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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얼빈 일본총영사관

▲ 하얼빈 옛 일본총영사관, 악명 높던 지하 고문실이 싸구려 여사로 변했다.
ⓒ 박도
하얼빈 역 답사를 마친 뒤, 곧장 거기서 멀지 않은 옛 하얼빈 일본총영사관으로 갔다. 이곳은 지난날 하얼빈 일대에 살았던 일본인을 보호하던 기관이었지만, 우리나라 독립전사들에게는 소름이 끼치는 원한의 건물이었다.

이곳에는 지하 감방이 있다는데 안 의사도 거사 후 거기서 심문 받았고, 일송 선생도 일본 관헌에 체포되어 한 달여 동안 모진 고문과 심문을 받은 곳이기도 하다.

▲ 길 건너편에서 바라본 퇴락한 옛 일본총영사관 건물, 하얼빈시 도시 계획으로 곧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고 한다. 1930년 5월 1일, 조선족 청년 허형식(왕산 허위 선생의 조카)이 주동이 되어 이 일본총영사관을 점거한 사건이 있었다. 역사는 늘 되풀이 되고 있다.
ⓒ 박도
어디 이 분들뿐이랴. 당시 북만주 일대에서 항일 독립전사들이 일본 관헌에게 체포되면 으레 이곳에 옮겨져서 온갖 악형과 고문을 다 받았던, 우리 선열에게는 원한과 저주스런, 공포의 일본총영사관이었다.

옛 일본총영사관 겉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다고 했으나, 세월은 무상하여 지하 고문실은 '화원여사(花園旅社)'라는 간판을 달고 있는 싸구려 여인숙으로 바뀌었다.

우리 일행은 화원여사 주인에게 하루치 숙박료를 내고 지하 감방에 들어가려 했으나, 여사 주인은 내가 둘러맨 카메라를 보고는 들어갈 수 없다고 막무가내로 막았다.

몇 해 전, 연변의 작가 강용권씨가 일본총영사관 지하 감방의 고문 기구와 그 흔적을 촬영해서 당신이 평생을 바쳐 발로 쓴〈죽은 자의 숨결 산 자의 발길〉이란 책에 실어서 일제의 만행을 폭로했다.

그 후 이 화원여사는 일본측으로부터 강력한 항의를 받은 모양으로, 특히 한국인 기자나 작가의 출입을 엄격히 통제한다고 했다.

서 회장과 김 선생이 통사정-김 선생은 당신 할아버지가 갇혀 있었던 곳이라고-끝에, 이틀 분 숙박료를 지불하고서 잠시 사진 한 장만 찍는다는 조건으로 겨우 들어갈 수 있었다.

사회주의 국가에서도 돈의 위력은 빛을 잃지 않았다. 옛날 만주의 마적들이 우리 동포를 인질로 잡고는 그들 우두머리가 “세상만사 다 금전 농간이다”라고 하면서 돈을 요구해, 힘없고 어리석었던 우리 동포들은 목숨을 구하기 위하여 금품을 죄다 바친 후에야 살아났다.

“돈을 가지고 노크를 하면 문이 저절로 열린다”는 영국 속담은 동서고금에 다 통하는 말인가 보다.

▲ 화원여사 출입문, 사람 팔자 건물 팔자 모두 알 수 없나 보다. 악명 높던 일본총영사관 지하실이 싸구려 여사가 될 줄이야.
ⓒ 박도
마침내 총영사관 지하로 들어갔다. 내 선입관 탓인지는 몰라도 지하실 분위기가 어딘지 모르게 음습했다. 어디선가 고문에 못이긴 선열의 비명이 들려오는 듯했다.

총영사관 지하에는 두 평 남짓한 방이 복도 좌우로 여남은 개 정도나 되었는데 그 새 벽에 걸려 있다는 쇠갈고리와 같은 각종 악랄한 고문 기구와 물고문용 욕조들은 이미 철거해 버렸다.

하지만 실내를 유심히 살펴보니 벽과 천장 한편에는 그 흔적이 조금은 남아 있었다. 해방 후 민주 인사를 붙잡아 고문했던 우리 정보기관이나 경찰들의 고문 수법이 모두 일제 관헌들로부터 배운 거라는 데에는 정말 말문이 닫혔다.

사람 팔자만 알 수 없는 게 아닌 모양이다. 그토록 무시무시하던 일본총영사관 지하 감방이 이제는 한낱 싸구려 여인숙 객실로 변하여 일인용 침대만 을씨년스럽게 놓여 있었다. 새삼 세월의 무상을 절감할 수 있었다.

내가 지하 감방 이곳저곳을 기웃기웃 살피는데 주인과 김 선생이 출입문에서 빨리 나오라고 성화였다. 급한 마음에 카메라 셔터를 두어 번 누르고 얼른 나왔다.

동행한 서 회장은 이 건물도 하얼빈 시 도시계획으로 곧 헐리게 된다면서 어쩌면 내가 이곳 지하실을 촬영한 마지막 한국인이 될 지도 모르겠다고 말씀했다. 그래서 나는 귀한 역사의 현장을 필름에 담았다는 자부심으로 매우 뿌듯했다.

▲ 일본총영사관 지하실, 카메라 플래시도 악명 높던 독립전사의 고문실이라는데 겁먹은 양, 터지지 않았다.
ⓒ 박도
그러나 웬걸, 항일 유적답사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온 후 필름을 현상했더니 답사기간에 찍은 18통 필름들이 대체로 잘 나왔는데, 하필이면 일본총영사관 지하실 장면만이 온통 어둡고 창문에 쇠창살만 간신히 알아볼 정도였다.

너무 급히 서둔 바람에 수동인 내 카메라의 플래시가 미쳐 터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내가 크게 낙담을 하자 이 선생이 원래 지하 감방은 어두운 곳이고, 창문에 쇠창살은 그런 대로 나왔으니 오히려 지하 감방의 어두운 분위기를 더 잘 살렸다고 꿈보다 해몽이 좋게 내 아픈 마음을 달래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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