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의 할리우드는 사회적인 이슈를 다룬 온갖 문제작들이 쏟아졌지만, 한편으로는 '재난 영화'들이 쏟아졌다는 사실도 중요하다. 재난의 범위도 다양하다. <에어포트(1970)>는 비행기 재난을 다룬 영화였으며, <타워링(1974)>은 고층 빌딩에서의 화재를 다룬 영화였다. 그리고 재난 영화의 진정한 걸작 중 하나인 <포세이돈 어드벤쳐(1972)>는 거대 여객선의 침몰을 다룬 영화다. '재난 영화'는 거대한 스케일로 관객의 눈을 사로잡을 시각적인 묘미와 함께, 온갖 고난을 이겨내고 끈질기게 살아남은 인간이라는 존재를 다루기 좋은 장르다. "나는 세계의 왕"이라고 선언했던 제임스 카메룬 감독도 <타이타닉>이라는 특별한 재난 영화를 통해 한동안 '왕'으로 군림할 수 있었다. 2004년의 기대작 <트로이>가 다소 기대 이하의 작품으로 남았지만, 여전히 뛰어난 연출력을 자랑하는 볼프강 페터젠 감독은 여름을 앞두고, <포세이돈 어드벤쳐>의 리메이크작 <포세이돈>을 연출한다. 재난 영화라는 것이 기본적으로는 사람들의 관심을 모으기 쉬운 블록버스터 영화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인간에 대한 진지한 탐구와 성찰을 동시에 추구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어려운 길을 선택했다고 할 수도 있겠다. 게다가 역사에 남은 명작을 리메이크하는 것은 특히나 위험 부담이 큰 선택이기도 하다. <퍼펙트 스톰>의 확장판에 머무른 <포세이돈>
 영화 <포세이돈>의 포스터
ⓒ 워너 브라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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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프강 페터젠 감독은 이미 <퍼펙트 스톰(2000)>이라는 영화를 통해 '물'과 함께 작업했던 적이 있다. <퍼펙트 스톰>은 조지 클루니라는 최고의 흥행배우와 마크 웰버그라는 재능있는 배우를 동원해 현대판 <노인과 바다>를 지향한 듯, 작은 어선이 폭풍우를 만난다는 이야기를 그린 영화다. 이 영화의 실감나는 폭풍우 장면은, 해일 제조기와 시속 120마일(약 193km)의 바람을 일으킬 수 있는 3대의 바람 제조기가 동원돼 컴퓨터그래픽 화면이 결합해 완성됐다고 한다. 하지만 현대판 <노인과 바다>가 되기에는 드라마적인 묘사가 지나치게 허술했다는 약점이 있어 평론가와 대중 관객에게는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포세이돈> 역시 다수의 블록버스터 영화를 연출했던 감독의 이력에 맞게, '쓰나미'가 호화 여객선 '포세이돈'을 덮치는 장면이나, 거대한 '포세이돈'이 침몰하는 장면은 완벽할만큼 섬세하게 연출됐다. 영화에 등장하는 거대 유람선 '포세이돈'은, 34톤의 철재로 길이 22m에 높이 5m의 유람선 로비를 직접 만들고 34만 리터의 물을 쏟아붓는 등 촬영 과정을 거쳤고, 2분에 불과한 침몰 장면을 위해 1년 2개월에 걸친 컴퓨터그래픽 작업이 필요했다고 하니, 그야말로 시간과 인내의 승리였던 셈이다. 하지만 1시간 38분이라는 시간 제약의 함정이 있는 만큼 이 영화는 여러 가지 면에서 약점이 노출됐다. 이 영화에 추억의 액션스타 커트 러셀이 출연했다는 사실은 반갑지만, 아쉽게도 나이 탓인지 과거에 선보였던 야성미는 찾아볼 수 없어 그의 출연 자체가 크게 부각되지 않는다는 아쉬움이 느껴진다. 게다가 조쉬 루카스나 에미 로섬 등의 재능있는 젊은 배우 역시, <포세이돈>의 거친 물살에 쫓겨 재능을 발휘할 시간까지 빼앗은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추억의 액션스타 '커트 러셀'도 이 영화의 약점을 만회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 워너 브라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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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세이돈>의 결정적인 약점은 짧은 상영시간 1시간 40분 내외에서 영화를 끝내는 것이 현대 영화의 주된 경향이지만, 영화는 반드시 짧아야만 관객의 호평을 유도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흥행이 보장되는 것도 아니다. 상영시간의 배분은 영화의 장르와 성격에 따라 분명하게 달라지는 것이다. 이 영화의 원작인 <포세이돈 어드벤쳐>는 2시간 가량의 상영시간을 통해, 인간에 대한 묘사도 섬세하게 완성했다는 장점이 있었고, <타이타닉>은 분량이 무려 3시간 15분이나 되는 영화였다. 영화는 길다는 것이 약점이 되지는 않는다. 시간 활용을 얼마나 충실하게 하느냐에 따라 다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포세이돈>은 그 준엄한 주제를 표현하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을 선택했다는 것이 약점이다. 그런 탓에 오랜 고생 끝에 완성된 섬세한 화면에도 불구하고, 이도 저도 아닌 영화같다는 느낌이 든다. 등장인물들 역시 대부분 생존에 대한 처절한 욕구와 고뇌를 표현하기에는 너무나 시간에 쫓기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대부분의 관객이 재난 영화라면 스펙터클을 앞세운 블록버스터 영화부터 생각하지만, 그런 관점에서 벗어난 영화가 하나 있다. 바로 프랭크 마샬 감독의 1993년작인 <얼라이브>다. 항공기가 추락해 살아남은 이들이 구조될 때까지의 이야기를 담은 이 영화는, 구체적인 스펙터클보다는 언제 구조될지 기약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생존에 대한 인간의 끈질긴 욕구와, 그에 따른 슬픔 그 자체를 감동적으로 묘사하면서 영화 마니아들이 사랑하는 명작이 될 수 있었다. 영화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관객은 스펙터클보다는 재난을 바라보는 감독의 눈과 섬세한 묘사를 더욱 주목한다. <타이타닉>이 괜히 '긴 상영시간'이라는 치명적인 약점을 감수한 것이 아니다. <타이타닉>에서 보여줬던 실감나는 침몰 장면은 분명히 매력적이다. 하지만 그보다는, 두 주연 배우의 감동적인 사랑 이야기, 배와 함께 최후를 맞이하는 선장, 손을 꼭 붙잡고 눈을 감는 노부부, 그리고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격려를 주고자 악기를 연주하는 악단 등, 위기 상황에서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다양한 이야기를 누구나 공감할 수 있게끔 섬세하게 그렸다는 강점이 진정한 세기의 걸작으로 이끌어낸 것이다.
 바로 이런 장면이 <타이타닉>을 세기의 걸작으로 이끌었다.
ⓒ 20세기 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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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펙트 스톰>과 <트로이>, 그리고 <포세이돈>, 명장이라고 알려진 볼프강 페터젠 감독이지만, 한편으로는 그들 영화를 통해 명장으로 소문난 감독도 시간 배분의 의미와 깊이 있는 묘사를 잊을 경우, 영화가 어떤 단점을 가지게 되는지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가 처음으로 명성을 얻게 된 명작 재난 영화인 <특전 유보트>가 무려 3시간 30분짜리 영화였다는 사실은, 그의 이러한 오류가 더욱 아이러니해지는 이유다.

덧붙이는 글 한겨레신문의 제 블로그에도 올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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