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은 내게 무척 힘든 해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시절도 어수선했고, 마땅한 직업도 없었다. 그 전 해부터 모 출판사의 꽤 괜찮은 자리를 꿰차고 있었지만 원래 자유분방한데다 매이는 것을 싫어하는 못된 성정은 한 해를 견뎌내지 못했다. 전생이 부평초였는지 여기저기 부유하며 내기바둑꾼들을 찾아, 술을 찾아, 사람냄새를 찾아 떠돌기 시작했다.

돈 떨어지면 아무데서나 막일하고, 몇 푼 주머니에서 버스럭거리면 다시 떠나는 생활이 서서히 지겨워질 무렵 나는 한 여자를 만났다. 서울 종로 3가 피카디리 극장 옆 먹자골목에서 또 다른 한 여자와 소주 몇 병 나눠 마신 뒤 막 헤어진 뒤였다. 10월 하순이었다. 먹자골목에서 헤어진 여자 얘기는 아무래도 다음에 해야겠다. 이 마당 주인공이 아닌데다 가장 작은 보따리만 풀어놔도 이 지면이 꽉 차겠기 때문이다.

스물여섯, 피 끓는 '우울'을 달래준 여자

뒤 한 번 돌아보지 않고 사라지는 여자 꼭뒤가 아득해질 때까지 나는 붙박인 듯 서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 따위는 없었지만 명치 언저리에 난 구멍으로 가을바람이 쉭쉭거리며 파고들었다. 아팠다. 땅만 보며 골목을 빠져나온 나는 무심코 극장 간판을 올려다보았다. 술기운이었는지 잠깐 하늘이 노랬다.

ⓒ Warner Bros "칼라…, 퍼플?"

원작이 퓰리처상을 수상한 '앨리스 워커'의 소설이라는 사실이 나를 잡아끌었다. 다음으로 포스터가 이상하게도 내 눈길을 놓아주지 않았다. 우중충한 자줏빛 배경에 노란색도 주황색도 아닌, 어정쩡한 색깔을 두른 채 앉아 무엇인가 읽고 있는 여배우의 윤곽이 호기심을 자극했다. 주머니를 뒤져보니 간신히 입장료 계산할 돈은 되었다.

내 궁금증을 불러일으킨 여자는 다름 아닌 '우피 골드버그'였다. 못생겼다, 못생겼다, 어떻게 저렇게까지 못생길 수 있을까 싶은 여자였다. 그러나 이내, 그런 생각이 얼마나 오만한 인간의 편견이며 반거들충이 짓거리인지 깨닫게 되었다. 우피의 혼신을 다 한 연기가 살을 에는 듯 파고들 때마다 나는 소스라치며 빠져들었다. 영화 속 주인공인 '셀리'와 배우 우피 골드버그에게로.

앨리스 워커 판 '여자의 일생'이라는 평은 오히려 부족했다. 희생과 복종과 부당한 핍박 속에서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되기까지, 못 배우고 못생긴 한 여자의 삶은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그 질곡의 세월 끝에서 겨우 웃음 하나 발견하는 셀리. 우피의 연기가 아니었다면 그 웃음은 공허한 낙서일 뿐이었다.

영화가 끝나고 나는 오랫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영화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지 새삼 깨닫는 순간이었다. 소설의 감동과는 또 다른, 망막에 깊이 새겨지는 한 폭 한 폭 그림들의 일렁임. 영화 속 그림이 저렇게까지 아름다울 수 있구나 하는데 생각이 미쳤고, 영화에도 물감이 뿌려질 수 있음을, 특히 사람과 자연이 솔직하게 그려졌을 때의 아름다움은 그 어떤 그림과도 비교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 2004년작 <노브레인 레이스>에 출연한 우피 골드버그
ⓒ 파라마운트 픽처스 우피와 새로운 사랑에 빠지다

극장 문을 나서기 전, 나는 마지막 동전까지 털어 영화 홍보물들을 샀다. 그냥 나서기에는 너무 감동이 커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아서였다. 세 시간 전에 헤어진 여자, 그리고 약간의 아픔 따위는 이미 내 가슴과 머릿속에서 지워진 뒤였다. 나는 그만 새로운 여자와 사랑에 빠지고 만 것이었다. 우피 골드버그! 그 여자를 그렇게 만났다.

흑인 더하기 추녀에다 몸매 하나 봐줄 데 없는 여자가 할리우드를 정복하기는 말이 쉽지 거의 불가능하다. 우피 이후 등장해 인정받은 흑인 여배우들의 면면을 보면 알 수 있다. 무한한 꿈의 나라인 듯 보이는 미국이지만 그 실상은 얼마나 인종차별주의에 사로잡혀 있는지 새삼 설명이 필요 없다. 그런 상황에서 악조건은 다 갖추고도 당당히 일류로 평가받은 여자 우피에 대한 존경심이 나도 모르게 사랑으로 변해갔다.

'겉볼안'이라는 우리말이 있다. 겉을 보면 속은 안 보아도 짐작할 수 있다는 말로써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는 속담과 일맥상통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외모우선주의' 또는 '외모지상주의'는 겉으로 배척하면서도 속으로 다들 인정하는 못된 가치관이다. 그런 생각들이 성형열풍을 불게 하고 의대 지망생들 가운데 상당수를 특정 학과에 몰리게끔 하지 않는가 말이다. 사람 속보다는 겉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맹신 위에 우피는 당당하게 서 있다.

이후 나는 국내에서 개봉되는 우피의 영화 전부를 봤다. 이른바 '마니아'가 된 셈인데 그 정도를 넘어 사랑하게 되면서부터 그때까지 나를 지배하고 있던 염세주의로부터 서서히 벗어나게 되었다. 우피를 사랑하면 할수록, 너무나 자연스러운 연기 대목마다, 꾸미지 않은 웃음마다, 어줍은 내 가치관과 철학을 깨뜨리는 벽력같은 일갈이 담겨있었다. 우피는 어느새 내 머릿속에 똬리를 틀고 있던 '헤겔'과 '쇼펜하우어'를 몰아내고 스승이 되었다.

참 묘한 인연이다. 영화 한 편으로 시작한 배우와 팬의 관계에서 스승과 제자라니, 더구나 나보다 겨우 다섯 살밖에 많지 않은 흑인 여자를 스승으로 생각하게 되다니 말이다. 하기야 어린들 스승이 아니겠냐마는. 어쨌거나 놀랍게도 나는 우피와 만나면 만날수록 생각과 행동이 밝아졌다.

지금 다시 생각해도 우피를 만난 것은 내 인생의 행운이었다. 아내도 질투하지 않을 스승이요, 영원한 애인을 한 사람 더 곁에 두고 있는 잉걸아빠는 암만해도 여복이 많다.

자, 이제 <오마이뉴스> 독자들에게 감히 이 영화를 '강권'한다. 봤더라도 한 번 다시 보시라. 못 봤다면 꼭 찾아 보시라. 아! 참 좋은 영화다, 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면 잉걸아빠에게 항의하시라. DVD 빌린 값 물어드릴 테니 말이다. 참말이다. 그러나 제발 부탁인데 우피에게 빠지지는 마시라. 우피의 한국 애인은 잉걸아빠 한 사람으로 충분하니까.

칼라 퍼플(1985, The Color Purple)에 대하여
원 작 : 앨리스 워커 (Alice Walker) ← 2004년도에 한국 방문
아카데미 11 개 부문 노미네이트, 단 한 개의 상도 수상하지 못함.

한국 개봉 : 1986년 10월 18일

감 독 : 스티븐 스필버그 (Steven Spielberg)
각 본 : 메노 메이제스 (Menno Meyjes)
음 악 : 퀸시 존스 (Quincy Jones)
촬 영 : 알렌 다비오 (Allen Daviau)
출 연 :
우피 골드버그 (Whoopi Goldberg) ▷ 셀리
아코수아 부샤 (Akosua Busia) ▷ 네티
대니 글로버 (Danny Glover) ▷ 미스터
오프라 윈프리 (Oprah Winfrey) ▷ 소피아
마가렛 에이버리 (Margaret Avery) ▷ 셕 에이버리

줄거리 : 바보처럼 착하고 오직 복종밖에 모르는 못생긴 흑인 여자 셀리는 열네 살 때 의붓아버지에게 강간을 당한 뒤 성노리갯감이 된다. 아이를 둘이나 낳을 때까지 의붓아버지, 아니 짐승에게 말이다. 셀리에게 오직 한 가지 낙이 있다면 여동생 네티와 의지하며 살아가는 일이다. 하지만 의붓아버지는 여동생 네티마저 건드리려 한다.

↑ 이후는 영화로 직접 확인하시기를.

2005-09-06 11:50 ⓒ 2007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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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이 커서 '얼큰샘'으로 통하는 이동환은 논술강사로, 현재 안양시 평촌 <씨알논술학당> 대표강사로 재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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