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영화를 보다가 면도를 하는 장면이 나오면 눈을 질끈 감게 돼요. 손을 떨면 어쩌나, 혹시라도 면도날이 잘못 스치기라도 하면 어쩌나. 아슬아슬한 느낌이죠. 면도가 주는 아슬아슬한 느낌이 영화에만 등장하는 건 아니에요. 엠마뉘엘 카레르의 소설 <콧수염>도 면도로 인한 예상치 못한 극단적인 결말을 맺고, 연극 <이발사 박봉구>의 면도날 역시 세상에 대한 분노를 담고 있죠. 하지만, 면도에 관한 가장 충격적인 장면은 오래전에 본 마틴 스콜세지의 단편영화 <빅 쉐이브 big shave>를 따라갈 게 없습니다. 6분 정도의 아주 짧은 단편인데, 정말이지 (제목이 상징하듯) 차마 눈뜨고 보기 어려운 영화였죠.
 손님은 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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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은 왕이다>가 보고 싶었던 건 예고편을 보고 나서부터예요. 예고편을 보면서 '이건 왠지 연극같아'라고 느꼈거든요. 게다가 이발소에서 벌어지는 사건이라니. 호기심 자극-. 자, 불이 꺼지고 영화가 시작됩니다. 주인공 남자는 법 없이도 살 만한 사람이죠. 직업의식 투철하고, 하늘에 맹세코 거짓말 같은 건 해본 적이 없을 것 같은 성실 순진남입니다. 뭐 특이한 게 하나 있다면 정말 어울리지 않는 여우같은 아내와 함께 산다는 것이죠. 그러던 그에게 어느 날 엽서 한 장이 배달됩니다. '난 네가 지난 여름에 한 일을 알고 있다'의 유사 버전인 '난 네가 한 추악한 짓을 알고 있다'. 협박 엽서에 손을 부들부들 떠는 이발사. 과연 무슨 일이 있던 걸까요? 곧 낯선 사내가 찾아오고, 이야기는 반전을 향해 치닫습니다. 일본의 미스터리 추리 소설가 니시무라 쿄타로의 <친절한 협박자>를 원작으로 삼은 이 영화를 보며 보는 내내 '좀 더 잘 만들 수 있었을 텐데'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어요. 꽤 깔끔한 장르영화이긴 한데, 왠지 20%쯤 부족한 느낌? 문제는 극의 완성도에도 있지만, '명계남'이라는 배우에게도 있는 것 같아요. 오기현 감독은 명계남의 일인극 '콘트라베이스'에 깊은 감명을 받아 그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를 구상했다는데(그래서인지 명계남이라는 배우의 페르소나가 영화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죠) 관객들이 모두 그 배우에게 공감하기란 어려운 일. 그렇다고 이 영화가 <존 말코비치 되기> 처럼 스크린의 안과 밖을 유기적으로 엮어내는 능력이 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구요.
 그 남자는 거기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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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전 이 영화를 보면서 코엔 형제의 <그 남자는 거기 없었다>가 떠올랐어요. 이 영화 역시 이발사가 주인공입니다. 게다가 역시나 그놈의 아름다운 아내가 말썽이죠. 하루하루가 무료하기만 한 어느 날, 그의 아내가 백화점 사장과 바람을 피우고, 그는 옳다구나, 덜미를 잡아 돈을 뜯어내 새 사업을 시작할 꿈을 꿉니다. 그런데 우연히 백화점 사장과의 싸움에서 그를 죽이게 되고, 살인범으로 잡힐 뻔했으나 대신 그녀의 아내가 누명을 쓰게 되죠.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영화는 코엔 형제의 영화답게 예상치 못할 방향으로 흐릅니다. 주인공의 직업이 이발사라는 것 외엔 두 영화는 분명 다르지만, '진실'을 숨기는 이야기라는 점에선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대신 한 쪽(<손님은 왕이다>)이 그 진실에 대해 너무 순진하게 접근하고 있다면, 다른 한쪽 (<그 남자는 거기 없었다>)은 '진실이란 언제나 저 너머에 있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이죠. 물론 전 후자에 손을 들어주고 싶네요. 어쨌든 머리나 수염 등 신체의 일부를 잘라내는 행위를 하는 이발소라는 공간과 그 일을 하는 이발사라는 직업은 재밌는 상상과 이야기들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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