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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산로'의 유래

▲ 구한말 13도창의군 군사장 왕산 허위 선생
ⓒ 왕산기념사업회
교통방송을 들으면 하루에도 몇 차례나 방송진행자로부터 '왕산로'의 교통흐름에 대한 정보를 들을 수 있다.

왕산로는 서울 동대문에서 청량리에 이르는 간선도로를 말하는 바, 널리 알려지고 매우 귀에 익은 도로이름이다. 하지만 왕산로의 정확한 유래를 아는 이는 드물다. 필자도 전혀 몰랐다.

1999년 여름, 항일유적 답사로 하얼빈에 갔다가 거기에 있는 동북항일열사기념관에서 위대한 독립전사 동북항일연군 제3로군 총참모장 허형식 장군을 만났다.

그분이 왕산 허위 선생의 당질로 구미 임은동 출신인데도 그때까지 동향인으로 몰랐다는 큰 자괴감과 아울러 충절의 고장 선산 구미 땅에도 현대사에 그 정신이 이어지고 있음에 매우 뿌듯함을 느꼈다.

그때 귀국 후, 문헌을 통해 왕산 일가의 항일투쟁에 매료되어 생가 현장을 찾았다.

하지만 생가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쓰레기장이 되다시피 방치된데 분노한 나머지 이런 사실을 월간 <독립기념관> <오마이뉴스> 그리고 필자가 쓴 책에다 실어 널리 알렸으며, 한편으로는 김관용 구미시장에게 왕산 생가 복원을 촉구하는 건의서를 보내, 구미시장으로부터 긍정적인 답변을 받은 바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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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장교 박정희는 기념관 세우고 항일군 총참모장 허형식은 생가 헐려

이런 가운데 지난달 말(2004. 11. 30), 구미 임은 허씨 왕산 집안에서 유일하게 고향을 지키며 왕산 유업 계승사업에 정성을 쏟고 있는 허호(62·전 구미 시의원)씨로부터 구미시에서 왕산 기념사업 추진계획이 완성되어 곧 착공한다는 기별을 받고 반가운 마음에 다음날 곧장 달려갔다.

▲ 서울 망우리에 있는 '13도창의군탑'
ⓒ 박도
앉아서 (나라가) 망하기를 기다리느니보다 온갖 힘을 다하고 마음을 합하여 빨리 계책을 세우자. 진군하여 이기면 원수를 보복하고 국토를 지키며, 불행히 죽으면 같이 죽자.

의(義)와 창(槍)이 분발되어 곧 나아가니 저들의 강제와 오만은 꺾일 것이다. … 비밀히 도내 각 동지들에게 빨리 통고하여 옷을 찢어 깃발을 만들고, 호미와 갈고리를 부셔 칼을 만들고 … 우리들은 의군을 규합하여 순리를 좇게 되니 하늘이 도울 것이다.
- <배일통문> 중에서 -


왕산(旺山) 허위(許蔿) 선생은 1854년 경북 선산 구미 임은동에서 대대로 유학을 숭상하던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성리학을 수학한 유학자로, 충효사상과 위정척사사상에 뿌리를 둔 애국애족의 민족정신을 가졌다.

1895년 일제가 명성황후를 시해하자 선생은 1896년 경북 김천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그리하여 의병진을 조직하여 김천 일대에서 활동하다가 충북 진천까지 진격하는 등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고종황제의 후의로 성균관박사, 중추원의관, 평리원서리재판장(현 대법원장)을 역임하면서 불의와 권세에 타협하지 않고, 공정 신속하게 사무를 처리하여 큰 칭송을 얻었다.

▲ 왕산 선생이 의병활동을 했던 임진강 유역
ⓒ 박도
1905년 을사조약과 1907년 정미7조약이 강제 체결되어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선생은 1907년 경기 북부지역을 근거로 다시 의병을 일으켰다.

특히 선생은 1907년 11월, 전국 의병 연합체인 13도 창의군의 편성을 주도하고 군사장으로 그해 말부터 서울 탈환작전을 펴 동대문밖 30리까지 진격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 왕산의 당질로 동북항일연군 제3로군 총참모장 허형식 장군
ⓒ 박도
하지만 최신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과 접전 중, 화력의 열세로 말미암아 패하고 말았다. 이후 선생은 임진강과 한탄강 유역을 무대로 독자적인 항일전을 펼치다가 1908년 6월 11일, 일제에 체포되어 일제의 갖은 회유도 다 뿌리치고 1908년 9월 27일(양력 10월 21일) 서대문 감옥이 생긴 이래 처음으로 교수형으로 순국하셨다.

그 후 왕산 일가는 일제의 헌병과 밀정의 등살에 견딜 수 없어서 만주로 망명하여 온 집안 일족이 항일의 가시밭길을 걸으면서 숱한 항일 전사를 배출했다. 하지만 그 후손은 아직도 귀국치 못하고 중국, 러시아, 북한, 미국 등 사방으로 흩어진 문자 그대로 온 집안이 풍비박산이 되었다.

충절의 고장에 걸맞은 왕산 기념사업

12월 1일 필자가 구미 임은동에 이르자 왕산 문중의 허호씨, 김교승 구미문화원장, 강동선 구미시관광문화재담당계장이 반갑게 맞았다.

이 날은 왕산 허위 선생 기념사업추진계획서가 확정되어 왕산기념공원과 왕산기념관 부지 선정을 위하여 현장 답사하는 날이었다. 필자도 이들과 동행하여 두 곳을 모두 둘러보았다.

▲ 왕산기념사업회 임은 허씨 실무 대표 허호 전 구미시의원
ⓒ 박도
▲ 김교승 구미문화원장(왼쪽)과 강동선 구미시문화재담당계장
ⓒ 박도
이들의 설명에 따르면, 왕산 생가 터(600여 평)는 왕산 손자 허경선씨가 구미시에 기부체납하여 그곳에다가 왕산기념공원을 만들고, 생가 건너편 양지 바른 곳에 문중에서 부지 2000~3000평을 마련하여 그곳에다가 왕산기념관을 세운다는 복안이었다. 1단계 예산 500만원은 구미시비로 추진 중이며 2, 3단계 예산은 10억원 정도로 추후 확보한다는 것이다.

이 날 허호씨는 구미시에서도 구미공단을 지나는 도로를 '왕산로'로 명명하였다고 하였으며, 강동석 계장은 김관용 구미시장 말을 전한 바 “때늦은 감은 있지만 충절의 고장에 걸맞게 왕산 기념사업을 추진 중이라고 하면서 물질과 정신이 함께 발전하는 시정을 펴나가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 왕산 기념관 부지 선정을 위해 현장 확인을 하는 실무진(왼쪽부터 허호씨, 강동선 계장, 김교승 원장)
ⓒ 박도
내년 광복 60주년을 앞두고 내 고향 구미 땅에도 숨겨지고 파묻힌 역사의 진실이 다시 햇빛을 보는 것 같아서 자못 흐뭇했다.

널리 알려진 바, 예로부터 선산 구미는 영남학파의 비조(鼻祖) 야은 길재(吉再) 선생을 비롯하여 사육신의 하위지·생육신 이맹전 그리고 김숙자·김종직 등과 같은 선비들이 나신 곳으로, 이 고장사람들은 충절과 학문의 고장으로 대단한 긍지와 자랑으로 여겨 왔다.

현대사에 와서는 정신보다 물질을 숭상하는 세태에 밀려 충절과 학문의 고장이 산업화에 밀려 정신문화가 빛을 잃어버린 차, 김관용 구미시장과 김교승 구미문화원장, 허경선 허호 왕산 유족들의 노고로 다시 옛 것을 복원한다니 그 정성에 감사와 경의를 드리며, 아무쪼록 왕산기념사업이 무사히 완공되기를 바란다.

“고매한 정신문화는 없고 물질만 발달하면 그 사회는 곧 퇴폐에 빠지고 마침내 허물어진다”는 말을 고향 출신의 한 문사가 외람되게 고향사람들에게 남긴다.

▲ 왕산 선생 생가 터로 옛 흔적이라고는 대나무만 남아 있다. 곧 이곳에 '왕산공원'이 조성될 예정이다.
ⓒ 박도


▲ 금오산, 선산 구미 사람들은 이 산이 인재의 요람이라고 말한다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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