

그 후, 나는 장세윤 교수와 허형식 장군의 임은동 생가와 유족들을 탐방하였다. 고향의 생가는 폐허가 된 채 대나무 몇 그루만 자라고 있었고, 임은 허씨 10여 가구 중 허호씨만이 홀로 고향 땅을 지켰다.

만주로 망명했던 왕산 유족들은 러시아 중국 북한 미국 등지로 뿔뿔이 흩어졌다고 했다.

미국에 거주하는 왕산 후손 허도성 목사가 일시 귀국하여 만났더니 임은 허씨 후손들이 그 새 ‘일리야’ ‘부로코피’ ‘슈라’ ‘나타샤’가 되었고, 당신 후손마저도 머잖아 ‘로버트 허’ ‘벤 허’가 될 판이라고 눈시울을 적셨다.

▲ 금오산 들머리에 있는 왕산 허위 선생 유허비 앞에서(왼쪽부터 필자, 왕산 후손 허호 씨, 향토사학자 강구휘 전 도의원)
ⓒ 박도
일찍이 내 고향 선산 구미는 길재(吉再) 하위지(河緯地) 이맹전(李孟專) 김숙자(金叔滋) 김종직(金宗直)…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인재를 배출한 충절과 학문의 고을이다.

그러나 현대사에 와서는 정신보다 물질을 숭상하는 경제 논리에 밀려 전래의 고을 이미지가 산업화의 물결로 훼손되어서 나그네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다.

사람이 정신을 잃어버리면 금수와 그 무엇이 다르랴. 그러고도 어찌 나라가 온전할 수 있으랴.

어쨌든 머나 먼 낯선 이역에서 충절의 맥을 잇는 고향 출신의 훌륭한 독립전사를 만나게 되어 그 맥이 이어지고 있음을 확인해서 가슴 뿌듯했으며, 한편으로는 이런 위인이 아직도 제대로 조명되지 못한 우리의 현실이 무척 안타까웠다.

"동북항일연군 제3군 군장과 제3로군 총참모장까지 담임한 바 있는 허극(허형식의 다른 이름)의 위용에 대하여서는 어떤 사람도 시비가 없다.

비록 그가 가담해서 싸웠던 동북항일연군이 중공당 조직이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의 이상은 공산주의 혁명보다 자기 조국의 독립이었고, 일본군의 패망과 함께 자기의 조국으로,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는 떳떳하게 동북항일연군의 역사에서 빛나는 한 장을 차지하고 있으며, 참으로 의병장의 후예답게 만주 항일 파르티잔의 한인들 속에서 제일 가는 기수로써, 별로써 빛을 뿌리고 있다."
- 유순호(연변 작가) <만주 항일 파르티잔의 제일 가는 별>


▲ 멀리 흑룡강성 경안현 청송령에 있는 '허형식 희생지' 기념비, 2000년 여름 이 비를 참배하고자 수만리 길을 찾아갔다. 그곳 사람들이 비를 세운 후, 한국에서 찾아온 첫 참배객이라고 대단히 반겼다. 언저리의 들꽃을 꺾어서 헌화한 뒤 깊이 고개숙였다.
ⓒ 박도

태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